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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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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9
작성일 : 19-10-24     조회 : 335     추천 : 0     분량 : 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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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다음날.

  구름 낀 흐린 날. 시커먼 구름이 간간이 보이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비가 오면 눈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어릴 땐 눈 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눈이 오는 게 그저 좋지만은 않다. 추위에 떨어야 하고 길 다가 미끄러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일 끝날 때까지 오지 말다가 내가 집에 딱 도착하는 그 순간 눈이 오기를 바랐다.

  오늘 아침 결국 영어회화 수업을 들으러 가지 못했다. 엊저녁에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사실 얼마나 마셨는지 확신은 서지 않는다. 자기 마시는 잔 숫자를 세면서 술 마시는 사람은 없잖아. 아침에 겨우 눈을 뜨고 숙취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오늘 아무래도 수업 못 나가겠다고 연락을 하니 정은이가 전화로 엄청 잔소리를 해댄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빠지게 된다고. 다음부터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재차 다짐을 하며 미안하다고 빌고 나서 겨우 통화를 마쳤다. 오후에 일하러 갈 때까지 누워있을 작정을 하고 침대에서 나오질 않는데 점점 더 어제 저녁의 일이 선명해진다. 진짜 일어난 일일까. 하기야 숙취로 인해 오전에 학원도 못 가고 이렇게 침대에 누워만 있으니 실제 일어난 상황이긴 하겠지. 어떻게 그렇게 상황이 급진전 했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편의점에 출근하기 위해 힘겹게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연락은 오직 않았다. 그 사람이 연락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굳이 미리 생각해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려나. 기분이 싱숭생숭 하기도 하고 묘하게 기대감이 생긴다. 올 전화가 있다는 게 사람 기분을 들뜨게 해 신기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않은 일에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그런 일이 기분 좋은 보너스 받듯이 다가온다.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 신기하다, 신기해.

  이틀째.

  아직 눈은 내리지 않는다. 아직 그에게서 전화도 오지 않고 있다. 오늘은 일부러 일찍 나서서 영어회화 수업을 들으러 갔다. 정은이가 수업시간에 이유 없이 실실 웃는다고 이상하게 쳐다봤다. 나도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무슨 사랑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겨우 전화 한 통 올 거라는 기대뿐인데 이런 기분이 들다니. 그가 딱 내 스타일도 아니다. 내가 꿈꾸는 이상형은 그보다 좀 더 세련됐고 샤프한 인상을 가졌다. 물론 나라고 그에게 완벽한 상대는 아니겠지. 그저 혼자 궁상떠는 내가 스스로 한심해서 그런다. 이러다 제대로 연애가 진전되면 얼마나 유난을 떨려고 벌써부터 이럴까. 첫사랑에 데어봤는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참 한심하고 기가 찬다.

  편의점에서 근무 중엔 전화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해 가방 안에 넣어놔야 하는데 그 사이 전화가 올까 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숙녀가 조금 기다리게 했다고 큰 실례가 되진 않겠지.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이 되지 않다 상대편에게서 전화가 오면 그걸 받을 때 드는 기쁨은 두 배로 커지지 않을라나. 내가 혼자 너무 앞서가는 건가. 암튼 일할 때 전화가 올까 봐 쉬는 시간마다 확인했는데 연락 온 건 없다.

  사흘째.

  진눈깨비가 내리다 멈췄다. 이렇게 희미하게 내리는 눈을 볼 때면 어쩔 땐 그런 생각이 든다. 내리려면 확 내리든지 아님 내리지 말든지 하지. 오늘 역시 그에게서 연락이 없다. 많이 바쁜가? 편의점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취직했나? 그렇게 열심히 신문 구인란을 보더니 원하던 일자리를 찾았을 수도 있겠다. 취직하고 일을 시작하면 온통 마음을 뺏겨버린다는 걸 나도 안다. 내가 알바 시작할 때도 무지 정신없었으니까. 그나마 여기 편의점은 점장님이랑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이 좋아서 나름 편하게 적응했는데 예전 카페 서빙 알바 할 때는 일 배우면서 엄청 고생했다. 누구나 처음엔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지들은 처음부터 잘 했었는지 나보고 느리고 엄청 버벅거린다고 심하게 스트레스를 줬다.

