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 솔렝의 하루는 심플했다.
레이라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일어나자마자 전달되지 않을 황제에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편지를 작성한다. 어차피 얼마 되지 않아 전용 소각장에서 활활 타오를 종이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지 않던가. 언젠가 그의 열정에 하늘이 감동하여 공주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해주리라 믿으며 클라우드는 오늘도 눈물의 장문을 썼다.
장문을 쓴 후에는 하루 종일 공주의 옆에 붙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야했다. 어째서인지 황제와 황태자, 제국민들은 모두 그녀가 조신하기 이를 때가 없으며 온화하고 성품이 좋은 여성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와 달랐다. 클라우드와 함께 있는 그녀는 말광량이 였고, 심심한 황성 안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녔다. 다른 이들이 볼 때에는 조신하게 걷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곱게 단장한 드레스를 들어 올려 맨다리를 드러내놓고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뛰어다녔다. 게다가 연무장에 아무도 없으면 몰래 들어가서 클라우드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며 목검을 들고 달려들기까지 했다.
“조신한 공주님을 모시고 다녀서 좋겠다~”
동기 중 하나가 저런 발언을 했을 때, 클라우드는 그를 향해 잔뜩 사기를 머금었다. 조신해? 조신해? 누가? 공주가?
“그렇지. 조신하시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답했음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레이라를 찬양하던 그 모습이란! 클라우드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공주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복에 겨웠다는 이야기만 들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클라우드는 그렇게 레이라와 하루를 같이 하거나 어쩌다 쉬는 날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접해야했다.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물론 완전히 잠에 들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기척이라도 나면 눈을 뜨고 일어나 레이라에게 이상이 없는지 늘 확인해야만 했다.
“내일은 다과회를 열거야.”
“뭐라고요?”
클라우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묵묵하게 넘어가는 그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레이라의 다과회였다.
“다... 다른 영애들도 부르는 다과회라면 사전에 연락을 먼저 하시는 게...”
그는 절대로 다과회를 열고 싶지 않아 다급하게 말했다.
“갑작스레 부르면 영애들도 황궁에 참석하기 쉽지 않지 않습니까. 게다가 영애들의 황궁 입출궁을 위한 이야기도 경비병들에게 따로 해놓지 않으면 안 되는 데다가...”
“어머, 연락이라면 벌써 했는 걸?”
“언제요?”
클라우드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분철주야 계속 레이라와 붙어있었거늘 언제 레이라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던가? 클라우드 몰래?
레이라는 키득거리며 가만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헤나가 갖고 나가는 찻잔에 내가 영애들을 초대하라고 2주 전에 쪽지를 남겼었는데~ 어머, 호위가 그것 하나 발견 못 한 거야?”
2주 전의 쪽지?
클라우드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쪽지는 그냥 낙서한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게다가 호위기사가 공주의 쪽지까지 감시하는 거냐면서 역정을 내셨었습니다만...”
레이라는 사악하게 웃었다. 저 짜증이 솟구치는 클라우드의 표정이 정말이지 보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계획에 성공해 기뿐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마 클라우드가 지금 레이라의 표정을 보면 더욱 열을 낼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더욱 화려하고 화사하면서도 사악하게 웃어주었다. 그렇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지금 여기서 욕하면 불경죄로 잘리나요?”
“어머, 그럴 리가. 마음껏 욕해도 좋아.”
“진짜요?”
클라우드의 반문에 레이라는 더욱 밝게 웃었다.
“그럼 난 지금 이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 거야.”
이 악덕 공주!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곳은 황성 안이었다. 레이라가 그런 행동을 취한다면 지금 이들이 나눈 대화는 온데간데없고 클라우드는 공주를 울린 파렴치한이 될 것이었다.
“...다과회는 내일 몇 시죠?”
“점심을 먹고 바로 시작해서 저녁 먹기 전까지 할 거야.”
“영애들은 언제 돌아가나요?”
“저녁을 먹고 돌아가겠지?”
저녁을 먹고 돌아갈 거라는 말에 클라우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건 레이라가 클라우드를 위해... 그래, 어디까지나 클라우드를 위해! 만들어낸 자리였다. 클라우드에게 좋은 일은 그야말로 1도 없는 그런 자리. 레이라에게 있어 내일 다과회의 주인공은 클라우드일 것이다.
“공주님.”
클라우드가 진지하게 레이라를 불렀다.
“뭔가요? 솔렝경.”
“내일 휴가 쓰겠습니다.”
“어머,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그냥 같이 즐기죠.”
진지함이 넘쳐나는 요청을 레이라가 단칼에 잘라내었다. 클라우드도 진지했지만 그냥 한 번 던져본 희망사항이었기에 더 이상의 휴가요구는 하지 않았다.
“내일 저는 엄청 아플 예정이니 병가를 쓰겠습니다.”
단지 말을 바꾸어서 다시 한 번 희망사항을 전했을 뿐.
“내일 솔렝경은 어마어마하게 건강할 예정이군요. 다과회를 잘 즐겼으면 좋겠어요.”
