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웬 일이냐, 술을 다 먹자하고.”
누나가 내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내가 누나 잔을 채워주려 했지만 누나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짠.”
늘 느끼는 거였지만 술로 누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마을에는 없었다. 나는 누나가 팔순이 지나고 장기가 제 구실을 못할 때에야 겨우 이길 수 있을 듯 싶었다. 누나는 정말 빠르고 많이 마셨다. 게다가 가리는 술도 없어서 그야말로 술판에서는 천하장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누나의 장단을 조금이라도 맞출 수 있었다. 대학시절 창호 형이 말했던 것처럼 인생이 쓸 수록 소주가 달다는데 그 말이 얼추 맞는 거 같았다. 술이 달았다. 정말 너무나도 달았다.
“그거 칼륨 부족이야.”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술에 있는 액상과당이나 아스파탐 때문이기도 하고.”
“누나 이과였어?”
“나도 예전에 궁금해서 찾아본 거 뿐이야. 유달리 달게 느껴지는 날이 있더라고.”
“인생이 씁쓸하면.”
“뭐?”
“인생이 씁쓸하면 술이 달다.”
“미친놈.”
나는 하나 남은 라면을 끓인 냄비를 자기 쪽으로 끌어와 우걱우걱 처먹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양심이 있는지, 아니면 시선을 느꼈는지 젓가락으로 냄비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내가 너무 먹었냐?”
“대체 왜 싸운 거야?”
누나는 무슨 말이냐고 묻듯 고갯짓을 하다 내 말을 뜻을 이해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년이야.”
“누가?”
“누구겠어. 그 아줌마지. 개또라이 같은 년.”
맞는 말 같아서 욕하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왜? 어쨌길래.”
“아니, 혼자 와인을 들입다 처먹더라고. 봤지? 고고한 척하더니 들입다 와인 마시는 거. 누가 잡채에다 와인을 먹어. 아무튼 그러더니 점점 취했잖아. 말도 점점 꼬이고 얼굴도 벌개지고. 그러다가 니가 선물 가지러 올라가고 안 있어서 갑자기 그 년이 아가씨한테 이러더라. ‘야, 미안한데 입 좀 닥쳐 줄래?’”
“아, 진짜?”
“아, 빡쳐.”
누나는 생각만해도 열이 받는지 소주를 들이켰다. 나도 따라 마셨다.
“그래서 분위기가 완전히 냉각 됐지. 근데 아가씨가 참 착한 게 거기서 나 같으면 갈비찜이라도 던졌을 텐데 그러지 않더라(누나는 그러고도 남지, 라고 맞장구를 쳤다). 차분하게 ‘나는 그냥 오랜만에 언니 만나서 즐거우니깐.’ 이렇게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어찌나 짠하던지! 그런데 그 찢어 죽을 계집애가 ‘니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니?’ 이러더라니깐! 아, 소주 줘 봐!”
“소주 다 마셨는데?”
내가 밑에만 찰랑거리는 소주병을 흔들었다.
“그럼 꺼내와, 임마!”
나는 그렇게 했다. 냉장고에는 다행히 술꾼인 누나 덕분에 세 병이나 더 남아 있었다. 나는 금방 마실 거 같아서 세 병을 한 꺼번에 꺼내왔다. 누나는 소주잔을 채우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여자가 욕을 하더라? 씨발 개발 어쩌고 저쩌고.”
“갑자기?”
“그래, 갑자기. 그러면서 니가 뻔뻔스럽게 왜 여기 앉아 있냐, 어떻게 니가 나한테 말을 걸 수가 있냐 심지어는…”
누나가 식탁에 팔을 포갰다.
“왜 안 죽고 살아있냐는 말까지 하더라니깐.”
“아니, 대체 왜?”
내가 나도 모르게 식탁을 쾅 쳤다. 누나는 그런 박력은 처음 봤다는 듯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일이 있었나 봐.”
누나가 말했다.
“그때 쯤 취해서 거의 인사불성이어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옛날에 동생이 있었나 봐. 아가씨 밑에 남동생.”
“어딜 가! 이 살인마 년아! 니가 아빠를 죽이고 동생을 죽였어! 기억해! 기억하라고오! 지옥으로 떨어져, 이 망할 녀언아!”
나는 피해자를 데리고 들어갈 때 피의자가 소리쳤던 말을 기억했다.
“그걸 진영 씨가 죽였다고?”
“그건 모르겠어. 정확한 내막이야 모르지. 아무튼 뭐 있나 봐. 근데 설마 뭐,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쐈겠니. 사고였나 봐. 내 생각에는 교통사고나 뭐 그런 게 났는데 둘 중 한 명만 살릴 수 있던 거야. 그래서 아가씨를 살린 거 같아.”
“그런 게 어딨어.”
“왜. 물살에 휩쓸리거나 그럴 수도 있지.”
“아빠는 뭐야?”
“그것도 모르지. 우리가 막 얘기했잖아. 아버지는 안 보인다고. 그게 죽어서 그랬을 지 누가 알았겠니.”
누나는 국물만 철렁이는 냄비를 젓가락으로 쓸어 담아 가라앉은 면을 집어 먹었다. 나는 소주를 삼켰다.
“아무튼 우리 잘릴 수도 있겠다 싶다.”
“왜.”
“몰라, 느낌이 쎄해. 솔직히 우리가 한 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근데 남매라는 것들이 치고 박고 싸웠으니 사모님이 우리를 계속 쓰겠어? 나 같아도 아, 이건 효과 없구나, 하고 안 쓸 거 같은데.”
“어떡하냐, 누나 그 집 지박령 되는 건 포기해야겠네.”
“다른 곳 구하지, 뭐.”
“누나!”
누나는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는 냄비 바닥까지 긁어먹을 생각인지 한참을 그렇게 젓가락질을 하다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젓가락을 팽겨쳤다.
“잘 됐어. 나도 뭐, 더 이상 이 짓거리 못하겠더라고. 본격적으로 행정고시나 준비해야지.”
누나의 예상이 맞았는지 사모님에게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 또한 그 난리법석을 떨고 온 직후로 그녀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백수 겸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왔고 가끔 열린 문틈으로 누나가 공부를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는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 수록 8월 14일은 다가왔고 잠이 오지 않는 날, 유튜브를 보기도 질릴 때면 나는 멍하니 달력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하루, 이틀이 되자 일과가 되었고 나중에는 시간도 정해졌다. 잠이 들 때까지. 나는 풀벌레 소리나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지만 가끔 헥헥거리며 발발 뛰는 순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잠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하염 없이 쳐다만 본 것이었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늦게 간다는 듯. 아니,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