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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언제나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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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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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23     조회 : 255     추천 : 0     분량 : 8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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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녀는 장덕희라고 했다. 그녀 또한 장군상이 떡하니 서있고 향내가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가자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자기소개부터 한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이 그렇다. 막상 불행이 코끝까지 차오른 상태로 이곳에 찾아오면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기의 이름과 나이, 하는 일까지 술술 불기 마련이었다.

  보살로서의 내 역할은 아주 단순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방치된 놋그릇에 쌀을 담아가져오고 심지가 타버린 촛농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그럴싸한 분위기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덕희 씨랑 나는 5분 정도를 같이 방 안에 있었다. 어색해 죽는 줄 알았지만 나보다 더 곤욕스러운 건 아마 그녀일 터였다. 여사님은 저게 모시는 신이냐고 한 손에 커다란 창을 들고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맞붙인 채 무릎에 올린 커다란 장군상을 가리켰는데 진짜 궁금하다기보다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스스로를 진정 시키려 아무 말이나 한 것이 분명했다. 난 갑자기 생겨버린 ‘보살’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모르면 그냥 웃으며 되는 일이었다. 난 정확하게 할머니가 모시는 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누나는 한복을 입고 눈꼬리를 립스틱으로 날카롭게 그려 넣은 채 등장했다. 어떤 극적 효과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충격을 줄 생각이면 완벽하게 성공한 것 같았다.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만 깨물고 있던 손님이 기겁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으니깐.

  “딸 때문이라고.”

  앉자마자 누나가 물었다. 삼강오륜이 기본근간인 나라에서 오백만원에 엄마뻘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누나의 담대함에 나는 새삼 감탄했다.

  “네? 아, 네.”

  “고개를 들어.”

  누나가 말했다. 불쌍한 희생양은 고개를 슬쩍 들다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나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다 별안간 놋그릇에 쌀을 집어 바닥에 뿌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저런 짓을 한 적이 없었는데. 삼만 오천 시간을 어디다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딸이 아프구만.”

  누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꿀 먹었어?”

  “아니요, 아니요. 다만… 어디가 아픈지요?”

  시작과 동시에 위기였다. 딸에 악재가 겹쳤다는 말에 누나는 단순히 딸이 죽을병에 걸렸을 거라 짐작한 것이었다. 물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누나가 멍청하게 일차원적으로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누나와 내가 다른 게 있다면 누나는 나보다 더 뻔뻔하다는 것이었다.

  “그걸 애미가 돼가지고 모른다는 말이야?”

  누나가 탁자를 치는 바람에 애꿎은 이천 쌀이 바닥에 쏟아졌고 그녀는 떨어진 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쌀은 인간의 주식이고 명운을 뜻해. 쌀이 떨어진 것은 명운이 닳고 있는 거라고.”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딸이 죽을 병에 걸린 건가요?”

  “그래. 여태 그걸 몰랐단 말이야?”

  “하지만 몸이 아픈 건 전혀 몰랐는데요. 티도, 티도 안 났어요!”

  “몸이 아니야!”

  누나가 다시 탁자를 쾅 쳤다. 누나는 가슴을 두어번 두드렸다.

  “여기. 여기가 문제인데 사지가 멀쩡하면 뭐해.”

  나는 충격에 휩싸여 누나를 바라보았다. 무당질을 하라 앉혀놨더니 심리상담가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경영학과 나온 년이! 나는 그건 아니라고 뒤에서 고개를 저었지만 누나는 내 쪽을 전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거였나요?”

  여자가 물었다.

  “그래서 만약 자기가 죽어도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한 건가요?”

  “그런 것도 모르고 애미랍시고 앉아있고… 나가 이 년아! 백날 천날 무당을 찾아가봐라! 애미가 제 정신이 아닌데 딸이 누굴 위안 삼아 살겠어!”

  누나가 혀를 차며 몸을 옆으로 휙 틀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때쯤 일이 생각만큼 순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과격하게 말하는 발성이나 저런 행동은 내가 봐도 너무 구렸고 유치했다. 똑바로 하라고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자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저것도 명품이었다)을 꺼내더니 손수건에 얼굴을 처박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조그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바라보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지은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누나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누나는 언제나 똑똑했다. 선천적으로 똑똑이인지 후천적인 똑똑이인지 묻는다면 나는 선천적인 똑똑이가 후천적으로 단련이 됐다고 말하겠다.

  누나는 남보다 먼저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깐.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10살 때, 어쩌다 한 두 개 나오는 딸기우유를 먹겠다고 친구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다가 엄마와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때부터는 흰 우유든 딸기우유든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게 된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정확한 사고 요인은 마주 오는 음주트럭이 김연아마냥 고속도로를 우아하게 이리저리 휘젓다 엄마, 아빠가 타고 있던 차를 묵사발 낸 것이었다. 그때 나는 7살이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전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 아빠가 멀리 떠났다는 할머니의 말에 언젠가 두 분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언제나 그랬듯 나를 위한 곰인형을 안아든 채. 내가 엄마,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더 이상 곰인형이 필요 없어진 나이가 되면서부터였다.

