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
이 목소리는 타일런이다. 나를 지키던 호위 기사 중 하나이며 가장 친한 사이로 기억하고 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진한 갈색머리의 남성이 이곳 저곳에 탄 흔적이 남은 지저분한 망토를 뒤집어 쓰고 새 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날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진짜로 왔네..”
“뭐?”
“아..아냐”
무의식 적으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타일런도 대충 넘어가 주는 듯 하다. 에 손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아이의 손이다.
역시 벨베리브가 착각한 듯 하다. 내 기억상 난 아직 7살 이다. 어디선가 [아니거든!] 라고 소리치는 환청이 들려왔지만 기분 탓 이겠지,
“아니야. 그건 그렇고 타일런 딴 분들은?”
자연스럽게 가족 걱정이 나왔다. 뭔가 좀 어색하다. 타일런이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미안. 명령이 너를 데리고 도망가라. 이기에 마지막을 확인할 수 없었어. 미안하다.”
그렇군. 여러 아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난 눈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주입된 기억의 일부다. 원래는 모르던 사람들이기에 아무런 감정도 샘솟지 않았다.
그렇기에 곧 울 것 같은 타일런을 달래줄 수 있었다.
“괜찮아. 앞으로는.. 어떡하지?”
“이 물길을 따라가면 내 고향이 나와.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어. 올 때까지 일단 숨어 지내자. 따라와”
타일런이 짐을 챙기고 일어서 내게 손을 내밀어 온다. 무시할 것 없이 장갑을 껴도 굳은 살이 느껴지는 손을 잡고 일어선다.
꿈은 아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내게 기회가 생겼다. 그렇다면 전 세계처럼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난 분명 벨베리브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일종의 거래이다. 추억을 나눠준다는 것이 정확히 잘 모르겠다만 그깟 추억 몇 번이고 나눠줄 수 있다.
현아를 위해.
이 판타지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
등 뒤에서 오한이 끼쳐왔다. 서둘러 뒤를 돌아보지만 크게 자라 빽빽함을 이루는 나무와 풀숲 외엔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네.”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자 옆을 돌아보고 나서야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에 눈치챈다.
“.. 제니스?”
분명 방금 전 까지는 옆에 있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내 옆에 없다. 주변을 경계하고 있자니 등뒤에 위치한 수풀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제니스.”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게 검을 세우고 천천히 수풀을 향해 걸어간다. 나뭇가지를 거두니 눈에 보이는 것은 큰 엉덩이. 움켜 잡아보고 싶은 엉덩이 이다.
“쉿. 저것 좀 보세요. 타일런.”
엉덩이에 흠뻑 빠져있자니 제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엉덩이의 주인은 제니스 이였던 것이다.
평소에도 시끄러워서 골치 아픈 제니스가 뭔가에 집중하고 있나. 하고 제니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새의 알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며 검 붉은 빛을 띠는 아름다운 광택의 알이 있었다.
“.. 알이네?”
“평범한 알이 아니에요. 옆을 보세요.”
그때. 타일런은 알았다. 제니스의 시선은 사실 알에 꽂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위치한 알의 겉 표면 색과 똑같은 색의 비늘을 가진 한 마리의 용을 바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용은 알의 표면을 코로 한번 쓰다듬고 구슬퍼 하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커다란 날개를 펼친 후 단번에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수풀에 엎드린 둘은 용이 떠난 뒤에도 계속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심심함. 지루함 진부함 나태함 등 이제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충동들이 누가 강한지 내 몸에서 싸우고 있는지 몸은 계속하여 뭔가를 하기 위해 움직이지만 목표로 설정할 것이 없어 바닥만을 굴러다니고 있다.
이 마을에 온지 1년 정도 지났을까, 머지않아 만날 것처럼 말한 벨베리브는 아직 소식이 없다.
그래서 혹시나 이 마을에 현아가 살고 있진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놀러 간다는 명목으로 마을에 있는 여자란 여자를 훔쳐……이렇게 말하니 오해가 있을 것 같으니 정정한다.
