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한 클라우드의 말에 레이라는 발을 구르며 ‘뭬이야?!’를 시전했다. 책에서나 보던 악덕영애들의 발언에 헤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레이라는 그런 헤나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에 클라우드에게 다가가 멱살을 부여잡았다. 여태껏 다투기는 했어도 저렇게 직접적으로 멱살을 잡은 적은 없었기에 헤나는 물론 클라우드까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어떻게 내 믿음을 이렇게 산산조각 낼 수가 있어!!!”
“절 믿으셨나요?”
클라우드의 의외인 듯한 말에 레이라가 멱살을 잡고 흔들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획 몸을 틀어 자신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미... 믿은 적 없어.”
“방금 믿음을 산산조각내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 그런 적 없어!”
레이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보처럼 클라우드를 믿고 있던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저런 녀석의 뭐를 보고 믿었던 걸까? 헤나에게는 클라우드가 아니라 그를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한 자신의 판단을 믿는다고 큰 소리를 떵떵 쳤는데! 정말이지 자신의 꼴이 우습게 되었다고 레이라는 생각했다. 게다가 황제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돌아와놓고 저렇게 당당한 얼굴을 보자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실패를 했으면 미안한 기색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웃으면서 들어올 수가 있는 건지! 그러면서 상처 받는 다고? 정말이지 말 하나는 잘 하는 녀석이었다.
“공주전하의 믿음을 산산조각 낸 소인은 호위기사로써의 자질이 떨어진다고 사료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왠지 모르지만 꼭 너가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이거 하나 실패했다고 그만 둘 생각일랑 말아.”
레이라의 말에 클라우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번 축제에는 꼭 가고 싶었는데!”
자그마치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축제가 막 100회를 맞이한 참이었다. 이번 축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여 기대를 하던 참이었는데, 가지 못하게 되다니! 축제에 입고가면 좋을 서민의 옷까지 미리 골라놓은 레이라는 실망감이 배를 더했다.
“그렇게 축제에 가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이번에는 특별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단 말이야! 100년에 한 번만 핀다고 하는 체비트 꽃을 나누어 준다고도 했고!”
“그 꽃을 왜 나누어 주는지는 아세요?”
“그건 모르지만...”
클라우드는 볼을 긁적였다. 이 말괄량이 공주님은 체비트 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번 축제의 특별한 행사가 어떤 것인지도-
한숨을 가득 가슴에 채워넣은 클라우드가 이번에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저렇게 기대를 하고 있는데 계속 곯리는 것은 어째서인지 조금 미안했다.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주님께서는 축제에 참가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호위를 잔뜩 거느리고 축제 참가자들에게 불편을 끼치면서 말이지?”
“아뇨. 호위는 한 명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마어마한 규모로 가지는 않을 거예요.”
클라우드의 말에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몇 명의 호위가 따르는 데? 조금 전에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어?”
“호위가 한 명만 가는 것에 대해서는 실패했다고 한 거예요. 그 후에 갑자기 멱살을 잡으셔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요.”
조금 투덜거리는 듯 목을 만지며 말하는 클라우드에게 레이라는 살며시 미안함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괜시리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클라우드의 시선을 피했다. 공주라는 체면은 저기 어딘가로 던져버린 채 멱살을 잡아 흔들다니... 불찰이었다.
“그... 그래서 호위가 몇 명이냐니까?”
“셋이에요.”
“셋?”
레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위가 셋이라니? 그 중 하나는 당연히 클라우드일 것이고, 하나는 헤나일 것이다. 헤나는 일반 시녀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기사보다도 민첩한 몸놀림을 갖고 있는 실력자였다. 겉으로 드러나있는 호위는 클라우드 하나였지만 헤나 역시 만만치않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너랑 헤나, 그리고 한 명은 누구야?”
“레빈 황태자님이십니다.”
“누구라고?”
“공주님의 오라버니이신 레빈 황태자님이십니다.”
순간적으로 뒷목을 잡을 뻔한 레이라는 성큼성큼 클라우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시금 터프하게 멱살을 잡았다. 다시금 당황한 클라우드는 항복의 표시로 양 손을 들었으나 그렇다고 놓아줄 레이라가 아니었다.
“클라우드, 어째서 오라버니가 같이 가는 거야? 나한테 불만이 아주 많나봐? 그리고 오라버니가 어떻게 내 호위야? 오라버니를 호위하는 사람이 그럼 또 붙는 거 아냐?”
