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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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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5
작성일 : 19-10-24     조회 : 351     추천 : 0     분량 : 4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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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헬로우. 아, 아. 헬로우. 하이. 또 뭐가 있더라? 세계가 좁아지고 있단다. 통신과 교통 기술의 발전 덕에 전 세계가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 늘어났다. 요즘에 영어 못하면 대학에 가기 힘들고 취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하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주로 읽고 쓰기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듣고 말하기에 대한 비중이 점점 높아진다. 영어로 쓰인 문장을 읽는 건 그나마 하겠는데 입에서 바로 영어 문장을 만들어 뱉어내야 하는 건 정말 고역이다. 차라리 어릴 때부터 영어로 말하게 하던가.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실컷 한국어로 의사소통하기 익숙하게 만들어놓고 다시 영어로 대화를 하라고 시키니 그게 머리가 따라주겠냐고. 그래도 영어는 필수라고 하도 주변에서 그래서 겨울방학 때 큰 마음 먹고 정은이 따라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정은이는 전공이 영어교육학과라 영어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나보다 영어 잘하는 건 물론이고. 배우러 가는 건데 괜히 긴장된다. 한국형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인간이니 영어에 관한 모든 지식을 그저 주입시켜주면 좋겠다. 혹여나 나를 지적해 이것저것 시켜 당황하게 만들지 말고. 어쩜 잘 생긴 남학생이 함께 수강할 수 있는데 그럼 얼마나 창피할까. 아니, 뭐, 그걸 기대하고 학원 다닌다는 건 아니고. 흠.

  “일어났지?”

  “모닝콜 해주는 거야?”

  “늦잠 자서 못 나온다고 할까 봐 일찌감치 챙겨준다.”

  “얘는. 누가 들으면 내가 항상 늦잠 자고 약속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으로 알겠다.”

  “그런 말 하면서 양심에 켕기진 않냐?”

  “내가 뭘.”

  “결국 거기에 털 났군.”

  “야, 야, 야.”

  아직 수업시간까지 여유는 있다. 나는 내 한 몸 챙기기도 힘든데 정은이는 어찌나 애가 야무진지 나까지 챙긴다. 분명 나중에 결혼하면 살림 똑 부러지게 잘해나갈 최고의 신부감이다. 그렇게 좋은 애인데 아직 남자친구는 없다. 사람들 보는 눈이 없지 정말. 어디서 읽은 건데, 사람이 너무 유능하고 잘나도 주위에 사람이 안 모인다고 했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모자란 면이 있어야 다가서기 쉽다나. 그래서 정은이보다 내가 더 남자친구 생길 확률이 높다는 거겠지. 잠깐만, 그럼 스스로 어리숙하고 모자라다는 걸 인정하는 거잖아?

  “밥 먹어라. 오늘부터 영어회화 배우러 다닌다고 했지? 아까운 돈 내놓고 안 나가기만 해봐라.”

  “가요, 간다고요. 누가 안 나간대?”

  하늘은 맑고 청명한데 오늘 바람이 꽤 분다. 턱 아래까지 옷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래도 춥다. 어서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좋겠다. 정은이는 학원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날 기다고 있다. 사층 건물인데 일층과 이층을 학원 용도로 사용하고 그 위층에는 ‘용역 구함’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일용직 직원을 구하는 곳인 듯하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부네.”

  “그렇지? 날씨는 좋은데 바람 때문에 은근히 추워.”

  차가워진 손을 문지르며 말을 꺼내는데 아직 몸 안에 냉기가 남아있는지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수업 끝나고 뭐하려고?”

  “바로 알바 직행.”

  “열심히 사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너는?”

  “나 애들 영어 가르쳐주는 자원봉사 지원했거든. 오늘 거기 관리하는 곳에서 관련 자료 나눠준다고 오라네.”

  “오, 멋진데. 자원봉사. 돈 받고 영어과외 할 수 있는 건데 무료로 해주네.”

  “너무 돈만 밝히면 좀 그래서. 내가 가진 기술로 남 돕고 사는 것도 좋잖아.”

  “야, 그러니까 내가 너무 돈만 밝히는 것 같잖아.”

  “사회복지 전공하는 건 너니까 너야말로 남을 위한 봉사를 해야 하지 않나?”

  “일단 돈 벌어놓고. 봉사도 내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하지.”

  “하기야 내가 힘든데 남 도울 생각이 나겠어?”

  강의실에 들어서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우리 또래 건장한 남학생과 청초한 여학생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답게 수업에 참여할 줄 알았더니, 머리 허연 할머니랑 중년 아줌마 두 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리에 앉아 있다. 예상치 못한 멤버 구성.

  “어, 음, 저기, 우리 나이 대는 별로 없네.”

  “별로가 아니라 우리가 전부야.”

  우리와 얼마 나이 차가 나지 않아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뒤로 쪽진 머리가 선생님 같아 보이게 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라며 자기소개를 시킨다. 윽, 이런 거 싫은데. 내 바로 앞 차례까지 오면 은근히 긴장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나만 쳐다볼 땐 그리 좋은 기분이 들진 않는다. 마음에 드는 남학생도 없는데 긴장하기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나이가 드신 후 뭔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영어를 선택하셨다. 대단하시다. 내가 저 나이쯤 되면 놀러 다니느라 바쁠 텐데 계속해서 배움에 목말라 하시다니. 두 아주머니는 곧 해외여행을 가실 거라 기본적인 회화라도 하려 배우러 오셨다. 그렇지, 그게 내 미래 모습이다. 유유자적 해외여행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삶. 아, 정은이가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물었는데 봉사보다 노는 게 더 좋은 데 어쩌랴. 뭐,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 바뀌겠지. 지금은 가슴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거다. 가슴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 무슨 광고 회사 카피 같지 않나. 그만큼 멋진 말인 거지.