마을 안에 있는 모든 여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현아의 얼굴은 물론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얼굴이 변했는데 현아도 안 변했을 리가 없다. 결국 난 벨베리브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얼굴 하니 떠오른 건데 지금의 내 얼굴은 전의 얼굴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직 어리긴 하지만 왠지 높아질 것 같은 코에 짙은 검은색 눈동자에 어울리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 꽤 미래가 밝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곳 사람들의 외모는 전부 기본 이상인 것 같다. 저번에 마을 탐방(여자 관찰)을 하러 갔을 때도 연예인 울고 갈 외모에 몸매를 가진 여자들이 꽤 많았다.
그 중 가장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도 내가 살던 곳에 갔으면 인기스타 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왠지 현아가 궁금하다. 사실 얼굴이 그대로 이길 원하지만 현아가 더 예뻐져도 못생겨져도 그 여자가 현아 라면 난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있다.
대낮에 낯부끄러운 말을 꺼내니 조금 후끈해졌다. 하지만 이 따분함은 아직 가시질 않았다. 역시 이곳은 검과 마법이 난무하고 드래곤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의 세계지만..
하이테크놀로지를 사용한 최첨단 기계가 없는 옛날 유럽 중세시대 같은 곳이다. 마법 때문에 과학 발전이 필요 없는 것 일지도 모르지만.. 마법 가지고 노는 것도 질린다.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연습한 것이 마법이니까,
“하.. 이럴 때만큼 기억이 필요 없을 때가 어디 있을까.”
뭐, 기억이 없었다면 말하는 것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내가 살던 곳과 이곳의 언어는 다르다. 약간 생김새가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것 이다.
“그래도, 꿈에 그리던 마법인데.. 이렇게 지루해질 수가 있다니..”
기억하던 것과 다르게 마법 사용이 편해진 것 같아 실험을 하고 있었더니 자칭 현관문인 나무 널빤지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열어주지 마.]
난 부모님 말 잘 듣는 어린이. 아니 타일런은 부모가 아니고 난 어린애가 아니니 상관 없나?..
부처가 된 느낌으로 명상을 하고 있자니 노크가 점점 빨라지고 난폭해짐을 느꼈다.
노크소리가 멈출 것 같지가 않아서 자기 없을 때는 문 열지 말라는 타일런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연다.
“응? 뭐야 넌.”
순간 뒤로 자빠질 뻔 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솜사탕처럼 부푼 하얀 수염 덕에 잔뜩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울퉁불퉁한 근육에 눈가에 깊게 베인 상처 덕에 험악한 인상을 주는 대장장이 패션의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뭐..뭐지? 빛 갚으라고 찾아온 건가? 타일런 이 자식.. 빛쟁이한테 쫓기는 몸 이였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어..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인식했는지 웃으면서 내 물음에 답해온다.
“난 제리스라고 한단다. 넌 누구니?”
웃은 게 맞을까.. 더욱 험악해 보인다. 그래도 날 안심 시키려고 하는 것을 보아하니 나쁜 사람은 아닌 듯 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제리스의 등뒤에서 타일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 제리스. 그 험악한 얼굴로 웃지 말라니깐?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 더 험악해 보여.”
“장난은 됐고 빨리 그 물건이나 보여주세.”
“아아. 그건 둘이서 천천히 얘기하고 그 뒤에 숙녀분은?”
숙녀라는 말에 제리스를 살펴보니 등 뒤에 녹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딸이야. 이름은 아일리 자일런.”
“딸? 네가?”
타일런이 말도 안되…라는 말과 함께 똥 씹은 표
정으로 제리스와 아일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제리스가 아일리를 인사시키기 위해 밀어낸다.
“..안녕하세요.”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본 미인이다. 전 세계 연예인들도 울고 갈 미모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자세히 봐야 알 정도의 연한 빨간색에 평범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목소리 또한 청아하고 가늘어 강한 보호욕구를 불어 일으키는 아기 참새 같다.
아니 아기 참새는 본 적이 없지만..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걸어 나와 아일리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 친구할래요?”
친구란 컴퓨터 게임처럼 많이 하면 질리지도 않고 보드 게임처럼 하다가 실증 나지 않는 유일한 장난감이다.
아니 저 표현도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같이 있으면 다른 의미로 즐거울 것 같다.
아일리 너 내 친구가 되라!