“공주님께 불만은 아주 많지만 그렇다고 제가 황태자님을 불렀겠습니까?”
“그럼 오라버니가 왜 따라온다는 거야?”
헤나는 레이라의 말에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클라우드가 레이라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고 얘기했건만 그것보다도 레이라는 레빈이 따라오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는 듯 했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불만이 많다는 것보다 그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니. 하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클라우드에게서 같은 유형의 말을 이미 많이 들어서 레이라는 면역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화... 황태자께서는 별도의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호위가 더 늘을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라버니는 나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인데 호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게 말이 돼?”
“레빈 황태자께서는 이미 어릴 적부터 월담을 많이 하셔 본 경험이 있으신 데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시기 때문에 혼자 가셔도 돼요.”
아무리 레빈이 강하다지만 그렇다고 정말 호위 하나 없이 간다는 게 말이 되냐며 클라우드를 두어번 짤짤 흔들은 레이라가 한숨을 내쉬면서 결국엔 놔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마어마한 인원을 데리고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레빈과 함께 가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자유롭게 축제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정말로 다른 호위는 없는 거지?”
“저와 헤나, 황태자께서 공주님을 보필할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클라우드는 멱살이 잡혔던 목을 문지르며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인원으로 황제께 허락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세요? 다시는 살아서 빛을 보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다고요.”
약한 소리를 웃으면서 뱉어내는 모양새가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레이라는 알고 있었다. 클라우드가 사실은 자신을 일개 병사와 같다고 생각하거나 그것보다도 더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낮추다 못해 땅까지 파고 들어가 앉아있는 것을-
그렇기에 황제에게 자신의 소리를 내어 간청을 한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레이라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설득한 거야? 아바마마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라우드를 믿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허락을 내려주지 않을 거라고- 클라우드는 황제의 뜻을 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클라우드를 믿는 만큼 그런 생각들도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비밀?”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이라니? 비밀이라고 들으니 더욱 궁금해졌다. 어떻게 황제가 허락을 했는지.
“죄송하지만 공주님께는 절대로 알려드릴 수 없어요. 이 비밀이 발설될 시에는 제 목이 달아나거든요.”
“아바마마께서는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니야. 내가 호기심을 풀은 걸 가지고 널 죽일 리는 없잖아.”
“아뇨.”
클라우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정말 이야기하면 저는 죽어요.”
“......”
레이라는 진지한 클라우드의 모습에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더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항상 능글맞게 웃으면서 장난치듯 이야기하는 클라우드가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아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럼 그 얘기는 됐어.”
헤나가 가만히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레이라는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드는 그런 레이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조심하게 솔렝 경. 나는 자네를 잃고 싶지 않다네.”
단호하게 말하는 황제의 말이 클라우드의 귀를 울렸다. 정말이지 다정한 황제였다. 일개 병사의 목숨을 저렇게 아껴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공주의 호위를 맡기지 않았다면 더욱 고마웠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는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야? 축제가 시작하는 날? 아니면 아무 날이나 내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거야?”
“공주님께서는 축제의 마지막 날에 참가하실 겁니다.”
“정말로?”
레이라의 눈이 빛났다. 모름지기 축제란 마지막 날이 가장 화려한 법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하며 여러 간이 상점들도 모두 마지막 날 전력을 다한다. 축제를 아쉬워하면서 가장 뜨겁게 불타오른다. 그런 마지막 날의 축제를 볼 수 있다니! 레이라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뻤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함께 가면 편하게 있을 수가 없는데... 이를 어쩐다?”
“그냥 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안 돼. 오라버니에게는 언제까지나 귀엽고 아름다운 여동생으로 있을 거야.”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클라우드는 몸서리를 쳤다. 그는 레이라가 레빈의 앞에서 왜 내숭을 떠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괄량이가 아닌 조신한 공주로써 있을 때야 말로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말괄량이의 말보다 조신하고 영특한 공주의 말 한마디가 더욱 무게감을 갖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타인의 앞에서는 절대로 조심하고 있는 것을- 어째서인지 헤나는 둘째 치더라도 클라우드의 앞에서는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지만-
“레빈 황태자께서는 중간에 다른 볼일로 잠시 자리를 비우실테니, 그 사이에 잠시간 자유시간이 있을 거예요.”
“좋았어!”
레이라는 소파에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잠깐이라도 좋았다. 그 찰나의 시간에라도 편하게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클라우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입에 호선을 그렸다. 기뻐하는 레이라의 모습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