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스무번째 생일이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물론 갑갑한 미성년자 신분도 오늘로 끝. 더는 할머니의 술 심부름을 하며 눈치 볼 필요도, 새벽 같이 헐고 헐은 교복 나부랭이를 입고 집을 나설 필요도 없다. 민증만 내밀면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의미를 축하하고자 나는 오늘 친구들과 만나 쇼핑을 하기로 했었다. 화장품과 어른스러운 옷을 잔뜩 산 뒤 클럽에 간다, 그게 오늘의 계획이었다. 성인이 된 기념으로 맘껏 놀다오겠다고 할머니에게 허락도 받아놓았다. 아니, 놓았었다.
11시 50분쯤 친구들과 내일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열심히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열두시가 땡하고 되자마자 수두룩한 생일 축하 카톡을 받았다. 그래서 답장을 보내려고 했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난 왜 모래밭 위에 앉아있는 것이며, 왜 눈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걸까. 왜일까.
"뭐지."
난 눈 깜짝 할 새 바뀐 주변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밤 열 두시가 지났으니 하늘에 달이 떠 있어야 정상인데 왜 눈부신 해가 보이는 거지. 폭신한 침대 위에 앉아 있었건만 왜 엉덩이 밑에 까슬한 모래가 이렇게나 많을까. 언제부터 내 방 벽지에 새파란 바다가 그려져 있었나.
난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가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펑!
꽤 커다랗고 무거웠던 돌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진짜다. 진짜 바다다.
내 의심을 뿌리채 뽑으려는 듯 바다에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났다. 푸른빛의 청량한 물결이 뭍 쪽으로 밀려왔다. 곧 차가운 느낌이 발가락 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축축해진 발가락을 매만졌다. 물기가 손에 묻어났다. 차갑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엉덩이에 잔뜩 묻어있던 모래가 후두둑 떨어졌다. 떨어지는 모래알 하나하나에서 실체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또다시 내 발 쪽으로 밀려온 파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식겁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파도가 다시 한 번 밀려왔지만 간신히 내 발 근처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이건 꿈이야. 꿈이 확실해."
종종 실체감 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이것도 그런 종류의 꿈일 것이다. 그래야 한다.
문득 쥐고 있는 핸드폰의 감촉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켜자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통화권 이탈. 젠장!
나는 모래 위를 서성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할머니가 종종 못된 버릇이라며 혼내셨지만 이 상황에서 그딴 걸 신경쓸 틈이 있을 리가 없다. 곧 손끝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따끔한 느낌이 났지만 여전히 꿈은 깨지 않는다. 불길한 징조다.
끼룩.
멀거니 서 있는 날 비웃듯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날던 새가 울었다. 아니, 웃은 건가. 저 거지같은 새 새끼 같으니.
......나는 새의 울음소리에 의미부여를 할 정도로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 때였다.
띠롱띠롱띠롱띠롱.
"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모닝콜 마냥 계속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소리다. 그게 내 주변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봤으나 까만 화면은 변함이 없었다. 핸드폰이 아니면 어디서 소리가 나는거지?
괜시리 텅 빈 잠옷 주머니를 뒤지던 중, 나는 손목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빛을 발견했다. 미신에 집착하는 할머니가 악령을 막는 부적이랍시고 주신 팔찌였다. 그 중앙에 박힌 동그란 구슬이 깜박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알고보니 소리도 그 구슬에서 나는 거였다. 볼품없게 생긴 구슬인데 의외로 최신 기술이 들어갔나보다.
잠깐, 이 구슬이 깜박거린단 건 근처에 악령이 있다는 건가?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요상한 꿈도 모자라 악령이라니. 하다하다 별 개꿈을 다 꾸네.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구슬을 툭 쳤다. 그러자,
[윤아, 들리니? 들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응......?"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뭐야?
[윤아, 너 어딨니? 왜 방에 없어?]
"하, 할머니? 이게 뭐예요?"
[이거 수정구 축소판이란다. 어떠니? 마력이 많이 들긴 해도 꽤 쓸모가 있다니까.]
수정구. 그것은 할머니 방 가장 안쪽, 소파 위에 고이 모셔져 있는 동그란 구슬 같은 걸 뜻했다. 무슨 이유인지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며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는 물건이었다. 그런게 그게 지금 왜 나와? 아니, 잠깐. 그깟 수정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할머니, 저 이상한 꿈을 꾸는 중이예요. 침대에서 잘 자고 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보세요."
[지금 네 방에 와 있는 걸. 도대체 이 밤중에 어딜 간거니? 중요한 얘길 해주려고 했더니.]
"중요한 얘기요?"
[그래. 얼굴 보면서 해야 될 이야기야. 어서 집에 오렴.]
"저 지금 꿈 꾸는 중이라니까요. 부탁인데 침대 좀 다시 보시겠어요?"
[없다니까 얘가 왜 자꾸 고집을 부려.]
대화가 이어질수록 암담한 기분이 깊어졌다. 이게 꿈이라면 단순히 우스운 상황이겠지만,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이 이상한 풍경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발바닥에 깨알같이 달라붙은 모래알부터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낯선 공기까지. 그래서 무서웠다.