**
아일리와 친구 먹기는 꽤 간단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니 금방 같이 손을 잡아줬으며 뭔가 흥분한 표정으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얘기하고 있는 둘에게 아일리와 놀고 와도 되냐고 물어보니 망설임 없이 허가가 떨어졌다.
내가 향한 곳은 집 뒤쪽의 숲 안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커다란 나무도 있어 그늘도 있는데다가 바람도 적지 않게 불어오는 명당이다.
“우아! 신기해!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좋아 내가 가르쳐줄까요?”
“응! 가르쳐줘!”
거기에 마법을 한번 보여주니 이미 거리감은 이미 멀어 진지 오래이다. 크큭.. 이미 내게 넘어온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좋아. 기초부터 시작해볼까? 머리 속에서 상상을 하는 거야 동글 한 물 덩어리를.”
“응! 응!”
가르침이란 배움과는 또 다르게 즐기는 맛이 있다. 신기한 것을 보여주면 눈을 밝히는 아일리가 귀엽고 따라 하다가 실패하면 볼이 부풀어오르는 아일리가 귀여운… 이게 아닌데,
어쨌든 그렇게 내가 알려주고 아일리가 시도해보는 것으로 해가 저물 때까지 반복하다가 타일런이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내일 또 하자!”
“그럴까요?”
“응? 뭘 말이냐?”
“에반 오빠가 마법 알려줬어!”
“엑? 마법? 그 나이에?”
제리스가 정말이였던거냐..라면서 타일런을 쳐다보는 것을 보아하니 대충 사정을 설명한 듯하다. 그러면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 난 품격이란 것을 가르침 받았다. 내가 배운 것은 아니지만.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말한다.
“안녕하세요. 스텔라이 가문의 에반 스텔라이 입니다. 지금은 사정상 이렇게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타일런은 뭔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제리스는 당황한 듯 하여 내게 인사를 돌려준다.
“어, 그..그래 난 제리스 자일런 이란다. 아일리가 뭐 실수한 것은 없니?”
“아뇨. 굉장히 즐거운 시간 이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그럼! 나야 괜찮지.”
꽤 간단하게 허락을 맡았다.
그 이후로 타일런과 검술 훈련 하는 것 외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일리와 보냈다. 마법을 사용할 때 마다 왼쪽 눈을 누군가 자그시 누르는 것 같아 불편하지만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마력? 그게 뭐야?”
“마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에너지 같은 거에요.”
“다 쓰면 어떻게 돼?”
“보통은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하지만 가끔 버티고 무리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에는 얼만큼 쓰냐에 따라 다르지만 기억을 잃는 다던가 다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 그거 알려줘!”
“네네. 어떤 거요?”
“막 복잡한 그림 그리는 거! 책에서 봤어!”
“마법 진을 말하는 거군요. 그건 저도 힘들 것 같네요..”
“힝..”
실망한 표정이 너무 귀엽다. 저 말랑할 것 같은 볼을 주물러 보고 싶다만 현아의 얼굴을 떠오르며 참아내었다.
“아! 마법 진이랑 비슷한 결계 계는 조금 알고 있는데 가르쳐 줄까요?”
결계 계는 대부분이 보호하는 마법이다. 마법은 물론 물리적 공격도 막아주는 탓에 호위 마법사들 대부분이 사용할 줄 알았다. 거기에 공격을 받으면 받은 위치에 마법 진과 비슷한 문양이 떠오르기 때문에 아일리도 만족할 것이다.
“응! 알려줘!”
“좋아요.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죠.”
그렇게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전과는 달리 요즘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특히 아일리가 마법 사용에 실패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
라고 실망하는 것을 보면 시간이 정말 금방 지나간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일을 나가는 타일런과 같이 나가 걷다 보면 반대편에서 아일리가 이쪽을 향해 웃음을 뛰며 뛰어온다.
아일리에게 간단하게 아침인사를 한 후 타일런에게 작별인사를 해 왔던 길로 되돌아 가면서 아침 메뉴나 오늘은 뭘 해볼까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언덕에 도착해 있다.
그렇게 오늘도 새로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거나 어제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들을 다시 시도하다 보면 하루가 저물어 있다. 그러면 아일리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식사가 마련되어 있다. 타일런의 하루 일과(대부분 불평 불만)을 들어준 후 잠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에 든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