  누나는 10살 때부터 곰인형이 필요가 없어졌다. 10살은 죽음을 이해하는 나이였다. 즉 이미 엄마, 아빠는 죽었고 엄마, 아빠를 만나려면 그런 비슷한 사고를 당하거나 늙어 죽어야 한다는 걸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나이였다. 하지만 누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를 잃으면 엄마, 아빠를 가진 또래보다 인생이 몇 배 힘들어진다는 것을. 거기다가 우리를 돌봐줄 유일한 혈육이 죽음을 다루는 무당이라면… 인생의 롤러코스터 코스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꼬아진다는 것이다.

  무당년, 고아남매, 귀신 들린 것들, 작두 남매로 불리던 우리 남매가 이런 현실에 대응하는 건 신기하게 각자 달랐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담배를 배웠고, 유도를 배웠지만 누나는 악착 같이 공부했다. 아직도 선명한 내 기억 중 하나는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바로 방으로 들어간 누나를 어쩌다 슬쩍 열린 문틈으로 보았을 때 누나의 하이얀 교복 등판에 온갖 분필가루가 묻어 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개의치 않고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누나의 어깨 너머로 기다란 연필 끝이 쉬도 없이 까닥까닥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누나가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 안에는 두 가지 소리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연필이 신경질적으로 학습지에 쓸리는 소리와 울음을 참는 누나의 신음소리가.

  나는 이제 담배도 끊었고, 유도로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 정도로 똑똑해졌지만 누나가 겪었던 삶의 무게와 그것을 견뎌내며 아무 일 아닌 듯 공부만 했던 어린 날 누나의 마음가짐을 아직도 헤아릴 수가 없다.

 

  손님이 떠나간 후 우리는 한동안 식탁 위에 올려진 돈뭉치를 바라보았다.

  “저거 돈 맞지?”

  물은 건 놀랍게도 누나였다. 저런 멍청한 대사는 내 전문이었는데. 누나도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돈이야.”

  내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니라는 듯 누나가 말했다. 누나는 돈을 들더니 손에 꽉 찰 정도의 오 만원 다발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는 듯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게 눈을 치켜떴다. 누나는 그러면 안 들린다는 듯 입을 틀어막고 비명 비슷한 것을 지르더니 나를 보며 소리쳤다.

  “돈이야! 돈이라고오!”

  누나는 방방 뛰었다. 그 순간 나는 방방 뛰는 누나와 동조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누나의 가짜 무당 행세에 장단을 맞춰주게 됐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기였다. 가족이기는 해도 용녀무당이라는 사람을 빙자하고 그 사람의 능력을 가짜로 행세하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편취한 것이었다. 누나는 이 엄청난 사기죄에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그때 누나를 말리지 않았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돈이 필요했다. 할머니는 암이었고 누나는 고시생이었다. 나는 유도 밖에 잘할 수 있는 게 없는 취업 준비생에 불과했고. 그것이 이 행위에 정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성은 부여했다. 갑자기 찾아온 돈 많은 귀부인이 인생이 휘둘리는 딸을 위해 좋은 말을 해주길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전제에 깔려 있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위안이었지, 과학적인 해결법은 아니었다. 우린 그럴 듯한 분위기와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할머니의 이름값을 해준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만족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한 것이고. 그리고 그 돈은 할머니의 치료비에 쓰인다. 일종의 공생 관계였다. 마음의 위안을 주고 우린 필요한 돈을 얻고.

  나는 그렇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트럭을 거미줄로 막는 것처럼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가 슝슝 뚫린 궤변이었지만 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범죄자가 된 듯한 더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누나도 그렇게 느낀 것인지 모르겠다. 그 증거로 우린 한 탕 크게 한 이후 새로 발견한 우리의 재능을 두 번 다시는 쓰지 않았다. 입간판에 ‘잠정 휴업’을 떼도 않았고 소식을 모르고 온 손님들에게 다짜고짜 쌀알을 뿌리지도 않았다. 물론 우리 할머니가 무당이라서 할머니의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때의 사건은 조그만 일탈일 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누가 꺼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건 일탈이었다. 잠깐의 일탈.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누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주가 흐른 어느 날, 해가 막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빨간 빛으로 물들었을 때 대문이 쾅쾅 울렸다. 내 방에서 구인광고(보았는가? 나는 한 탕을 크게 해도 다시 어엿한 사회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를 알아보고 있던 나는 희미하게 들리는 문소리에 창문을 열어 목을 쭉 뺐다. 일주일 전 온 태풍 때문에 살짝 기울어진 대문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나는 누나를 부르려다 누나가 할머니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꼭 필요 할 때 없는 사람. 누나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은 까맣게 모른 채 그 문을 열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문 앞에는 공생 관계를 유지했던 그 귀한 손님이 서있었다. 보랏빛 블라우스에 구슬만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한 그녀는 지는 석양을 등지고 있음에도 화사한 요정 같아 보였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근사하지 못했다. 처음 봤을 때 위축된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숙제검사를 앞둔 아이처럼 불안한 표정이었다.

  “어, 사모님.”

  “용녀무당 있어요?”

