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3)
우리는 고민 끝에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1. 부모님께 최대한 숨길 것.
2. 외출을 자제할 것.
3. 항상 하녀를 동반하고 움직일 것.
4.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 경우, 기억상실이라 이유를 댈 것.
사실 규칙으로 정해야 할 만큼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건을 정한 것은 가족, 아니 하다못해 어머니에게 만큼은 최대한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으레 귀족마님이 그렇듯 심약했다. 가족의 안영과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깨질 수 있는 것임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사람. 그녀에게 일생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은 아버지의 출전이었으리라. 그것이 허울뿐인 출전에 가장 안전한 막사 안에서 같은 고위 귀족들과 체스나 두고 있다하더라도. 물론 언니의 약혼자를 보면 그녀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 뿐이다.
어머니는... 아마 절대 언니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 못 할 것이다. 차라리 미쳤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시골에 요양 보내는 한이 있어도,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리라.
“ 베로나, 조건은 이게 전부인가요? 저야 상관없지만.. 잘 숨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아버님은 전쟁터에 계신다 해도 어머님은.. 어머니잖아요.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못 알아 볼 리가 없어요. ”
“ 어머니는 자기 딸 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한 사람이에요. ”
어머니는 분명히 가족의 안영을 바라는 사람이지만, 그게 본인의 안위보다 중요한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끔찍이 여기고 대외적인 평판을 중요시 여긴다.
“ 그러니 걱정할 이유가 없지요. ”
그녀는 반론을 위해 입을 열었다가 금방 다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니면 미쳤다는 오인을 받으며 어디 시골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이어지는 신랄한 비판에 어색하게 웃었다.
“ 알겠어요. 그렇다면 하녀에 대해서 말인데요. ”
“ 하녀는 제가 입이 무거운 자들로 골라 보내도록 하죠. ”
“ 그거 말인데...혹시 제가 골라도 될까요? 아까 차를 따라주던 하녀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저는 그 분이면 되요. 다른 하녀는 필요 없어요. ”
영애-뭐라고 지칭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라고 부르고 숨을 뱉었다. 마리는..
“ 마리는 주방하녀에요. 그리고 고작 하녀 하나라니, 안될 일이죠. ”
“ 차를 가지고 와서 시중을 들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할거에요. 저, 어차피 나갈 일도 별로 없을 거고... ”
“ 전담하녀라는 건 생각보다 하는 일이 많아요. 우편관리, 주인치장, 식사, 청결 그 모든 걸 그 아이 혼자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
“ 지금까지 하녀를 들이지 않았다가 갑자기 들이는 거잖아요. 너무 많은 하녀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으면 되는 거구.. ”
“ 그건 언니가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
“ 부탁해요 ”
비슷한 이야기가 몇 차례 오갔다. 이내 그녀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지푸라기같이 바스러지는 머리카락과 볼이 움푹 파인 얼굴. 찻잔을 만지는 살점 하나 없는 손목에 깊게 그어진 자상- 분명 언니의 모습 그대로인데.... 표정만이 생기 있다. 항상 아래로 향하던 시선이 정면을 바라본다. 그 괴리감이 자꾸만 깨닫게 했다. 눈앞에 여자는 자기 의견 없고, 쉽게 자신을 놓으려하고, 마음 여린 언니가 아니다.
밀려오는 씁쓸함에 베로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
정원에 꽃이 폈다. 이동할 때마다 하얗게 내뱉던 입김도 보이지 않는다. 옷차림 또한 조금씩 가벼워졌다. 창문을 만지면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봄이 온 것이다.
베로나는 확 포근해진 날씨를 체감하며 서신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출전하고부터 가문에 오는 서신을 확인하는 일은 중요한 일과가 되어 있었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나는구나.
간략한 진행 상황과 곧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덮으며 그녀는 흐르는 시간을 체감했다.
다음 서신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자, 서신을 건네는 하녀의 손이 떨렸다.
파르마 백작가
가문을 상징하는 아이리스가 찍힌 인장이 먼저 보였다. 모순됐다.
그도 그럴게 파르마 백작가는 언니의 약혼자의 가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