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다 같은 시계인데 어째서 그럴까? 휴가 나오면 그렇게 박차를 가해서 초침이 흐르다가도 부대 복귀만 하면 그 속도를 잃어버린다. 나라에서 군 인력을 최대한 확보하도록 군대 시계에 조치를 취해서 느리게 가도록 만든 게 분명하다.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니 이건 나만의 망상이라 할 수 없다. 다수결이라는 말처럼 공통 의견은 전체를 대표하는 사실이 된다. 내 동기, 선임, 후임 모두가 동의하는 사항이니 이건 만장일치다. 어릴 때 엑스파일이라는 미국산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겨봤었다. 인기가 많아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그 드라마에선 모든 사건에 뒷배후가 존재했다. 테러집단이든, 정부든, 아님 외계인이든 모종의 배후가 일의 씨앗을 뿌리고 그에 따라 사건이 진행된다. 정부가 통제하는 군대 조직이니만큼 시계를 조작하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게다. 분명하다. 저 시계 초침은 최소 영점 오초는 느리게 흐른다.
시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상관없이 매년 군대 작업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겨울이라 눈이 많이 내렸고 눈 치우는 작업은 올해도 끝이 없다. 해마다 겨울에 항상 겪는 일이라 이것마저도 어째 누군가 조작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나라에서 날씨마저 통제하는 건가? 슬슬 망상 수준으로 번지는 듯해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주근호 병장님. 저희는 언덕 초소 주변 정리하랍니다.”
그나마 말년 병장이라 챙겨줘서 쉬운 곳 정리를 배당받았다. 언덕 초소는 부대 뒤편 솟아오른 구릉 위에 자리하는데, 볼록하게 솟아오른 자리에 초소를 만들었다. 눈이 많이 와도 흘러내려 쌓이는 양이 적고 초소 바로 옆 굵은 소나무가 자리해 눈을 막아주기까지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말년 병장이니 조심히 작업하라는 윗선의 배려겠지. 어라, 윤재잖아?
“너, 오늘 나랑 같이 작업하는 거냐?”
“그러게요. 주병장님이랑 저랑 붙여놓았네요.”
임윤재는 내 두 달 밑 후임이다. 군대는 나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나이는 더 많다. 아무래도 입대를 늦게 한 사람은 안쓰럽다. 군대에서 서열은 나이, 출신, 배경을 떠나 칼 같이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만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 나이는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나는 그렇다. 내 동기들은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고참 노릇 못한다고 했지만 자꾸 속에 켕긴다. 게다가 윤재는 나이만 먹고 제대로 나잇값은 못하는 인간들과 달리 나름 속이 깊고 점잖게 행동한다. 윤재를 시킬 일이 있어도 부러 다른 후임을 시키고 혼을 낼 상황에도 슬쩍 눈 감아 준 적이 몇 번 있었다. 본인도 자기를 챙겨주는 걸 알아차렸는지 나를 잘 따랐고 그러면서 친한 선, 후임 사이가 되었다.
“야, 너랑 나랑 함께 작업하면 네가 고생인데.”
“에이, 아니에요. 눈 치우기야 맨날 하는 일인데 고생은요.”
보통 작업반을 꾸밀 때, 가장 위 고참 한 명을 두고 그 아래로 한창 일할 직급인 신규 병장이나 곧 진급할 상병을 배정한다. 그럼 고참 병장은 물러서서 관리 감독만 하고 그 일할 직급이 아래 후임병들을 데리고 다니며 맡은 일을 일일이 지시한다. 그런데 오늘은 거의 말년 급 병장 둘을 함께 배치해서 윤재가 말년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챙겨야 할 위치에 놓였다.
“이거 봐. 우리 둘 말고 다 일병, 이병 애들이잖아.”
“괜찮다니까요. 주병장님은 어디 안 보이게 짱 박혀 계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부대 신규로 발령받았을 때야 한 달, 두 달이 큰 산 같은 차이로 다가오지, 말년이 가까워지면 두 달 차이는 거의 동기나 다름없다. 평소 말 놓고 농담 따먹기 하는 사이인데, 윤재한테만 일을 떠넘기려니 어째 편치 않았다.
“어, 왜요?”