"할머니, 저 무서워요. 이거 꿈 맞겠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방금까지 침대 위에서 친구들하고 카톡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곳에 와 있어요. 바다가 있고 해가 떠 있어요. 해가 떠 있을 시간이 아닌데. 꼭 한국이 아닌 거 같아요. 이상해요."
[......]
"......할머니?"
나는 갑작스런 침묵에 당황해 연거푸 할머니를 불렀다. 마침내 내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릴 때 즈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아, 너 내일이 스무살 생일 아니었니?]
"오늘이예요. 열두시 지났잖아요."
[어머... 어쩌면 좋지.]
"뭐가요?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너한테 미리 말해줄 걸 그랬어. 그치만 네가 여기 생활에 적응을 못 할까봐 어쩔 수 없었단다.]
"뭘요? 뭘 말해줘요?"
할머니는 다시 침묵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할머니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망설임이 지나치게 불안했다. 불안함을 넘어서서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빨리 이게 꿈이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윤아, 내가 네 부모는 여행을 갔다고 했지?]
"...네. 먼 여행을 떠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지금 왜 나와요?"
[일단 들어보렴. 그 애들이 여행을 떠난 건 맞다만, 그게 이 세계를 말한 건 아니었거든.]
"알아요. 저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하늘나라로 가신 거 맞죠?"
[...아냐.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말하는 거란다. 그리고 내 생각엔 지금 네가 그 세계에 있는 것 같구나.]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첫째로는 귀를 의심하고, 둘째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구슬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이거 꿈 맞는 거 같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
눈 깜짝 할 새에 내 방에서 바다로 와 있질 않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부모님이 멀쩡히 다른 세계에 살아있다질 않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꿈이다. 거지발싸개같은 꿈 같으니. ...꿈 맞지?
[내가 널 데리고 이쪽 세계로 온 거거든. 음... 지금 설명하긴 복잡하지만 그 당시엔 그쪽 세계가 위험했단다. 네 부모는 그걸 정리하려고 그쪽에 남은 거고, 난 널 데리고 다른 세계로 피한 거지. 이해하겠니?]
아뇨, 하나도 이해 못하겠는데요.
내 퉁명스러운 중얼거림에 할머니는 나지막히 웃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얘길 지금 믿으라고? 이게 말이나 돼? 어디서부터 지적해야할 지 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할머니의 어조가 전에 없이 차분하고 진지해서 차마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네 부모가 널 보내기 전에 마법을 걸어뒀단다. 스무살이 되는 해에 널 원래 세계로 갈 수 있게끔 하는 마법이었어. 아무래도 그 마법이 지금 발동한 것 같구나.]
"......"
[할미도 마음 같아선 너와 같이 가고 싶다만, 내 마력이 거의 다 해서 말이다. 지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없어. 너만 보내서 미안하구나.]
"......"
[네가 도착한 걸 네 부모도 알 거야. 금방 널 찾아갈테니 너무 걱정마렴. 알겠지?]
"......할머니."
[응? 왜 그러니, 우리 아가.]
"...이제 못 본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호호, 그건 아니야. 할미가 보고 싶다면 네 부모를 만나서 다시 보내달라고 하면 돼. 그럼 언제든 올 수 있단다.]
"......그럴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네 부모는 아주 강력한 마녀들이란다. 걱정 말고. 응?]
나는 어느 새 찔끔 배어나온 눈물을 세게 문질러 닦았다. 젠장, 젠장.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최악을 넘어서서 끔찍할 정도다. 할머니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이 곳이 한국이 아니란 것 하나는 확실하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부정할 수 없을만큼 낯설다. 이딴 곳에 느닷없이 사람을 떨궈놓다니. 미친 사람들 같으니. 내 의사는 어쩌고 지들 맘대로!
"좋아요. 다시 그 쪽으로 갈게요. 할머니 보러 다시 갈 거예요."
[후후. 그래야 자랑스러운 내 아가지. 아참, 네 대학 입학은 어떻게 할까?]
"그냥 두세요! 그 전까지 꼭 돌아갈 거예요."
[기다리고 있으마. 안타깝지만 연락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힘내렴, 아가.]
"할머니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고요."
[그래, 알겠어. 밥 잘 챙겨먹고 몸 조심-]
할머니의 말이 끊김과 동시에 깜박거리던 구슬의 불빛이 훅 꺼졌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부모라는 작자들을 만나 한 방 먹여주고 울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젠장, 만나면 정말 가만 안 두겠어. 두고보자.
한참을 씩씩대고 나자 새로운 고민이 떠올랐다. 과연 그들은 언제쯤 올 것이며 난 그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할머니 말대로라면 그들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그 동안 죽치고 앉아 바다만 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별 기대 없이 텅 빈 바지 주머니를 몇 번 뒤적거리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국에서도 한 적 없는 아르바이트를 다른 세계에서 하게 생겼다.
주위엔 온통 바다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한다. 난 일단 무작정 걷기로 했다. 걷다보면 뭐가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