음침한 숲속.
스산한 바람이 비명을 남기고 사라져간다.
아니 비명을 지른 건 바람이 아닐 수도...
귀신에 씌인듯 칼집없이 요동치는 녹슨 일본도는 보는 이의 정신까지 집어삼키겠다는 듯 불길한 소리를 내며 점점 크게 떨었다. 떠는 것도 부족했는지 형형색색 불길한 빛을 뿜으며.
[시작인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의 불길한 일본도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휙
피를 털듯 가볍게 불길한 칼을 휘두른 사내는 그대로 한바퀴 돌린 칼날면에 오른 손을 대고 슥 문지르며 들릴락말락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봉.마.]
그의 주문에 답하듯 요동치던 요도가 점차 조용해지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듯 녹슨 일본도로 돌아왔다.
[그렇게나 피를 원하는 가...? 저주받은 요도여...!]
사내는 감정없는 건조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보다가 이내 마치 독약을 다루듯 조심스레 검집없는 허리춤에 요도를 차고 돌아서서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쿵
그가 머물던 자리에 깔끔한 절단면을 남긴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져 뒤늦게 붙잡겠다는 듯했지만 구름의 품에서 빠져나온 초승달이 집어삼키기라도 했는지 온데간데 없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의 불길한 칼과 함께.
거대한 건물안.
"너희들은 누구냐...!"
깨진 헬멧사이로 드러난 피 맺힌 입에서 경악을 가득 담은 질문이 튀어나오자 정체불명의 사내는 묵묵부답하며 그저 그의 목에 불길해보이는 일본도를 갖다댈 뿐이었다.
그리고 곧 따로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의 무리들이 꼼작못하는 군복의 사내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장악중인 불청객들의 눈은 하나같이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으며 또다른 공통점이라면 그들의 어깨에는 만(卍)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
"이 근방 철권중은 모두 제압, 거점 확보를 마쳤습니다 당주. ...헉!"
당주라 불린 사내는 묵묵히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하를 향해 몇번인지 헤아리기조차 힘든 무서운 속도로 칼을 휘둘러댔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신의 목이 붙어있는지 확인하던 부하는 왜그러냐는듯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려 당주를 쳐다보려했을때 당주는 이미 등을 돌려 도약과 함께 사라지는 중이었다.
부하가 뒤늦게 바닥을 뒹구는 총알을 확인하고 한번 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처에서 두령의 뒷모습을 쫒았지만 찾았을땐 이미 그의 신형은 저멀리 총을 쏜 범인의 등뒤에 나타나 돌아보기도 전에 쇳소리같은 목소리를 남기며 불길한 검을 찔러박은 후였다.
[악.즉.참.]
꽃에 물을 주듯 적의 등에 떨리는 검을 박은 채로 잠시 가만있던 당주란 자의 가면밖 안광이 점점 붉어졌다.
"끄어어."
적의 신음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당주는 서둘러 자신의 불길한 검을 뽑고 부하들을 불러 적의 용태를 살피게 했지만,
"늦었습니다..."
[그런가...나도 아직 수행이 부족하군...]
그는 한 차례 원망어린 눈으로 자신의 검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검은 마치 배부른 맹수의 모습처럼 만족한다는 듯 조용히 그의 흉측한 몰골을 비출 뿐.
검을 갈무리하고 자신의 검에 의해 숨을 거둔 적의 눈을 손으로 쓸어감긴 당주의 가면밖으로 다시 한번 쇠를 긁는 목소리가 세어나왔다.
[나무아미타불. ...서둘러라. 더이상의 살생이 없도록 신속히 작전을 실행하고 복귀한다.]
"존명!"
그의 명령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하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 안이함을 비웃는 이가 등장하기 전까진.
쾅
당원 하나가 들이닥쳤던 한 밀실이 침입자를 토해내듯 벽이 폭발하며 잔해와 함께 들어갔던 당원이 당주의 발 밑까지 날아왔다.
급하게 부하의 목에 맥을 짚던 당주라는 사내는 곧 부하의 눈을 감겨주며 이를 갈고 폭발한 벽쪽을 노려보았다.
으드득
먼지가 자욱한 벽의 구멍으로부터 건장한 사내의 실루엣이 팔짱을 낀채 드러났다.
한 당원이 그를 향해 뛰어들었지만 그 사내는 귀찮다는 듯이 주먹도 쥐지않은 손으로 마치 날벌레 쫓듯 간단한 손동작으로 휘저어 당원을 날려버렸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선명해져가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은 단추를 채우지 않은 셔츠밖으로 드러난 기다란 상흔과 탄탄한 근육, 그리고 뾰족한 머릿결.
[카즈야...!]
"호오? 이게 누구신가. 자칭 약자들의 수호자, 만당의 수령이 일개 사유지에는 어쩐일로?"
