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괜찮겠어요? 이건 진짜 탈선인데.”
난 그녀의 쭉 뻗은 손에 있는 술잔에 차마 술을 따를 수가 없었다. 탈선도 탈선이었지만 그녀는 술도 처음이었고 술이 몸에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못된 짓을 가르치는 느낌이었다.
“죽기 전에 먹어보고 싶었다고요.”
“몸도 약하신데.”
“누가 그래요? 내가 몸이 약하다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내가 깡말라서 그런 건 아니죠?”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닌데요. 건강해보이지는 않아서요.”
“어이없다. 전 그냥 많이 먹기로 되어 있지 않아서 많이 안 먹은 거 뿐이예요.”
“먹는 것도 정해서 먹었습니까?”
“예.”
그녀는 하루하루 어떤 생각으로 삶을 살아갔을까. 나도 모르게 잡고 있는 소주병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싶어 얼른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녀는 술을 곧잘 마셨다. 그녀는 술 예절를 알고 싶어 했고 나는 온갖 사회생활과 군 생활을 걸쳐 알게 된 꼰대 문화의 정석을 알려주었다.
“병은 상표를 안 보이게 잡아야 해요. 왜냐면 값싼 술을 먹여서 죄송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마다 다른데, 술잔에 술병 주둥이가 닿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나보다 높은 사람이랑 짠 할 때는 소주잔을 그 사람 소주잔 밑에 치는 거예요. 아니, 머리 올려치기 말고…”
그녀는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많이 웃었고 가장 즐거워했다. 군 생활 때 고라니에 차인 이야기를 해주니 계란 후라이를 입에 넣은 채 씹지도 못하고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렇게 보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녀가 이제야 스물 네 살의 아가씨로 보였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웃고 떠드는 발랄한 아가씨처럼.
“왜 그렇게 쳐다봐요?”
취기가 가득 오르니 흘깃흘깃 쳐다보던 것을 너무 대놓고 쳐다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진미채를 젓가락으로 집으려고 용을 쓰다가 그윽하게 쳐다보는 내 눈빛을 알아차렸다.
“즐거워요?”
내가 물었다.
“재미는 있네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거 물어보려고 쳐다본 거예요?”
“너무 근사한 눈빛이었죠?”
“아뇨.”
그녀는 진미채를 오물오물 씹었다. 요 앞 반찬가게에서 분명 4천원어치를 사온 것이었지만 그녀가 3800원 어치는 먹었다. 그녀는 홀로 소주를 삼켰다.
“그렇게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근데?”
소주가 쓰긴 쓴 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녀가 손을 내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어때요, 죽을 건데.”
그녀가 혼자 술을 따르려고 하길래 소주병을 집어 내가 따라주었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어요?”
“저도 제 삶을 이해 못해서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손에 있던 소주병을 뺏어 내 잔을 채워주었다. 소주는 바닥이 났기 때문에 반 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소주병을 흔들더니 한 쪽 구석에 놔두었다. 어느덧 세 병 째였다.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도 죽인 제 삶을 저도 이해를 못해서요.”
“진영 씨가 죽인 거 아니에요.”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가 웃음을 그치길 기다렸다.
“아, 미안요. 미안.”
“괜찮아요. 저도 취하면 갑자기 웃음이 나더라고요.”
“취해서 웃은 게 아닙니다.” 그녀가 경고하듯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석 씨가 미래에도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에요.”
“제가요?”
“네. 나 때문에 동생이랑 아빠가 죽었다니깐 저렇게 똑같이 말했어요. 혼자 진지하게 ‘진영 씨 잘못이 아니에요.’ 이렇게요. 그게 너무 신기해서요.”
“신기하면 웃음이 나시는구나.”
“그런가봐요.”
그녀가 다시 우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맛이 갔구나. 사모님은 이 여자가 우리 집에 온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전화를 해서 뭐라 해야하지? 댁 둘 째 딸이 취했으니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녀가 지을 볼만한 표정을 상상하니 즐거워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연석 씨, 있잖아요. 제가 죽인 게 맞아요. 제가 죽인 겁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책하듯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다.