  그런가? 그도 갓 시작한 일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고 있을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나한테 연락할 여유마저 없겠지. 내가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뭐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전화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내 입장만이 아니라 전화하고 싶어도 틈이 없어 전화기를 들지 못하고 애태우는 그의 입장은 떠올리지 못했다. 주말까지 기다려줘야 하나? 그가 스트레스를 받아 속쓰림이나 탈모 증상 같은 걸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픈 사람 옆에서 보는 건 정말 고역이다. 아프지 말라고 밤에 잠들기 전에 살짝 속삭여 주었다. 건강한 얼굴로 봤으면 좋겠다.

  나흘째.

  오늘은 날씨가 개어서 간간이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비춘다. 해 뜰 때만 기온이 올라갔다 해가 보이지 않으면 추워진다. 그래서 드문하게 비추는 햇살을 몸으로 받을 때면 너무 기분이 좋다. 그에게선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설마 내가 준 연락처를 잃어버린 거 아닐까? 그래놓고 미안하니까 편의점에 얼굴도 못 내밀고. 연락처 잃어버렸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내가 얼마든지 용서해줄 수 있는데.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소심한 사람이었나?

  아, 일이 바빠서 시간을 못 낼 수도 있겠지. 오늘이 금요일이라 주말을 맞이하기 전에 한 주 마무리를 하다보면 더 바쁠 수도 있잖아. 내일은 연락이 올 거야. 그래, 주말까지는 시간을 줘야지. 내가 너무 조바심내고 있어. 왜 이러나 몰라. 원래 나 이런 애 아닌데. 자꾸 마음 졸이지 말고 내일 밝은 모습 보여주기 위해 오늘은 걱정 없이 푹 자자. 전화가 아니라 직접 찾아올지도 몰라. 그럼 어쩌지? 얼굴에 팩이라도 하고 잘까? 잠이 안 오네. 그도 내 생각을 할까?

  닷새째.

  토요일. 구름이 싹, 물러가고 파란 하늘에 해가 맑게 뜬 날이다. 주말인데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고 있다. 편의점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혹시 주말 근무를 하나? 신입인데? 하긴 요즘 같은 불황기에 신입이라고 따로 봐주지 않겠지. 주말까지 일하려면 많이 힘들 거다. 예전에 연휴가 겹쳐 손님이 붐빌 때 휴일 없이 쭉 일주일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여파가 꽤 오래 갔다. 쉬어도 쉬어도 회복되기까지 한참 걸렸다. 일주일 중에 쉬는 날이 끼어있는 이유를 그때 톡톡히 체감했다. 그가 너무 힘들지 않아야 할 텐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반복해서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도 이제 슬슬 지친다. 전화를 기다리면서 흥분했던 시간들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전화번호는 왜 달라고 한 거야. 이럴 거면 말이나 꺼내지 말지. 사람 기대하고 해놓고 이렇게 지치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정말. 그런 인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어. 이제 연락이 와도 무시해 버릴 테다. 혹시 사고라도 난 걸까? 병원에 있어서 전화를 못하나? 설마 차 사고나 강도를 당한 건 아니겠지? 아악,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게 뭐냐고. 일주일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버리다니.

  엿새째.

  일요일. 오늘은 쉬는 날. 어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쉬는 날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보내니까 전화 생각이 더 났다. 날씨가 좋아서 그게 더욱 억울하다. 이제 정말 화가 난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 오늘 결국 정은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거의 일주일을 오지도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혼자서 걱정하고 열 받으며 지냈다고 하니 아주 어이없어 한다. 정은이와 충동적으로 약속을 잡고 해가 기울기도 전에 소주방으로 향했다. 소주가 필요했다. 맥주로는 어림도 없을 듯했다. 전화번호를 주게 된 사연을 풀어내고 이어서 혼자서 별별 생각을 하며 보낸 한 주 얘기를 세세하게 덧붙이자 정은이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왜 그렇게 보는데?”

