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희진이에요, 제 이름.”
“네.”
아니 이름을 말했는데 네, 라는 반응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는 건가. 희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흔하진 않을 텐데. 아님 내 얼굴이 희진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린다는 거야 뭐야. 편의점에서 겪었던 좋지 않았던 기분이 아직 내 속에 남아있는지 별 게 다 거슬린다.
“네라뇨?”
“뭐가요?”
그는 내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다. 그런 무미건조한 대답을 해놓고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아니 제 이름을 말했으면 그 쪽도 소개를 하시는 게 예의가 아닌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네요. 주근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익살스럽게 건네는데 웃음이 났다.
“제 소개가 웃겼나요?”
별로 웃기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웃음이 터졌다. 내가 막 정신없이 웃으니까 안주를 입에 넣으며 같이 웃어준다. 아주 제대로 웃고 나니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했다.
“아, 실컷 웃었네. 우와, 맥주 거품 너무 맛나 보인다.”
“누군가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웃고 나면 조금 민망하지 않아요?”
“그것도 나름이죠. 오늘 같은 날은 사람들 시선이고 뭐고 내 기분부터 풀어야겠어요. 덕분에 잘 웃었어요.”
“별로 웃기지도 않았는데요.”
“잘 부탁했잖아요. 그거면 됐죠, 뭐.”
이번엔 그가 웃음이 터질 차례였다. 웃음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안주가 나온다. 보통의 나라면 누군가 앞에 두고, 그것도 처음 동석한 상대방이 보고 있는데 함부로 안주에 달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열 받은 날이다. 치킨을 보자 완전 흥분해서 그에게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아세요? 내가 먹어본 후라이드 중 제일 맛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다 뜨거워진다. 어찌나 바보 같이 굴었는지. 그것도 생전 처음 말을 나눈 남자 앞에서. 다 그 맛있는 술과 안주 때문이라고 탓하고 싶다. 입에 침이 고이도록 너무 좋은 냄새를 풍겨 날 흥분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이성이 마비되어 동물이 되어버렸다고. 맥주로 시작해서 소주로 넘어갔다. 그는 소주 그대로 마시기로 했고 난 그 쓴맛이 혀에 익숙하지 않아 매실 원액을 시켜 섞어 마셨다. 원래 과일주가 더 취하는 법이다. 마시는 속도는 그가 더 빠른데도 취하기는 내가 더 일찍 취해버렸다. 술 깬다고 일부러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바깥 공기가 차가워 술이 금방 깨긴 했다. 덜덜, 떨리기까지 해서 그리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얼른 들어와서 이번엔 몸 데운다고 마셔댔다. 후라이드로 시작한 안주는 간장 반, 양념 반으로 넘어갔다, 얼큰한 어묵탕을 지나 마른 오징어에 도달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밤이 늦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나눠서 내자고 했지만 오늘 위로의 차원에서 이렇게 한 잔 한 거니까 자기가 내게 해달라고 해서 허락해줬다. 대신 추가 점수 획득. 밤이 늦어지니까 더욱 추워진다. 종종 걸음으로 걷는데 툭, 던지듯 건넨다.
“남자친구 있으세요?”
“없는데요.”
“저 정도면 어때요?”
“지금 저한테 대시하세요?”
“제가 어떠냐고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모르네요. 나이 물어보면 실례일까요?”
“실례까지야. 스물 하나요. 군대 갔다 오셨죠? 그럼 대강 나이가 나오네요.”
“어, 제가 군대 갔다 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머리 아주 짧게 깎으셨잖아요. 대강 짐작이 가던데.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러세요.”
“원래 제대할 때쯤 머리 기르지 않아요? 말년 병장들 군기 팍 빠져가지고.”
허, 하고 김빠진 소리로 웃는다. 솔직히 정은이가 말하는 희멀건 웃음이랑 이 사람이 짓는 웃음은 조금은 다른 것 같다. 희멀겋다기보다 뽀얗다고 할까. 그래서 웃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제가 목에 뭔가 닿는 걸 아주 싫어해요. 그래서 머리도 항상 짧게 밀고 다니죠. 흠, 흠, 그리고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것 같은데, ······, 말 놓으면 안 될까? 그게 더 편할 거 같은데.”
“그러세요. 오빠라고 불러드려요? 근호 오라버니.”
“하아, 오라버니는 그렇네. 오빠가 좋겠는데.”
“근호 오오빠.”
내가 콧소리를 좀 심하게 넣었더니 금세 표정이 뜨악, 해진다.
“그것도 영 그렇네.”
“오빠면 좋겠다면서요.”
“그 맹한 소리는 빼줬으면 하는데.”
“고객님 주문사항이 아주 복잡하시네요.”
“나도 진상인가?”
“진상까지는 아니고. 주상 정도.”
“주상?”
“주상 전하 납시오.”
“아니 내가 언제 왕처럼 굴었다고?”
“그냥 재밌으라고 해본 소리에요.”
“재미없는데.”
밤이 깊은 시각에 길거리에서 웃으면 사방이 조용하고 지나다니는 차나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크게 울린다. 별 생각 없이 웃어댔는데 생각보다 크게 울려서 얼른 멈췄다.
“자기 웃음소리에 놀라는 사람은 처음 보네.”
“놀란 건 아니에요. 생각보다 크게 울려서 자는 사람들 깨울까 봐 조심한 건데요.”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들 생각 많이 해주고 그래?”
“나름 챙기면서 살죠. 이래봬도 사회복지학 전공이에요.”
“나도 희진이가 걱정해주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될 수 있을까?”
“······.”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걱정해드릴게요’가 질문에 대한 적당한 답은 아닐 테니까.
“전화번호, 주지 않을래?”
