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열린 성폭력 예방교육에 참석했었다. 학교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를 다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폭력 사이클이었다. 잘못된 관계망에 걸려든 피해자가 그만 그 악순환에 익숙해져서 나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해자를 찾아 돌아온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폭력이 그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끔찍한 대우를 받은 후에도 그 가해자와의 관계에 미련이 남아 되돌아온다고 한다. 혹시 나도 그럴까 두려워졌다. 작년 겨울 안 좋은 일을 겪고 나서도 그저 누군가와 관계가 그리워 그런 비참한 과정을 반복한다면? 그걸 또 겪는다니 몸서리가 처진다. 그렇지만 너무 외로우면 그 나쁜 기억도 잊으려나?
올해 겨울방학엔 편의점에서 알바를 구했다. 정말 감사하게 작년 일했던 카페처럼 동네 근처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주변에 알바 구하기 위해 버스 타고 한 시간을 다니는 동기생을 봐서 참 복 받았다고 좋아했다. 게다가 편의점 사장님이랑 다른 알바생들이 카페 알바 때보다 훨씬 친절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까 의욕이 더 생겨서 더욱 열심히 했다. 심지어 바쁠 때는 추가근무까지 받아들였다. 직업을 가지면 일이 힘든 게 문제가 아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 같은 일을 해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일의 강도는 훨씬 견딜만해진다. 이참에 아예 학교 때려치우고 편의점에서 청춘을 불살라볼까? 일에 귀천이 어디 있나? 얼마 전에 읽은 책은 일본에서 편의점 알바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괜찮을 듯하다.
창가 근처 컵라면 자리가 헐거워져서 물품 창고를 다녀왔다. 들고 온 품목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와중에 청소부 할아버지가 바깥에 나타나신다. 실제 청소부는 아니시다. 사장님부터 해서 일하는 직원 모두가 그렇게 부른다. 내가 여기서 일하기 훨씬 전부터 정기적으로 편의점 앞을 지나다신다고 들었는데 주변 쓰레기통과 바닥에 널린 쓰레기 봉지를 뒤지신다. 그렇다고 함부로 주변을 어지럽히진 않고 지나가신 자리는 말끔히 정리하셔서 청소부라고 별명이 붙었다. 하시는 일에 비해 복장은 항상 깔끔히 하고 다니신다. 하얗게 센 머리에 길게 기르신 흰 수염까지 그냥 처음 본 사람은 무슨 도인이라고 여길 인상이다. 너저분하게 널린 짐이 말끔히 정리되곤 해서 직원들은 반기는 편이지만, 사장님은 아무래도 편의점 자체 이미지까지 챙겨야 하다 보니 자꾸 그 앞을 서성이며 쓰레기를 뒤지시는 할아버지를 그다지 달가워하진 않는다.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은 직원들 먹으라고 허락해주시는데 마침 세 개가 기한이 지났다. 할아버지 두 개를 드려도 내 앞에 한 개가 떨어진다. 편의점 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허, 오늘은 아침에 일하네.”
“네. 식사하셨어요?”
“시원한 냉수 한 잔에 곶감으로 해결했지.”
“냉수요? 겨울에 춥지 않으세요?”
“그래도 시원한 물 한 잔은 아침에 일어나면 꼭 마셔야 해. 그래야 혈액순환이 잘 되고 나쁜 것들은 변으로 배출하지.”
“곶감 가지고 되시겠어요? 한국 사람은 밥 먹어야죠. 저, 이거요.”
할아버지 앞으로 삼각김밥 두 개를 내밀었다. 느끼한 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할아버지를 생각해서 고추장 불고기를 골랐다. 참치 마요네즈는 내가 먹고.
“아니, 나 주지 말고 아가씨 먹어. 곶감이 영양분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아요. 사장님이 날짜 지난 거 직원들 먹으라고 허락해주시는데 저 혼자 다 못 먹어요. 이거 안 드시면 버려야 해요.”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곶감도 좋지만 밥 챙겨 드셔야죠.”
별 거 아닌 삼각김밥이지만 이렇게 챙겨드릴 때마다 너무 고마워하신다. 어쩔 땐 극진히 인사 받는 게 황송해서 내 돈 내고 더 사드리고 싶을 정도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 삼각김밥을 받아 넣으시고 마치 연극 속 무대 인사하듯이 두 손을 크게 벌려 허리를 넙죽 숙이신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사는 거 대단하지 않다. 이렇게 작은 일로 한껏 웃고 나면 하루가 행복해진다.
대신 작은 일로 얼굴 찌푸리고 나면 하루가 우울해지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오전 시간은 별 일 없이 흘렀다. 이제 대략 한 시간만 지나면 교대시간이다. 일 끝나고 뭘 할까 생각 중인데 두툼한 털 코트에 여우목도리를 목 주위에 두른 중년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 이 아줌마. 저 여우목도리는 얼굴 부위가 너무 생생해 보여 얼핏 보면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 아줌마와 첫 만남에서 그만 그에 놀라 표정을 달리 했더니 자기 보고 인상 쓰냐고 묻는다. 당연히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그때부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볼 때마다 냉랭한 냉기를 풍긴다. 아님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성격일 수도 있고. 그러니 얼굴 보는 것만으로 거북하고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어서 오세요.”