  “네가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서.”

  “뭐어? 그게 왜 이해가 안 돼? 내가 일주일을 그렇게 기다렸다니까. 전화번호를 잃어버렸는지, 혹시 무슨 사고 난 건 아닌지. 하루에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한 줄 알아?”

  “너 그 날 처음으로 그 사람이랑 얘기 나눈 거지? 그 사람 네가 일하는 곳에 손님으로 왔다가 말을 트게 된 거잖아.”

  “응. 그 전에도 계속 편의점에 들르긴 해서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어.”

  “암튼 통성명하고 인사한 건 그 날이 처음인 거잖아.”

  “그으래.”

  “그 진상이랑 한 바탕 하고 나서 함께 술 마시게 됐지. 연락하겠다고 전화번호 달라고 해서 줬고. 그리고 그게 다잖아.”

  “어, 그렇지.”

  “손을 잡았다거나 뽀뽀라도 했어?”

  “아아, 니이.”

  “그 사람이 같이 잔 건 더더욱 아닐 테고”

  “얘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헤픈 여잔 줄 알아. 그 날 그 사람이랑 처음 얘기 나눴다니까.”

  “탁 터놓고 얘기해서 전화번호만 준 거지 그 외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잖아. 그럼 거기서 뭘 기대할 건더기가 없는데.”

  “그 사람이 전화 한다고 했다 말이야. 사람이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너한테 전화번호 받고 다음날 누구 더 좋은 사람 만났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쉽게?”

  “답답하면 네가 전화해보지 그랬어?”

  “그 날 너무 취했었는지 그 사람 전화번호 받을 생각을 못했어. 내 번호만 주고 그렇게 헤어졌어.”

  “흠, 그럼 얘기 끝난 것 같아. 그 사람, 너한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거야. 이유가 무엇인진 몰라도.”

  같이 열 받아서 방방 뛰어줄 줄 알았던 정은이가 심드렁하게 나오니까 내가 다 맥이 빠졌다. 이야기가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말할 기분이 식어버려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들이켰다. 한 잔 더 마시려니까 정은이가 직접 따라준다. 정은이 잔도 비어서 내가 따라주니까 슬쩍, 말을 꺼낸다.

  “근데 나 그저께쯤 동네 근처에서 윤재 오빠 본 것 같은데.”

  “윤재 오빠? 그 인간은 왜? 지금 여기서 그 이름이 왜 튀어 나오냐? 난 더 이상 관심 없거든.”

  “어, 그래. 지나가다가 얼핏 본 것 같아서 확신은 안 서는데. 머리도 엄청 짧아져 있고.”

  “아, 그 인간은 또 왜 머리가 그렇대? 난 머리 짧은 인간들하고만 엮이는 이상한 팔잔 거야? 그것도 내 징크스냐고?”

  그렇게 그 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필름이 끊겼다. 어떻게 정은이네 집으로 가서 정은이랑 같이 침대에 누웠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아침에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정은이 부모님과 마주하려니 죄송해서 겨우 인사만 건네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다가오는 주에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다. 결국 올해 크리스마스도 이렇게 혼자 보내게 되는 건가. 작년이랑 똑같다. 크리스마스 즈음 남자친구랑 깨졌다. 그러곤 혼자서 쓸쓸히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래, 내 징크스는 이렇게 결론이 나는구나. 아니라고 자꾸 부정을 해도 사실인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크리스마스를 언제나 혼자 보내야 하는 내 징크스. 그래도 작년에 일했던 카페는 크리스마스 당일 날 쉬었는데 편의점은 크리스마스에도 문을 연다. 그렇게 치면 올해는 더 비참한 크리스마스인가? 그 날 일까지 해야 하니까. 제발, 더 이상 이러지 말자. 올해까지만 이러자. 내년에 또 다시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다고. 제발, 제발, 이제 더는 크리스마스 징크스 싫다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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