“칼로 찔렀나요?”
내가 물었다.
“아뇨.”
“총으로 쐈어요?”
“아뇨.”
“트라잉앵글 초크라도…”
“아니죠!”
“그럼 왜 진영 씨가 죽인 거예요.”
“제가 미래를 바꿔서 죽은 거예요.”
그녀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차 사고로 죽어야 했던 동생을 구해냈거든요. 그래서 미래가 바뀐 거예요. 그 대가로 아버지도 죽은 거고.”
“니가 아빠를 죽이고 동생을 죽였어!”
나는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는 코를 어루만졌다. 코가 시뻘갰다.
“그럴 리가.”
내가 말했다.
“죽어야 할 동생은 살렸다고 아버지도 덩달아 죽다니. 그건 너무 대가가 크잖아요.”
“그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나는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때 계곡물에 내가 대신 쓸려 갔어야 했어요.”
“동생이 빠진 걸 구하려다 아버지도 휩쓸린 거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사고였잖아요. 언니가 원망할 일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딱, 딱, 딱, 딱. 일정한 간격의 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졌다. 순이가 심심해 요동을 치는지 쇠사슬로 된 목줄이 철컹철컹 소리를 냈다.
“언니는 제가 미래를 보는 줄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동생을 같이 구한 것도 언니였죠.”
“아….”
한 대 얻어 맞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덧 보랏빛으로 변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언니가 절 원망하는 이유는 그때 내가 아버지가 죽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걸 말하지 않았어요. 겁났거든요. 또 동생을 구하고 아버지까지 구하면 다음번엔 언니도 딸려갈 지도 모른다. 엄마도 딸려갈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 괴로운 듯 소주잔을 들었지만 소주잔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팽이 돌리듯 소주잔을 빙그르 돌렸다.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
소주잔이 요동을 치며 돌더니 식탁에 엎어지더니 굴러 식탁에 떨어질 뻔했고 나는 가까스로 그것을 낚아챘다.
“소주 꺼내올게요.”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난 일어서는 그녀의 깁스를 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 마셔요.”
“한 병만요.”
“제가 힘들어요.”
“나만 마시지, 뭐.” 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내 손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술을 처음 마시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미 취해서 오징어마냥 제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자기가 취한 줄을 몰랐다.
내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갑시다.”
“아직이요.”
“무슨 아직?”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요.”
“아니야, 끝났어.”
“제가 아직 온 이유를 말 안했잖아요.”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었어요?”
난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왜 찾아온 지 모르겠어요?”
“문제 내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아니구. 어차피 못 맞힐 거잖아.”
“나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
“그럼 맞혀봐요.” 나는 생각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 생각을 하진 않았다. 누나의 주사를 하도 많이 봐온 터라 주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옛적부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네요.”
“인생 좀 바꾸려고 왔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미래에 대항하려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 탈선이니 뭐니 신경 안 쓰려고요.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려고요.”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묻고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나는 그렇게 물을 건 후회했다. 옆에서 응원을 해줘도 모자를 판에 나는 너무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저도 제 행복 좀 찾으면 안 돼요?”
그녀는 예상 못한 대답에 아무 말도 못하는 내 팔을 잡더니 몸을 일으켰다. 난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아주었는데 그 순간 그녀가 내 멱살을 잡았다.
“내가 지금부터 탈선을 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캬라멜처럼 부드러웠고 입에서는 알콜향이 퍼졌다.
“준비 됐어요?”
“무슨 준비요?”
뻔한 답이었지만 난 순수한 사람인 것처럼 물었다.
“키스 한 번 합시다.”
“아니, 잠깐…”
그녀가 내 입술을 덮쳤다. 차라리 소주를 마시는 게 나을 정도로 강렬한 알콜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키스가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문어처럼 내 입술을 다 덮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가르쳐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