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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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빠르게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식탁에 소주병을 냉장고에 넣고 널브러진 옷들을 누나 방에 던져넣었다. 왜 있는 지 모를 바닥에 가위와 젓가락을 주워 싱크대에 던져 넣고 그릇 선반에 그릇 대신 놓인 라면들을 모조리 싱크대 서랍에 넣었다. 대충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게 거실을 치우고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은 다음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는 쭈그려 앉아 순이랑 놀고 있었다. 순이는 배를 까뒤집은 채 그녀의 손길을 맘껏 느끼고 있었다.
“걔 더러워요, 만지지 마요.”
내가 말했다.
“주인이 너 더럽대.”
그녀가 순이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애견인으로서 할 말이니?”
순이는 산책가자랑 앉아 밖에 모르는 녀석이었으므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턱이 없었다.
“들어오시겠어요?”
그녀가 일어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방은 다 치웠어요?”
“원래 깨끗했어요. 환기만 좀 시켰어요.”
그녀는 박물관이라도 온 것처럼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고 마저 치우지 못한 굴러다니는 볼펜(이게 왜 거실 바닥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이나 수건들을 주웠다.
“저 분이 용녀무당이에요?”
그녀가 누나 방문 위에 걸린 할머니 사진을 가리켰다. 옥청색 한복을 입고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찍어 놓은 영정사진이었다. 할머니는 저것이 미소를 짓고 있는 거라고 했다.
“용녀무당은 우리 누나죠. 저 분은 그냥 할머니. 김복순 씨.”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속일 건데요?”
“뭐, 미래를 보신다는 분이 저 분이 누군지도 몰라요? 미래에서 내가 말 안했던가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 지금 탈선한 거예요.”
“탈선이라고?”
“제 미래에는 연석 씨 집에 오는 게 없어요. 전 지금 자의로 여기 온 거예요. 연석 씨랑 화해하려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깐. 순간 고마운 감정이 들면서 동시에 걱정이 됐다.
“탈선하면 대가가 크잖아요.”
“그렇겠죠.” 그녀가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뭐 어때요. 어차피 죽는 거.” 웃음이 나왔다. 그녀에게서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마초적인 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내 미소를 보았는지 긴장이 풀린 표정이었다. 그녀는 식타겡 뒤집어져 있는 소주잔을 집어들었다.
“술 자주 먹나봐요?”
“나 말고 우리 누나가.” “누나?”
“아.”
그녀가 키득거렸다.
“누나가 있나보네요?”
“네.”
“예뻐요?”
“그냥… 사모님 비서 좀 닮았어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녀는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리더니 소주잔을 손 안에서 굴렸다.
“난 술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
“몸에 안 받나요?”
“아뇨. 미래에는 제가 술 먹는 게 없더라고요.”
“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안타깝네요.”
그녀가 나를 흘겼다.
“예?”
내가 물었다.
“술 한 잔도 안 마셔봤다고요.” “아, 네. 그… 안타깝습니다. 정말.”
“야.”
“야?”
“바보야, 술 한 잔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