[분명 협상차 출국했다고 들었는데?]
"귀찮아서 말이지. 녀석들을 여기로 불렀다. 만일 일정대로 움직였다면 내 안방을 넋 놓고 털릴 뻔했군."
[전화위복. 차라리 잘됐군. 이 자리에서 너의 악행을 끊어주마 현세에 강림한 아수라여!]
또 다시 도약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 당주의 신형이 카즈야의 머리 바로 위에서 갑자기 나타나 불길하게 요동치는 자신의 검으로 채 팔짱도 풀지 못한 카즈야를 향해 내리쳤다.
콱
카즈야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흉기를 피할 생각도 안하고 콧웃음치며 가뿐히 검을 굳게 쥔 당주의 손에 장타를 먹여 칼을 멈춰세우고 곧장 무시무시한 돌려차기로 답례했다.
카즈야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전에 그의 돌려차기를 맞고 멀리 날아가던 당주의 몸이 고양이처럼 가볍게 공중에서 중심을 잡고 착지했다.
"...그 짧은 순간에 제법 매운 발차기라니. 날붙이따위 없이도 꽤 하지않는가 요시미츠?"
엄지로 멍이든 입술을 훑으며 살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 카즈야의 물음에 당주는 쇠를 긁는 목소리로 답했다.
[...요시미츠란 네놈이 일컫는 이 요도의 이름. 이몸은 너와 같은 악을 처단키 위해 이름따위 버린지 오래.]
"...그렇다면 버려진 이름과 같이 죽어라 만당 수령!"
말을 마친 카즈야가 자세를 고쳐잡고 고개를 몇번 흔들며 발을 구르자 몇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파도치듯 순식간에 요시미츠에게 들이닥쳤다.
파지직
요도 요시미츠가 그의 머리카락 몇올을 가르고 사라지자 숙였던 카즈야의 왼주먹이 방전했다.
퍽
턱을 맞고 날아가는 와중에도 그 힘을 역이용한 요시미츠의 발차기가 입꼬리가 올라간 카즈야의 얼굴을 향해 쇄도.
"두번은 안통한다."
찰나의 순간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은 향해 날아온 요시미츠의 발꿈치를 붙잡은 카즈야는 허공에서 그를 휘둘러 원심력을 얻고 그대로 바닥에 꽂아버렸다.
쿵
[크흡!]
판넬바닥이 찌그러질 정도의 힘으로 내동댕이쳐진 요시미츠를 향해 카즈야의 구둣발이 폐차장 프레스처럼 빠르게 덮쳐왔다.
쾅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부서진 바닥에 다리가 박히고만 카즈야의 머리위로 순식간에 사라졌던 만당의 당주가 튀어나와 끔찍한 요기를 내뿜는 '요시미츠'를 내리쳤고 동시에 방전하는 카즈야의 주먹이 요도의 날을 향해 솟구쳤다.
파지직
"...어째서 그 장난감의 힘을 모두 개방하지 않는거지?"
자기 손에서 흐르는 피맛을 보고 요동치는 저주받은 칼날을 움켜쥔 카즈야의 질문에 만당 당주는 그새 더 쉰듯 한층 더 쇳소리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자네와 다르다네...]
"그런가. 끝까지 인간의 정신으로 그 괴물을 다루겠다고? 쿠쿠쿡. 웃기는 군. 포기하면 이렇게나 편한데 말이야."
요도의 칼날을 움켜쥔 카즈야의 손이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그대에게 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더이상의 악행을 멈추시게 미시마...]
"아아..."
대답이 곤란한지 잠시 신음을 흘리던 카즈야의 광소로 일그러진 입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렀다.
[누구에게 하는 말?]
얼굴까지 보랏빛 어둠에 삼켜진 카즈야의 붉은 두눈 사이의 미간이 벌어지며 또 다른 눈이 희번뜩 요시미츠를 내려다보았다.
[데빌...!]
으드득
요시미츠는 이를 갈기가 무섭게 '데빌'의 주먹을 부여잡고 검집에서 검을 뽑듯 상대 손에 잡혀있던 요도를 뽑아 회수한 뒤 검을 고쳐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크흐흐 요시미츠라. 안됐군 그래. 검따위에 봉인될 게 아니라 적당한 인간에게 붙었다면 좋았을 걸.]
요도에 베여 피를 철철 흘리던 주먹 쥔 손은 어느새 피가 멈추고 펼쳐진 손은 날카로운 손톱과 때때로 튀는 스파크를 드러내었다.
이미 셔츠는 온데간데없이 찢어지고 등뒤에 끔찍한 날개를 펼친 '그'의 보랏빛몸에 유독 가슴의 선명한 흉터가 불길한 붉은기운을 뿜어냈다. 마치 자신 앞에서 요기를 내뿜는 요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