후임병들에게 눈 치우는 데 사용할 삽을 나눠주는 윤재 곁으로 가자 날 향해 궁금한 눈으로 묻는다.
“곧 제대하면 사회에 나가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체력 관리 좀 하려고. 나도 삽 하나 줘봐.”
“아니, 주병장님. 무조건 몸 보전하는 게 최우선인 말년인데 왜 이러십니까?”
“괜찮다니까. 운동 겸 하려는 거야.”
“어허, 애들 일하는데 방해됩니다. 어른신은 골방에서 조용히 쉬라고 챙겨주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요.”
“뭐라고? 어쭈, 이게 날 완전 노인네 취급하네.”
“제대가 바로 눈앞인데 노인은 아주 상노인이죠. 벽에 똥칠 안 하면 다행이게요.”
“벽에 똥칠? 아주 맞먹어라, 맞먹어.”
윤재의 목을 잡고 조이자 윤재는 내 허리춤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댄다. 둘이서 대거리하는 모습을 후임병들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난 듯 웃으며 관조한다. 결국 짠밥 먹을 대로 먹은 고참 둘이서 뭣하는 짓이냐, 며 선임하사에게 욕을 먹고 나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름이 헷갈리는 새파란 이등병 옆에서 삽질을 하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목소리로 과천이라고 답한다. 과천이면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다. 집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물으려다 언제 왔는지 옆에서 삽질하는 윤재를 발견했다.
“우리 제대하고 밖에서 만나면 반가우려나?”
“그럴까요? 여기서 징그럽게 매일 봤는데 밖에서도 보면 질리지 않을까요?”
“너 나보고 부대 고참이었다며 피하지 마라. 그럼 무지 서운할 거다.”
나를 향해 실실, 거리는 미소를 짓는다. 출신을 따지는 성향은 아닌데 그래도 같은 지역 출신이면 반갑긴 하다. 어디에 뭐가 있네, 함께 나눌 얘깃거리가 생긴다. 윤재는 동네 근처 살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서로 주변 지형을 언급하며 맛집은 어디고 교통은 어떻다며 얘기를 나누니 훨씬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꼭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느껴졌다.
“제대하면 뭘 할지 생각해두셨어요?”
“일단 먹고 싶었던 음식 마음껏 먹어보려고.”
“음식이야 휴가 때마다 드셨을 텐데요.”
“그게 밖에 있을 땐 오히려 잘 안 넘어가다 부대만 돌아오면 아, 그걸 먹었어야 했는데 하고 자꾸 후회가 든단 말야. ”
“제대하면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진대요. 원할 때마다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그 간절함이 사라지는 거죠.”
“그렇기도 할 거야.”
보통 작업을 하면 오전에 중간 휴식을 하고 점심 먹고 오후 휴식을 가진다. 그리고 저녁 먹기 전 일과를 끝낸다. 슬슬 어깨가 뻐근해져서 윤재에게 오전 휴식하자고 조르자 못마땅해 한다. 오전 휴식 너무 일찍 가지면 점심 먹을 때까지 그 틈이 너무 길어진다며 참으란다. 그럼 휴식 한 번 더 하지, 라고 하자 힘 못 쓰는 골방 노인네 취급을 하며 애들 작업 방해하지 말고 빠지란다. 내가 토라진 척 궁시렁 거리기를 그치지 않자 할 수 없이 오전 휴식을 알린다. 휴식이란 말에 후임병들 눈에 금세 빛이 들어온다. 거 봐, 나만 원하는 게 아니었다고. 휴식 시간엔 꼭 빠질 수 없는 피엑스 타임. 나도 그 위치에 있어봐서 아는데,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 일, 이병 때는 밥 먹고 돌아서면 바로 허기가 졌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언제나 배가 고팠다. 게다가 피엑스에서 파는 음식은 외부 음식 특유의 달고 짠 향을 풍겨, 먹으면 꼭 외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군인의 하루 일과 중 가장 달콤하게 기대가 되는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피엑스를 그냥 다녀오지 않는다. 이왕 먹는 음식, 재미나게 먹어야지 하는 게 언제부터 굳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최소 가위바위보 게임이라도 해서 지는 쪽이 이기는 쪽 음식값까지 함께 지불한다. 오늘은 내 편과 윤재 편으로 두 편을 나누고 묵찌빠를 했다. 군대에서 서열은 중요하다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게임할 때다. 고참이라고 게임에서 봐주진 않는다. 윤제 편이 이겼다. 마지막 순서까지 알 수 없는 박빙이었다. 윤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하다며 함박, 웃음을 짓는다. 두고 보라지. 오후 휴식 시간에 져놓고 똑같은 웃음을 짓나 보자고. 그런데 혹시 또 지면 어떡하지? 하, 그럼 우리 편 애들 얼굴은 어떻게 보나? 서열이 통하지 않는 게임인데도 승부가 갈리면 이상하게 그 결과의 책임은 최고참에게 돌아온다. 최고참이 못해서 그 게임에서 진 양. 그게 억울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전통이다 보니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 오늘 오전 피엑스 타임 묵찌빠 진 건 다 내 못난 탓이다. 나를 탓해라, 얘들아. 미안하다. 못난 고참을 둬서.