아무런 답인사 없이 냉장 코너로 향한다. 두부를 들어 날짜를 확인하나 했는데 그만 손에 든 두부가 미끄러지더니 바닥 위로 떨어진다. 분명 봤다. 그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줌마 뒷모습만 보였는데 멈칫, 하던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된다. 손에 묻은 물기를 살짝 털어내듯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이동한다. 이건 뭐지? 바닥에 떨어뜨린 건 주워야 하지 않나? 갑자기 냉장 코너에서 잡화 코너로 향한다. 자기도 속으로 켕기는 게 있으니 정작 사고 싶은 물건은 건드리지 못하고 피했겠지. 천천히 고무장갑이랑 빨래비누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이봐요, 아줌마. 그걸 사려 온 게 아니잖아요?
바닥에 떨어진 두부가 신경 쓰여 복도로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주워드니 겉포장 한 구석이 터졌다. 하얀 두부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이거, 내 시간에 발생했으니 내가 배상해야 할 판이다. 그럼 너무 억울하잖아. 난 두부 건드리지도 않았다고. 아줌마가 문으로 향한다. 손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뒤에서 불렀다.
“저기, 잠시만요.”
“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없이 그저 에, 란다. 혹시 한국말 못하세요?
“저, 이 두부요. 떨어져서 못 팔게 됐는데요.”
“어?”
에휴. 말 좀 하시죠.
“바닥에 떨어져서 한쪽이 터졌어요.”
“그런데?”
말은 하시네요.
“그게 바닥에 떨어트리셨잖아요.”
최대한 정중하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답하는 아줌마의 목소리는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돈 물어주기 싫다는 거겠지.
“누가 뭘 떨어트렸다고?”
“이 두부요.”
“뭔 소리야? 나 주방용품 사러 왔는데.”
주방용품이라니. 바로 냉장 코너로 향해놓고. 그렇다고 고무장갑이나 빨래비누를 고르지도 않았다.
“아니, 저기······.”
“왜 아침부터 멀쩡한 사람 하지도 않은 일 덮어씌우고 난리야.”
“그게 집었다 떨어트리셨잖아요.”
“집긴 누가 집어. 아가씨가 봤냐고, 봤어?”
아줌마 얼굴이 벌게진다. 결국 이렇게 되는 시나리오였나? 아줌마가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하면서 소동을 일으키고 그 후엔······.
“아까 냉장 코너 앞에 서 계셨잖아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편의점 안에 CCTV 있다고 목구멍 위로 뱉으려다 말았다. 겨우 두부 한 모. 그냥 내 돈으로 배상하자고 결론 내렸다. 그게 얼마 한다고 굳이 이 아줌마와 힘들게 대거리를 하고 사장님 불러서 CCTV에 녹화된 내용을 재생시키는 수고까지 하길 원치 않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몸 구석구석에서 모든 힘을 끌어 모아 감정을 억누르며 아니라고 답했다.
“별 재수가 없으려니까.”
문을 후려치듯 닫으며 나서는 아줌마.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한참 진을 뺐다. 이게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참, 나. 두부 값 배상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저 아줌마를 다시 봐야 할까 그게 정말 싫었다. 그것도 손님과 점원으로. 다음엔 내가 손님이 되고 아줌마가 일하는 직원이길 바랐다. 그럼 내가 아주 눈물 쏙 나게 트집을 잡고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자기도 똑같이 한 번 당해보라지. 남의 돈 받기 힘든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벌어야 하나. 이전에 떠올렸던 편의점에서 청춘을 불사른다는 생각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급하게 마음을 정하지 말고 천천히 곱씹어봐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무리 동료와 마음이 척척 맞고 잘 챙겨주는 상사가 있어도 일이 힘든 건 힘든 거다. 편의점 일이 내 적성에 맞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찌나 이렇게 생각이 바뀌는지.
교대하고 나왔는데도 그 아줌마 때문에 잡쳐버린 기분이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건 힘들다. 결코 녹록치 않다. 알바로 하는 일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정돈데 정규 직업을 가지면 몇 배나 더 힘들겠지. 스트레스로 인해 암이 생긴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암 걸리기 전에 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대로 된 논리인진 모르겠지만. 약이 필요했다. 스트레스를 풀 약. 국가가 유일하게 허락한 마약이라고 하지. 음악. 정은이에게 연락해 노래방에 가기로 바로 약속을 정했다. 오늘 당한 걸 생각해서 제대로 불러줄 작정이었다. 아줌마 얼굴을 떠올리며 ‘넌 그렇게 살지 마’를 선곡할 거고, 한쪽이 터진 두부를 위해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를 열창하겠다. 그렇게 가슴에 쌓인 걸 풀어 젖히고 마지막으로 ‘살다 보면’을 열창하고 집으로 가면 기분이 나아져 있지 않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러고 나면 내일 아침엔 행복지수가 한결 높아져 있으면 좋겠다. 행복한 상태로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를. 풀어져라, 풀어져. 스트레스야, 풀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