  난 머릿속이 하이얗게 질려버린 기분이었다. 드디어 걸렸구나. 그래, 걸릴 수 밖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사람인데. 애초에 60살 차이가 나는 사람을 사칭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렸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급하게 한 번 더 말했다.

  “용녀무당이요.”

  “무슨 일 때문이죠?”

  나도 모르게 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들어차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덕희 씨가 내 머리채를 쥐뜯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들고 있는 핸드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딸이 죽을 뻔 했어요.”

 

  “뭐? 그 사람이 다시 왔다고?”

  누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핸드폰에서 귀를 떼야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딸이 죽을 뻔 했대! 교통사고로! 다행히 피해서 찰과상만 입었는데, 아무튼 장난 아닌거지!”

  나는 자초지종을 다 설명했다. 나는 혹시 여자가 뛰쳐나올까 굳게 닫힌 접견실 문을 바라보았다.

  “누나 혹시 부적에 누나도 모르게 저주의 말 쓴 거 아니야?”

  난 누나가 아무렇게나 한자를 쓴 것을 기억했다. 유일하게 쓸 줄 아는 게 이름 밖에 없는 사람이 막 휘갈길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다.

  “헛소리 좀 하지마!”

  “헛소리가 아니야! 나 무서워. 이게 그… 저준가 뭔가인 거 같아. 할머니가 모시는 신이 화가 난거지. 그럴 수 밖에! 누나가 장군님 부른다고 애국가 거꾸로 읊을 때부터 알아봤어!”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난 핸드폰을 꽉 붙잡았다.

  “어떻게 할 거야?”

  사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돈을 돌려주고 손에서 연기가 날 때까지 빌어야지.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런 일은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넘겼겠지만 20년을 가까이 무당의 집에서 자랐다면 얘기가 달랐다. 우리가 신을 노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돈을 돌려주고 이 일의 해결방법을 찾아야 돼.”

  “우리가 핸드폰 파니? 애프터 서비스 하게?”

  “그럼 어쩌려고?”

  “일단 내가 당장은 못 가. 지금 간다고 하면 할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거야.”

  “솔직히 말씀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더 일이 틀어지면 어떤 벌을 받을 줄 알고?”

  누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누나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그 사람 좀 바꿔줘.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

  “아이씨, 시끄럽고 바꾸라면 바꿔. 네가 해결할 거야?”

  그건 아니었다. 내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었지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차세대 용녀무당 뿐인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난 누나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문 앞으로 가 숨을 한 번 내쉰 뒤 문을 열었다.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던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난 미소를 지었다.

  “용녀무당이에요.”

  난 핸드폰을 건네고 바로 방을 나갔다. 난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그 방을 무서워했다. 신들이 서있는 벽지도 무서웠고 한 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장군상도 무서웠다. 이번에는 더더욱 그랬다. 나는 무거운 죄책감에 그 방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창문을 보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밤은 늦게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순이가 짖는 소리와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10분 정도 흘렀을 때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그녀가 나왔다. 스마트폰의 액정은 꺼져 있는 걸로 봐서 통화를 완전히 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누나가 사실대로 말했을까? 자기가 잘못을 해도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누나의 싹수를 생각하면 그럴 일은 없었다. 똑똑한 누나니깐 똑똑하게 처리를 했겠지. 나는 바보 같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스마트폰….”

  그녀가 내게 스마트폰을 주려 손을 뻗었고 나는 정말 번개처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스마트폰을 받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난 다년간의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무당님과 통화 잘 하셨나요?”

  “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놀랍게도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미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세! 안심이 되었다. 똑똑이 누나가 해낸 것이다. 전주 이 씨의 자랑 이연정 만세!

  “말씀을 들으니 정말 안심이 됩니다.”

  그녀가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슬쩍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난 대학생 때 체력 단련실에서 훔쳐온 체대마크가 버젓이 박혀 있는 반바지에 누나와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를 가지고 싸우는 바람에 케찹이 튄 스누피 티셔츠 차림이었다. 난 어색하게 케찹 부분을 닦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도 모르게 튀겼나보네요.”

  “준비 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면 될까요?”

  “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케찹을 닦던 나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당황한 건 그녀였다.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대놓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준비가… 된 건가요?”

  “어떤… 어떤 준비요?”

  “무당님께서…”

  그녀가 마치 뒤에 있다는 듯 귀 뒤로 엄지를 넘겼다.

  “보살, 보살님이라 부르는 게 맞지요? 보살님께 출장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는데요?”

  난 충격에 휩싸여 귀하신 VIP 손님을 바라보았다.

  “네? 네? 뭐라고요?”

  “아… 못 들으셨나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신뢰가 무너지는 표정이었다. 실수로 점수를 내줬을 때 지었던 감독님과 같은 표정. 하지만 이건 좀 더 달랐다. 실수로 점수를 내줬으면 다시 만회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런 일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었다. 한 판 패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내 어깨를 두드리던 감독님에게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짓듯이.

  “들었죠. 전 내일 가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기울어진 눈썹이 점점 펴지는 게 보였다.

  “차에서 기다리세요. 준비할게요.”

  난 티셔츠를 한 번 잡아당겼다 놓았다.

  “이런 꼴로 갈 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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