  어, 이건 무슨 상황이래? 중학생 또래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유창하게 영어로 인사를 전한다.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하는데 그럼 뭣 하러 영어회화 학원에 다녀? 주위에 영어 잘하는 애들이 없어 영어 잊지 않도록 나왔다는데 그 말을 들으며 선생님 얼굴이 살짝 굳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크크, 자기보다 영어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 마음이 편하진 않겠지? 어째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차례가 왔다. 정은이야 제대로 된 이유가 있지. 전공이 영어 관련 학과니까. 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친구 따라 왔다고 하니 달리 반응이 없다. 쳇, 심심한 이유라 이거지.

  역시나 염려하는 상황은 바로 벌어진다. 날 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속으로 빌었는데, 내가 학원 나온 이유가 별로여서 그랬는지, 날 콕, 집어 아는 대로 영어로 인사해보란다. 갑자기 시키면 한국말로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영어로 하라니 그게 어디 나오겠냐고.

  “어, 어, 굿모닝.”

  “나이스 투 미츄. 하우아유?”

  하우아유? 이거 학교 수업시간에 맨날 듣는 용어잖아. 정은이가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본다. 왜? 그 눈빛은 뭔데? 정답은 바로 정해져 있는 거 아냐?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피식.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뭐야? 뭐가 잘못된 거야?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다고. 수업시간에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하면 대학교 간다고 하던 수석합격생들 얘기는 뭐냐고?

  “아, 저, 희진 씨.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회화는 문법 수업이랑은 살짝 달라야 하거든요. 그 말은 되도록 쓰지 마시구요, 이렇게 해보세요.”

  그러면서 선생님이 달리 쓸 수 있는 문장들을 가르쳐 주신다. 엥? 하구한날 학교 영어수업 시간에 배운 ‘하우아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를 되도록 쓰지 말라고? 그럼 도대체 수업시간에 그걸 왜 가르치냐고? 어이가 없어 정은이를 보자 정은이는 되려 나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질문을 할 때마다 엄청 버벅거리고 더듬거렸다. 선생님이 되도록 수업시간에 한국말 쓰지 말고 영어로만 대화하자고 했는데도, 안 되는 영어로 말을 꺼내다 답답해지니까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나오고 선생님 눈총을 여러 번 받았다. 이건 뭐, 아줌마들이나 할머니보다 내가 더 지적을 많이 들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엔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면서, 장희진 씨 다음부터 수업 시간에 한국말 쓸 때마다 분필을 던지겠단다. 우스갯소리로 들으라고 한 말인데 그 말을 듣는 나는 가슴이 참담했다. 내가 이렇게 영어를 못한단 말인가? 수업 마치고 나오는 내 얼굴이 안 돼 보였는지 정은이가 위로하는 투로 건넨다.

  “괜찮아. 첫 날이잖아. 뭐든지 처음이 힘들지.”

  “영어 전공하는 너나 외국 살다 왔다는 그 남자애는 그렇다 쳐. 어쩌면 그 중년 아줌마들이나 나이 드신 할머니보다도 내가 더 못하니? 12년을 학교 다니며 배운 영어 그거 다 말짱 헛것이라는 거야?”

  “회화는 그래. 이게 말이라는 게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게 어디 하루 이틀 배운다고 되겠어. 시간이 필요하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

  “너 말하는 투가 어째 학생 가르치는 소리가 묻어난다. 벌써부터 영어 선생님 티가 나네.”

  “무슨. 제대로 된 영어 선생님 소리 듣기는 아직 멀었다. 어쩔 땐 회의가 들어. 내가 선생님 소리 들을 자격은 있나 하고.”

  엄마가 아까운 돈 내놓고 안 나가기만 해봐라, 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오늘 첫 날 나오고선 벌써부터 다니기 싫어진다. 어릴 때부터 영어랑 특별히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고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한 건데 어떻게 내 머리만 영어 알레르기를 가졌나 보다. 안 되는 영어 억지로 하라면 그게 되냐고. 같이 다니기로 한 정은이 봐서라도 꾸준히 나와야겠지만 다음 수업을 위해 앉아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한숨만 나온다. 외국 이민 갈 계획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왜 굳이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기계를 통해 바로 언어가 통역되는 시대가 올 거다. 그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란다. 그럼 억지로 힘들게 외국어 배울 필요가 없을 테니. 필요 없는 걸 배우기 위해 허비하는 노력, 돈,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데. 그걸 세계 평화를 위해 사용하면 세계는 엄청 평화로워질 거고,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면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지도 않아도 되지 싶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쓸데없는 생각으로 공부 안 할 핑계를 만든다지만, 내게 영어는 정말 아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의욕도 목표도 없다. 해외여행을 가도 영어 잘 하는 가이드를 쓰겠다. 영어 공부 하지 않게 해달라고. 싫다고, 싫어, 싫다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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