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8년 3월 5일. 저녁5시
아직 쌀쌀한 한국이기에 진한 브라운색 롱 원피스에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미 마음이 정리된 남자친구와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부모님의 아쉬움이 가득 담긴 인사를 뒤로하며 노을이 지고 있는 도로를 달려갔다.
둘은 별말이 없었다. 여자의 남자친구 형선은 기도했다. 지금 데려다주고 있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만을..
여자는 부모님 곁을 떠나는 아쉬움도, 형선의 곁을 떠나는 아쉬움도 없이 담담히 공항으로 향했다.
이처럼 1달 전부터 이들의 마음은 다른 쪽을 향해 있었다.
왜였을까…. 1년 넘는 시간 동안 서로 사랑했었다. 하지만 여자는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혹여 그때부터였을까. 둘의 마음이 달랐던 것은.. 결혼까지 이야기했던 사이였는데 여자는 형선 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수많은 기념일과 선물과 메시지와 통화 그 안에 사랑은 없었다. 왜였을까..
하지만 지금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24살까지 꿈이 없던 그녀였기에 꿈이 생긴 뒤로 27살 현재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기에.. 사랑과 결혼은 그녀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렇다. 사랑도 타이밍. 형선과 여자의 사랑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이 사랑의 끝맺음을 짓지 못하고 떠났다. 두려웠다.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힘들게 하는 사람뿐 오직 그 형선 만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여자는 두려웠던 것이다. 사랑이 아닌... 힘을 잃어버릴까..
7시 30분 비행기 시간은 9시 15분.
한참 일찍 공항에 들어온 그녀는 일찍이 출국심사를 받았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혼자 깜깜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가족과 연인과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고 물건을 사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의자에 신발을 벗고 앉았다.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을 참이었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았으며 주위는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그녀는 담담히 이어폰을 꼈다.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가족과 형선, 그리고 형선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리기로 한다.
힘들었다.. 할 말도 별로 없었다. 그냥 의무감이었다. 여자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그녀에게 마음에 와 닿는 사람은 한 명도 정말 한 명도 없었다. 가족조차도 말이다.
같이 지내야했기에, 아니면 정말 혼자인 것만 같은 두려움에 웃는 얼굴을 하고 모두를 챙겼었다. 지친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렇게 의무감에 전화를 모두에게 돌린 여자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다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시간은 베트남 시간으로 그 다음 날인 오전12:20분
베트남은 한국보다 2시간이 늦다. 무려 5시간의 비행시간.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혼자 스스로 해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는 이어폰을 빼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떠한 장르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고 있으면 전혀 외롭지 않았고 시간도 정말 잘 갔다.
베트남에 도착하면 베트남현지직원이 그녀를 마중 나오기로 되어있었다.
여자는 처음으로 헌 인생을 버리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길 여러 번, 비행기 창밖은 낮에 보이는 구름 너머의 밝은 태양과 푸른 하늘도 보이지 않았고 깜깜한 밤하늘 때문인지 창문은 야속히도 한없이 여자만 비춰주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 여자만 비춰주던 창이 반짝반짝한 별빛 과도 같은 하노이 밤의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드디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도착한 3월 하노이의 밤 날씨는 짐작한 데로 한국보다는 더웠다. 공항에서 형선 에게 코트를 맡기고 온 것이 잘했다고 생각되는 참이었다. 어렵사리 혼자 짐을 찾고 Ms,Hong 을 만났다.
Hong 은 여자와 같이 일할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여자의 직업은 한국어 교사. 그녀는 한국어를 사랑하며 한국어를 경이로워하는 또래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는 여자이다.
여자의 인생은 참으로 변화무쌍했으며 바빴고, 힘든 나날이었다.
경제적 어려움, 가족 간의 불화, 부모님의 차별과 폭언 폭행 모두 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무엇을 위해 베트남으로 혼자 온 것일까.
“Hi."
Ms.Hong 과 첫인사를 나눈다, SNS가 아닌 실제로 말이다. Hong과 여자는 동갑이다.
친구로서, 동료로서 만난 것이다. Hong 은 그녀가 한국어 교사로서 계약하고 오기로 한 유학원의 마케팅 직원이다. 해당 유학원은 그녀가 한국에서 기다리는 2달 전부터 일을 진행해 왔었지만 자리가 잡혀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녀가 베트남으로 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업무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Hong은 그녀의 남동생과 같이 나와 있었다.
기대를 많이 한 듯 그녀와 남동생은 새벽 시간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여자를 맞아주었다.
Hong은 여자가 듣던 데로 영어 대화가 힘들어 보였다.
“지 선생님 Hong과는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대화가 훨씬 수월합니다. 그 친구가 영어 타이핑은 되는데 말이 안 돼요. 허허.”
라고 했던 원장의 말이 생각이 나는 여자였다.
여자는 그때는 실감하지 못하고 웃어넘겼지만 만나보니 실감하고 걱정이 앞섰다. Hong의 남동생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기본적인 영어조차도 아예 알아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여자는 용기를 냈다.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온 곳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Hong은 여자를 자신의 남동생 집으로 초대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남동생 집에서 자고 다음 날 하노이에서 박닌 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박닌은 하노이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여자와 Hong 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다.
피곤했던 여자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침묵이 감도는 택시 안에서 수많은 베트남 식 건축물들을 구경하며 얼른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여자는 얼른 씻고 싶었다.
수많은 베트남식 건축물 중 한곳에 도착했다. 이곳이 남동생의 회사 겸 집이라고 Hong은 여자에게 소개했다.
좁고도 길고 높은 모양의 건축물, 건물 사이사이에 어떠한 공간 없이 바로 옆집과 벽이 맞닿아 있는 구조의 집이었다. 전형적인 베트남식 로컬 집이었다.
남동생이 철창문을 열쇠로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열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한 번 더 놀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1층의 거실은 오토바이 주차장과 비슷하였고, 그 오토바이 주차장을 지나면 바로 부엌이 나왔으며 부엌에서는 식탁 밑으로 쥐가 돌아다녔으며, 식기들이 청결하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여자는 스스로 생각했다. ‘괜찮아, 여긴 베트남이잖아.’
이 정도로 실망할 여자가 아니었다. 표정관리를 마친 여자는 그들을 따라 부엌의 계단 밑에 신발을 벗어놓고 올라갔다. 2층을 지나 3층 복도식 방바닥에 매트 를 하나 깔아 놓은 곳이었다. 여기가 그들의 침실이었다. 여자는 그냥 빨리 씻고 자고 싶었다.
Hong에게 말하니 화장실로 안내를 해주었고, 화장실에는 온갖 곰팡이와 물때가 있었으며, 그 어떠한 세면도구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냥 물로만 씻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얼른 1층으로 내려가 케리어 에서 세면도구들을 챙겨 올라와 세수만 간단히 했다.
여자는 Hong과 남동생이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 먹자는 말도 뒤로 한 채 얼른 자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은 여자를 배려해 주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