가장 아래 후임 두 명을 보내 음식을 사오라고 시키고 다들 주위에 둘러앉았다. 이때는 담배를 피게 해주는데 윤재나 나나 흡연자는 아니라서 담배 피는 후임병들로부터 연기가 넘어오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제대하면 애인이랑 여행 많이 가던데요. 주병장님은 애인 없으세요?”
아픈 데를 찌른다. 여태까지 모태솔로다. 나름 멀쩡하게 생겨 여자 많이 따르겠다는 얘기를 듣는데 어째 한 번도 연애를 못해봤다. 중, 고등학교 때는 남고를 나왔고 대입준비 하느라 바빴다. 부모님이 나쁜 물 든다며 동아리 활동은 절대 못하게 하셨다. 그러다 보니 따로 여자 만날 기회가 없었다. 군대 오기 전엔 알 수 없는 오기가 들어서 돈 벌어놓고 입대하겠다며 방학 때마다 알바 하느라 집중했다. 그런데 정작 벌어놓은 돈은 부모님이 가져가셨다. 부모님이 군대 간다고 하자 그동안 모아놓은 돈 어쨌냐고 물으셨다. 은행에 이자 쌓이게 잘 묻어놓고 갈 예정이라고 하자 요즘 은행 이자 얼마 되지도 않는다며 복리 이자를 쳐서 줄 테니 내놓으라고 은근 협박하셨다. 그렇게 돈이 넘어갔고 지금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휴가 때마다 물어도 알려주질 않으신다. 설마 어디 잘못 투자해서 잃으신 건 아니겠지? 암튼 제대하고 알아봐야 할 리스트 꼭대기에 자리한다. 투자금 회수.
“현재 애인 없는데. 제대하고 할 일 목록에 애인 만들기가 있긴 하지. 너는 있어?”
“군대 오기 전에 헤어졌어요.”
“왜?”
왜, 라는 말에 씁쓸하게 입술 위로 미소를 띠운다. 굳이 남의 애정사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애인 있냐고 물어온 건 네가 먼저였다고.
“그게 안 되려니까 그랬겠죠?”
휴,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하기 싫은 얘기 억지로 꺼내게 할 필요 없을 거 같아 다른 주제로 돌려야 하나 기회를 보는데 조곤하게 지난 얘기를 들춰낸다.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고 싶었던 듯하다. 나직하게 문장이 눈 위를 밟아가듯 톡, 톡, 그 위로 떨어진다. 기껏 눈 치워놨더니 눈 자락이 날리기 시작한다. 그래, 쌓이면 치우고 또 쌓이면 치우는 게 우리 일과니까. 눈이 날리는 공간 속에서 윤재 얘기를 들으니 어째 오래된 옛날 영화관 안 영사기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나는 기분이 든다. 어색하게 더빙된 배우들의 목소리가 그 시절 말투를 하고 엥, 엥, 거리는 콧소리를 더해 날아들듯이. 이제 금방 사회로 나가게 될 군대 말년이라 그런지 이렇게 감상적일 때가 종종 있다. 눈 오는 날 후임병의 연애 얘기를 듣는 순간이 서늘하고 을씨년스럽다. 추운 겨울, 하얗게 눈이 내려 그럴 거다. 저 눈 때문이다. 저 눈을 탓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