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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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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1
작성일 : 19-10-24     조회 : 553     추천 : 0     분량 :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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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주로 연상되는 게 있다. 휘황찬란한 트리, 거리 곳곳에 들리는 캐롤송, 흰 눈, 그리고 행복한 표정의 커플. 트리와 캐롤송과 흰 눈까지는 생각만 해도 좋은데 커플에선 기분이 잡친다. 왜 굳이 크리스마스에 커플을 떠올려야 하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꼭 크리스마스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나. 일 년 삼백육십오일 사계절 내내 남녀가 만나고 관계가 이루어지고 깨지기도 한다. 왜 크리스마스가 커플과 연관되어야 하냐고? 왜? 왜? 왜?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생트집을 잡는 이유는 내가 그 커플 중 하나가 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 연애를 한 번 해봤다. 작년. 태어나서 처음 연애를 했는데, 언제나 처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며 흥분하고 초조해서 열에 들떴다. 온갖 상상을 하며 이런저런 혼자만의 기대를 했었고, 혹여 상대방을 실망시킬까 긴장하며 어쩔 줄 몰랐다. 처음이라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만 처음이라서 당황하고 실수를 반복했다. 연애를 연습해보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모자라는 내 자신에 실망하고,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는 관계에 실망하고, 원하는 만큼 대해주지 않는 상대방에 실망했다. 좌절해서 우울해하고 세상의 끝이 보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까지 살아오며 내 인생 가장 흥분되고 가장 끔찍했던 시기였다. 최후의 결정타는 내 첫사랑을 자연스레 상호동의하에 끝을 맺은 게 아니라는 거다.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경고는 없었고,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도록 만회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첫사랑 상대는 내키지 않는 설명과 이유로 이별을 고하더니 그대로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커플도 많이 봤는데 그는 미리 완벽한 계획을 짜놓은 듯이 이별한 다음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동네 근처 사는데도 우연히 만나는 상황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에 헤어졌다. 다들 행복한 기분에 들떠 연인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나는 선물 살 돈이 남아 그걸로 무얼 할까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고민을 했었다. 내 자신을 위해 쓸 돈이 생겼는데도 그게 행복하지 않았다.

  작년 겨울,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집근처 카페에서 서빙하는 알바 자리를 구했다. 요즘 알바 구하기 많이 힘들다고 그러고 집에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에 자리를 구해서 감사했지만, 살면서 처음 해보는 알바가 쉽지만은 않았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자잘한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카페 사장님이랑 선배 언니들은 무서운 눈을 하고 나무랐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으니까 그게 더 사람을 위축시켰다.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하는 의욕이 솟는 게 아니라 또 실수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만 앞섰다. 서빙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나도 그렇게 지원을 한 거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하루 종일 쟁반에 음식을 담아 나르다 보면 팔목과 어깨에 무리가 가서 집에 돌아오면 근육통 때문에 끙끙, 앓았다. 침대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딸을 보다 못한 엄마가 파스를 사다 붙여주고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찜질을 해줬다. 결국엔 그깟 몇 푼 벌자고 이 고생을 한다며 당장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일을 그만두기 쉽지 않다. 그렇게 앓아가며 방학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다행히 일 못하다고 쫓겨나진 않았으니 그걸로 내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어쨌든 힘든 첫 알바 마칠 때까지 살아남았으니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첫사랑과 헤어지고 나서 세상이 어둡게 탁, 닫혀버린 기분이 들었고, 삶에서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다행히 크리스마스 날 카페가 문을 닫아 집에서 쉬었기 망정이지 아님 연락도 없이 일하러 나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사장님이랑 언니들이 또 얼마나 무섭게 닦달을 했을지 생각하기도 싫다. 엄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서 분주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같이 하자고 온 식구를 닦달했지만 누구 하나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는 나이 들어 애들처럼 주책이라며 타박을 했다. 엄마는 그래도 크리스마스 기분 내는 게 어때서, 라며 꿋꿋이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아도 장식을 해나갔다. 웅장한 나무는 아니지만,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플라스틱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실 구석에 들여놓고 별장식과 구슬을 위에 올렸다. 집안 여기저기엔 나풀거리는 금박지와 은박지가 달렸다.

  “그래도 이렇게 장식해 놓으니까 크리스마스 기분이 나긴 나네.”

  “이것아. 엄마가 하자고 할 땐 들은 척도 않더니 이렇게 보니까 좋지? 이렇게라도 기분 내는 거야.”

  엄마 말이 맞기 한데 그때는 내 상황이 그랬다. 세상 살 맛이 안 나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이 안중에 들어올 리가 있나. 그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렸다. 아주 제대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사람 복장 터지게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집안에만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서 춥지 않도록 내복, 목도리, 털장갑까지 준비해서 중무장을 단단히 하고 밖으로 나섰다. 흰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 게 나쁘진 않았다. 가끔씩 지나치는 웃음이 만발한 커플을 볼 땐 눈이 시렸지만. 정은이는 할머니 댁에 내려가서 새해를 맞이하고 올라올 거라 크리스마스엔 여기 없었다. 꼭 필요할 때 없으니 더 아쉬웠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전화 통화를 했다.

  “거기 눈 와?”

  “응. 아직 많이 쌓이진 않았는데 함박눈이야. 이렇게 밤까지 오면 내일 아침엔 꽤 많이 쌓이겠어.”

  “그렇구나. 여긴 눈은 고사하고 햇살이 환해. 대신 주변에 건물이 별로 없어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고 훨씬 춥게 느껴져. 집 앞에만 나가도 볼이 벌겋게 언다니까.”