그렇지, 그 뜻이었어.
“번호 드리면요?”
“연락할게.”
그렇게 내 번호가 넘어가버렸다. 집 앞에 와서 헤어지는데 내가 정신이 없었는지 아님 술이 올랐는지 근호 오빠 번호는 받을 생각도 못 했다. 엄마한테 기집애가 술 마시고 늦게까지 돌아다닌다고 한바탕 타박을 들은 후 샤워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실감이 영 나지 않았다. 이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수순인가? 그렇지만 너무 빠르잖아. 지난 번엔 이런 속도는 아니었다고. 하루만에 그냥 결정? 더 깊게 생각해보고 싶은데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논리적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자꾸 낭만적인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심지어 ‘신혼여행은 어디로’까지 생각이 미쳤으니 나도 참 못 말릴 인간이다.
아,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작년 겨울 기억이 속절없이 머리 안으로 들이민다. 윤재 오빠는 작년 겨울 알바 했던 곳에서 만났다. 친구들이랑 따뜻한 거 마시자고 들어와서 어째 마시는 것보다 먹는 걸 더 시켰다. 윤재 오빠도 근호 오빠처럼 머리가 짧았다. 그렇네. 이것도 징크스네. 어째 나는 머리 짧은 사람과 엮이는 운명인 거지? 윤재 오빠는 나와 만난 그 날 바로 내게 대시했다.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고, 일하는 카페에 손님을 대하는 엄격한 규정사항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 손님과 만난다는 게 윤리적이지 않게 느껴져 그땐 거절했었다. 그랬더니 계속 카페로 찾아왔다. 단골 손님이 늘어나니 카페엔 좋은 일이었지만 일하는 중 오빠가 자꾸 말을 거니 눈치가 보였다. 일하는 시간에 오빠와 노닥거리다 쫓겨날까 걱정 돼서 결국 약속을 잡았다. 그때까지도 오빠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었다. 만나서 잘 다독여주고 그렇게 끝을 낼 심산이었다. 그렇게 만났는데 생각보다 윤재 오빠는 저돌적이었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까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워버렸다. 오빠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알 수 없지만 내겐 큰 의미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에다 어쩌면 연말과 새해까지 함께 할 생각을 하니 그제야 오빠와 관계가 진전된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 전까지 남자친구가 있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으니 새삼 이제 첫사랑을 한다는 감상에 흠뻑 젖었다. 어쩔 땐 차오르는 벅찬 감정에 잠까지 설쳤다. 그랬다. 그렇게 내 첫사랑이 다가왔다. 한 겨울 손발이 시리게 춥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온 사방이 들뜨는 그 시기에 남자친구가 생긴 거다. 내 인생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에 다가온 첫사랑이라 그게 더욱 낭만적이었다.
그랬는데, 그렇게 달콤했었는데, 그 망할 인간이 갑자기 우리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랬다면 덜 억울하겠다. 제대로 된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 없이 윤재 오빠는 이별을 고하고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기였다. 처음 밖에서 만났을 때 오빠에게 내 연락처를 줬다. 난 오빠 전화번호를 받지 못했다. 오빠가 현재 사용하는 전화번호가 없어 항상 내가 전화를 받는 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의도적이었던 듯하다. 내 쪽에서 연락처를 모르니 오빠가 보이지 않자 찾아가서 만날 방법이 없었다. 이미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다면 도대체 시작은 왜 했나 모르겠다. 내가 만나달라고 조른 게 아니다. 오빠는 내가 거절하는데도 그렇게 들이댔다.
어, 이거 슬슬 불안해진다. 근호 오빠 연락처를 받지 않았다. 덜컥, 거리며 가슴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숨이 가빠진다. 어떻게 이리 상황이 비슷하지? 그럼 근호 오빠도 크리스마스 바로 며칠 전에 이별을 고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지려나? 난 또 속절없이 그걸 지켜보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다 겨우 잊어가는 거고. 아, 정은이가 괜히 징크스라는 말을 꺼내가지고 자꾸 작년과 올해를 머릿속에서 연결 지어 징크스라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자꾸 그런 식으로 몰고 가지 말라고. 근호 오빠는 윤재 오빠랑 분명 다른 사람이고, 윤재 오빠보다 훨씬 인품이 좋다고. 얼굴은 뭐, 윤재 오빠가 쬐끔 더 조인성을 닮았지만. 아니, 지금 얼굴을 따진다는 게 아니다. 근호 오빠는 윤재 오빠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믿는다. 아님 기원한다. 자꾸 처량해지지 말라고!
설, 마, 올해 크리스마스를 작년처럼 혼자서, 울면서, 서러운 기분으로 보내진 않겠지. 그럴 순 없다. 정말 그래선 안 된다. 계속해서 속으로 빈다. 내게 그런 크리스마스 징크스는 없어, 없는 거라고. 그럼 너무 속상하잖아. 매번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내야 한다면 정말 억울하다고. 아니야, 내겐 그런 징크스는 없어. 징크스가 있다고 해도 크리스마스 징크스는 아닌 거야. 아니라고. 절대로, 절대로, 크리스마스와는 상관이 없을 거다. 정은이는 왜 하필 징크스 얘기를 꺼낸 거지? 그런 얘기를 꺼낸 정은이가 밉고 그렇게 생각이 들도록 나쁜 기억을 안겼던 윤재 오빠가 밉다. 제발, 빈다. 근호 오빠까지 미워하지 않도록.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올해는 분명 멋진 크리스마스를 보낼 거다. 근호 오빠와 함께. 그래서 징크스 얘기는 쏙, 들어가 버리도록 만들 거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이 희진이가 올해는 꼭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도록 부디 선처해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손이 닳게 빌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