물론 단 번에 기각 당했다.
칫-
짧고도 굵게 혀를 차는 클라우드를 본 레이라는 뿌듯한 듯 미소를 짓고는 속으로 승리의 브이를 날렸다. 그리고는 우아하고도 고고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음을 옮겼다.
클라우드는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레이라가 원하는 데로 끌려 갈 수는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가 누구던가. 전쟁영웅, 클라우드 솔렝이 아니던가. 1천만의 대군 앞에서도 위풍당당하게 맞서 싸운 이가 바로 그였다. 아무리 불리한 싸움이라 하더라도 이겨내는 것이 그였다.
이것은 전쟁이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야!
클라우드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선에 뚝 떨어졌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무조건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내일 다과회만큼은 참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 생각을 정리한 클라우드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듯 나아가는 레이라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
“치사하게 아바마마께 그렇게 선수를 쳤을 줄이야.”
레이라가 조금만이라도 눈치를 채는 것이 늦었다면 클라우드는 레이라의 다과회에 참석하지 않을 뻔 했다. 정확하게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좀 썼는데, 그래?”
간만의 두뇌가동에 레이라는 피곤함을 느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이렇게 공작을 해가면서 재미있게 해주는 것은 클라우드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클라우드를 놔주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클라우드는 그녀를 재미있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레이라의 모습에 헤나 역시 조용히 미소 지었다. 헤나는 클라우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레이라를 즐겁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레이라를 이렇게까지 기분 좋게 해주지는 못했었다.
“어째서 다과회에 솔렝경을 초대하시려는 건지요?”
“헤나는 매일 다과를 나르느라 바빠서 다과회에 함께하지 못했지?”
레이라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헤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다과회에는 바쁘게 움직이지 말고 나랑 같이 있어봐. 그럼 알게 될 거야.”
헤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레이라의 눈동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클라우드를 반드시 참석시키고야 말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더구나 그와 반대로 필사적으로 다과회를 피하고자 하는 클라우드의 모습에서도 그 궁금증은 2배가 되었다.
그 때, 타이밍 좋게 클라우드가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솔렝경!”
레이라의 목소리에 클라우드가 움찔거렸다. 그렇게 평화롭지 않은 일상에서 짜내고 짜내어 얻은 평화로운 시간에 들린 레이라의 목소리는 달갑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공주님?”
“너, 아바마마한테 무슨 얘길 한 거야?”
이미 클라우드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고 있음에도 레이라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클라우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말을 놓지.
게다가 황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냐 묻는 모양새가 그가 꾸민 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레이라는 지금 클라우드가 다과회에 가지 않기 위하여 손을 쓴 것에 대해 레이라가 지금 보복을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클라우드의 평화롭지 않은 일상을 더 복잡하고 파괴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되었다.
“전 폐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바마마가 오늘 사냥에 나가시는 거 알고 있었지? 알고 부탁드린거 아니야?”
“저는 폐하께 단언컨대 아무런 부탁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클라우드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결코 황제에게 그 무엇도 부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냥을 나간다는 황제에게 단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폐하와 사냥을 즐겼던 때를 기억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물었을 뿐 가고 싶다고 부탁하지 않았다. 레이라의 호위기사가 되기 전, 클라우드는 황제와 황태자의 호위를 겸해 함께 사냥을 나갔었다. 성 밖의 우글거리는 마물도 잡고 들짐승도 잡으면서 말을 타고 누비던 그 자유로운 시절은 지금의 그로써는 꿈에도 꿀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추억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황제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계획적으로 그렇게 물은 거잖아?”
“오, 역시 공주님! 잘 알고 계시는 군요.”
표정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감탄사를 뱉어내는 클라우드의 모습에 레이라는 이미 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얄미워 울컥했다. 저 당당한 표정이란!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 저 표정이 일그러질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얄미웠다.
“그렇게 질문하면 아바마마께서 너에게 ‘오랜만에 같이 사냥을 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셨겠지.”
“미천한 제가 어떻게 황제폐하의 권유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드는 이번엔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따가 다과회때 보자! 라며 속으로 칼을 갈며 그녀는 클라우드를 주시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새삼스럽게.”
“예의를 지키세요. 솔렝경.”
옆에서 헤나가 생글거리는 클라우드를 노려보았다.
“전 항상 예의가 바르답니다.”
온 세상의 예의가 씨가 마르는 소리에 헤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주님께 저런 태도라니! 당장 다른 사람으로 호위기사를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 컸지만 그를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레이라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꿍한 마음을 갖고만 있었다.
게다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고회가 시작될 것이고 레이라가 기대하는 클라우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헤나도 조금은 기분이 풀어질 것 같았다.
“그럼 사냥 잘 다녀오도록 해요. 솔렝경.”
저 멀찍이 시종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본 레이라가 작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분부 받잡겠습니다.”
클라우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공주의 앞에서 물러났다.
레이라는 그런 클라우드를 속으로 비웃었다. 이미 손을 써놓은 것도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는 모양새라니! 그녀는 조금만 기다리면 클라우드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을 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