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할머니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암덩어리는 잘 떼어졌고 경과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경과만 지켜보고 괜찮으면 당장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도 떨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인생은 어쩌면 블록처럼 척척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할머니가 아프고 사모님이 찾아왔고 할머니가 낫자 우리의 사기극도 막을 내린 것이었다. 어쩌면 팔자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 팔자에서 운이 좋은 며칠일 수도 있었다. 너무 드센 팔자라 하늘에 계신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우리가 돈 벌 수 있게 내려준 축복과도 같은 며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떤 축복을 받을까? 천국에 갈까? 나는 궁금해졌고 그건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할머니 팔자란 게 있어요?”
사과를 깎으며 내가 물었다. 할머니는 모로 누운 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 나를 바라보았다.
“읭?”
할머니는 응을 항상 길게 발음해 ‘읭’소리가 났다.
“팔자라는 게 있냐고.”
“읭.”
“아, 진짜 있어?”
“있지. 새꺄. 내가 무당 될 팔자라서 무당이 된 거 아녀.”
“그럼 죽어야만 하는 팔자도 있어요?”
“읭.”
“있어?”
“아, 있어. 아! 죽었잖아!”
할머니가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사과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왜.”
한참 후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핸드폰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사람끼리랑 인연이 있듯이 죽음이랑 인연이 깊은 사주도 있어.”
“그럼 무조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숙명이니깐.”
핸드폰의 뿅뿅 거리던 사운드가 똥또로롱하며 경쾌한 사운드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아, 죽었다.”라고 속삭였다. 나는 길게 이어진 사과껍질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읭.”
“만약 미래를 볼 줄 알아서 죽음을 피하면? 죽어야 하는 날인데 죽음을 피하면?”
“결국 죽어.”
할머니가 담요를 다리를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깔고 앉은 엉덩이를 슬쩍 들어올렸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너는 천 살까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냐. 그건 아니잖아.”
“그건 아닌데 나이가 막 스물 네 살 밖에 안 돼. 그러면 불쌍하잖아. 죽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맞잖아.” “그게 팔자여.”
“그럼 할머니는 안 도와줄 거야? 막 스물 세 네 살에 깡마르고 볼품 없는, 허수아비 중에서 제일 예쁜 허수아비 닮은 여자가 죽을 운명이라 도와달라 했는데?”
“아까부터 자꾸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못 도와주지. 죽는 날을 인간이 어찌 바꾼데.”
나는 남의 속도 모르고 핸드폰만 쿡쿡 찌르는 할머니를 야속하게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게임에 푹 빠진 채로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릴 뿐이었다.
“할머니는 살려고 암까지 제거 했으면서, 뭔.”
“뭐, 이 새꺄?”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과일을 깎는 척을 했다. 문이 열리면서 누나가 들어왔다. 누나는 작게 숨을 몰아쉬며 화투패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짜잔! 찾았지롱! 요 앞 문구점에서 팔더라.”
“뭔 화투패를 문구점에서 판다냐.”
할머니가 담요를 걷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린이 육성사업의 일환이 아닐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나가 자연스럽게 내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병원이름이 적힌 담요를 고이 접어 화투판을 만들었다. 난 그릇을 미니 냉장고 위에 놓고 방을 나왔다.
병원 아래 매점에서 담배를 샀다. 암 병동이라 흡연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담배를 폈다.
문이 쾅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장을 장롱에 넣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다시 문이 쾅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병원에 있는 누나는 아니었다. 누나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릴 이유는 없었으니깐. 순간 머릿속에 왠지 아가씨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야. 아가씨가 찾아온 거야. 그 생각은 정확히 신발을 신고 나갈 때까지만 계속 됐다. 바깥 바람을 쐬니 그런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세요?”
문 앞에서 내가 물었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순이가 집 안에서 낑낑거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님?”
내가 말했다. 다시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적어도 성인 남자는 말 없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는 엎어치기 자세를 한 번 복기한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한 사내가 서있었다. 정리가 안 된 더벅머리에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들처럼 땅딸막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걸 봐서는 술에 취해서 옛날 마누라 집을 착각한 건 아니었다.
“아따, 실례 합니다.”
실례가 되는 건 맞았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따, 거시기, 여가 용녀 무당 댁 맞습니까?”
아. 난 손님이라는 걸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줄이야.
“용녀무당님 지금 수련 가셔가지고요. 여기 보면 잠정 휴업이라고 써져 있는데.”
내가 입간판에 ‘잠정 휴업’ 딱지를 가리켰다. 그는 그걸 바라보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수련?”
마치 생전 처음 들어본 단어처럼 그는 화들짝 놀랐다.
“뭔 수련?”
“저야 모르죠. 항상 할머니는 수련을 가고는 해요. 수련이 끝날 때까지는 연락도 안 돼요.”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쪽은 누구여?”
“전 손잔데요.” “손자.”
그가 되물었다.
“잘 생겼네.”
“아, 감사합니다.”
“옛적에 날 닮아써.”
그는 진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틀어 왔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내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말을 사과하러 온 건가 싶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보랏빛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풀벌레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느덧 집 밖으로 나온 순이가 팔짝팔짝 뛰며 컹컹 짖었다. 나는 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하얗고 깡마른 낯익은 여자가 한 손에는 붕대를 하고 중학생이 인생 첫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보라색 원피스에 쥐똥만한 핸드백을 멘 채 서있었다. 뒤에는 늘 보던 검은색 새단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혼자 온 것이었다. 바로 여기로.
날 보러.
“아, 이런.”
내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