  “그래도 부럽다, 야.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예쁜 경치 구경도 하고 얼마나 좋아.”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 엄청 심심해. 놀 것도 없고.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만 진창 먹으면서 살만 찌게 생겼어.”

  고등학교 동창 정은이는 3년 내내 붙어 다녔다. 사는 곳이 가까워 서로의 집으로 놀러가서 자고 올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끼리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자식 때문에 친구 생긴다고 정은이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이 그런 경우다. 오늘 같은 날 정은이 집에 놀러 가서 실컷 수다 떨고 정은이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 먹으며 뒹굴거리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타이밍이 참 그렇다. 하필 지금 할머니 댁에 간 건지 야속할 정도다. 할머니 댁은 보통 구정에 들르지 않나?

  예상은 했었는데 거리 곳곳이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선전물과 장식으로 넘쳐난다. 크리스마스 캐롤송은 물론이고. 크리스마스와 관련 없는 걸 찾아보려니 그게 더 찾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다 천편일률적이라 어찌 그리 유행만을 좇는지. 나름 고유의 특색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개성이 있어야지.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가 아닌 다른 뭔가 색다른 게 없을까? 연말이니까 일 년을 차분히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지. 아, 내년을 위한 다이어리를 사볼까? 퍼뜩, 그 생각이 떠올라 교보문고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늘 같은 날 무척 붐빌 거라 예상하지만 그럼 또 어때? 시간이 남아도니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찌나 사람이 붐비는지 발걸음 하나 제대로 내딛기 힘들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고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원래 목적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장소에 도달했다. 다이어리를 찾으려면 문구점 코너로 가야 하는데 사람에 밀려서 철학 서적 코너와 자기 계발 코너 앞에 다다랐다. 그 앞에 온 김에 괜히 눈에 띄는 대로 책을 들고 넘겼는데 흥미가 별로 일지 않고 머릿속으로 글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문학으로 배우는 삶의 지혜’라고? 어떤 지혜가 들어있나 책 내용을 훑었는데 이건 뭐 한국말이 아니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이건 어느 나라 언어인 거지? ‘여자 삼십대 한 밑천 잡아라’라고 한다. 한 밑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자괴감만 든다. 이건 도무지 절대 한 밑천 잡지 못하겠다는 깨달음만 키운다. 책을 내려놓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문구 코너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천장 위 매달린 안내판을 하나씩 훑어나갔다. 어째 찾으려면 더 안 보인다.

  아, 그렇구나. 겨우 문구류 파는 곳을 찾아냈다.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문구 코너가 매장 안에 있지 않고 매장 바깥 따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장 안에 섞여있을 거라 생각하고 헤매니 그걸 찾을 수가 있나. 발견은 했는데 이렇게 밀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아가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다이어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세상에 지지 말자. 우습게도 연애에 실패하고 우울한 기분에 그런 식으로 싸움을 걸고 싶어졌다. 덤벼라, 세상아, 지지 않겠다. 그런 다짐이 든다. 결국 이 싸움에서 이겨도 전리품은 달랑 내년도 다이어리인데 그걸 꼭 차지하겠다는 열망이 올라온다.

  그나마 문구류 파는 곳으로 오니 사람이 준다. 북적거려 밀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줄이 빨리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서 읽는 시간을 가지는 책과 달리 문구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계산을 치르고 나서니 속도가 빨랐다. 얼른 다이어리 하나 골라서 나가자 싶었는데 이게 다이어리 찾는데 시간이 걸린다. 볼펜, 형광펜, 색연필에 크레용까지 막대 종류는 엄청 많이 보이는데 다이어리 같은 수첩 종류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니 공책과 바인더가 쌓여있다. 이 근처가 맞을 텐데. 아, 저기다. 무슨 다이어리 종류는 이렇게 많은 건지. 다이어리를 전시해놓은 곳에 와서 둘러보는데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를 옵션이 많아지니 더욱 고르기 힘들어진다. 다섯 개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름 장단점을 파악해서 결론을 내릴 텐데, 열 개를 넘어가니 일일이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 확인하다보면 헷갈린다. 이건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걸 손에 잡는 게 최선이다.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제 나갈 때가 된 거지.

  계산을 치르고 나와 복도 한쪽 구석에 놓인 벤치 위에 자리를 잡았다. 손에 든 다이어리를 들어 찬찬히 넘겨보는데 뜨악, 그만 기가 찬다. 눈에 띄는 걸로 고른다고 집은 다이어리가 여유를 갖고 훑어보니 너무 알록달록하다. 유아용도 아니고. 아니 유아용이 맞는지 다이어리 안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동봉됐다. 아, 이걸 일 년 동안 들고 다니면서 사용하라고?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자꾸 다이어리를 들여다본다. 볼수록 아니다 싶다. 가능하면 환불하고 싶은데 그 붐비는 곳에 되돌아가서 환불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그것 또한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선물하자고 마음을 잡았다. 내가 꼭 가질 필요는 없잖아. 다이어리를 들고 걷는 동안 새삼 신세 한탄을 한다. 내가 이렇지 뭐. 보는 눈이 없다. 아니 겉만 번드르르한 것에 잘 속아서 진짜 가치를 보지 못한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끼자 눈에 핑, 눈물이 돈다. 아, 이건 아닌데. 눈 오는 크리스마스에 애들용 같은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울면서 걷는 청승맞음이라니. 아니야, 아니라고. 이런 크리스마스라니. 황금 같은 이십대에 맞는 크리스마스가 왜 이래야 하는 거냐고. 아니라고. 이건, 아, 닌, 거, 라, 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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