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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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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10
작성일 : 19-10-24     조회 : 310     추천 : 0     분량 : 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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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군 제대 날, 짐 싸고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이렇게 챙겨야 할 사람이 많다니. 아직 제대 날짜가 많이 남은 후임병들은 부러운 눈길을 감추지 못한다. 나도 제대하는 선임병들을 보며 저랬으니까. 얘들아, 군대 초침은 느리게 흐르지만 멈추진 않는다. 언젠가 너희 차례가 올 테니 꾹, 참고 기다리렴. 정말 나는 언제 제대하나 했는데 어느새 오늘이 왔다. 사실 은근 부담되기도 한다. 밖에서 만났던 선배나 친척형들이 경기 안 좋은 요즘엔 차라리 군대 있는 게 마음 편하다고 자꾸 겁을 준다. 그래도 그건 밖에 있는 사람 마음이고 안에 갇혀있는 자에겐 제대만이 살 길이다. 나도 오늘부터 민간인이라고!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집으로 향하는데 골목에 자리한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집 가는데 뭘 굳이 사들고 가야 하나 반문했지만 빈손으로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러 나름 폼이 나는 음료세트를 샀다. 음료를 가득 채운 냉장 판매대를 지나치는데 유리에 비친 군복 입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턴가 군복 입은 모습이 익숙했었다. 그렇구나, 이제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더 이상 군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예비군 훈련 때나 입겠지.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며 문득, 어, 저 점원 얼굴이 익숙하다 느꼈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뒤돌아보니 가게 안에 손님이 없자 카운터를 돌아 나와 열심히 매장 안을 물건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날 알은 체 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봤었지? 그때는 그렇게 지나쳤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다음 번 허기를 채우려 편의점에 다시 들렀을 때야 겨우 기억을 해냈다. 아, 임윤재! 남들보다 나이 들어 군대 후임으로 들어온 윤재. 군대를 늦게 오는 건 그다지 반길 일이 아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급자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본인도 힘들고 나이 많은 아랫사람을 부려야 하는 상급자도 불편하니까. 그래도 윤재는 나이 많은 티를 내지 않고 싹싹하게 잘 해나갔다. 군대는 문제없이 잘 지내면 성공이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나가는 게 목적이니까. 나이 많은 윤재가 안쓰러워 일부러 챙겨주고 그러다 가까워졌다. 밤 근무를 함께 서며 더욱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게 되고 무척 반가웠고 그러면서 더욱 친해졌다. 공통 관심사가 있으니 말할 거리가 계속 늘어났다. 윤재는 나름 화려한 이력을 가진 친구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배낭여행을 자주 다녔고 공모전 같은 데 응모해서 입상한 경력도 있었다. 심지어 아나운서 시험에 지원해서 2차 테스트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군대 갈 생각은 뒷전으로 미뤘었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 주로 듣는 쪽은 나였다. 윤재가 여기저기 다른 길로 많이 가봤다면 나는 주로 사람들 가는 쪽으로 따라다녔다고 할까. 소위 말하는 범생이 스타일. 그러다 보니 얘길 듣다 나는 뭘 했나 하는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윤재보다 일찍 제대하니까 제대하고 나서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봤자 두 달 먼저인데.

  제대가 거의 가까워질 때쯤 윤재가 말년 휴가를 나갔고, 나도 제대하면 무얼 할까 계획 짜고 짐 싸느라 바쁘게 지내서 윤재와 인사 나눌 기회 없이 부대를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창밖을 보며 윤재와 크리스마스 때 헤어진 옛 여자친구는 아직도 그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을까 뜬금없이 궁금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제대 날짜가 겨울방학 사이라 내년 복학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남는 시간에 돈이라도 벌어볼까 하고 알바 자리를 찾기 위해 피시방에 가서 웹사이트를 뒤지고 동네 여기저기에 꽂혀있는 무가지들을 들쳐보며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졌다. 가장 만만한 곳, 편의점. 식당에 들르면 웬만큼 돈을 써야하는데 지금 내 사정으론 그렇게 식비를 지출하는 것마저 아쉬웠다. 윤재가 보여준 사진 속에 있던 여자. 머리 모양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짧은 길이에 그 입모양은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은 들었다. 정말 윤재가 말하던 그 여자가 맞나? 이름이 장희진이 맞을까? 왜 카페가 아니라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지?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고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앞에는 골목에서 집어온 신문을 펼쳤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없다. 내가 알바 자리를 골라서 갈 처지는 아니지만 집 근처엔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고 멀리 가려니 차비랑 시간을 고려하면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어쩐다? 어? 그녀가 나를 힐끔, 거린다. 분명 봤다. 이건 그냥 순전한 내 상상이 아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나를 알아본 건가? 어떻게 나를 알지? 윤재가 내 얘기를 했나? 아니지. 그럴 기회가 있기 전에 그녀와 헤어진 거잖아? 나를 알 리가 없는데. 설마, 내가 마음에 들었나? 정, 말, 로?

  헉, 그녀가 카운터를 돌아 나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뭐지? 말을 걸려나?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 따져가며 작업 거는 순서를 정하진 않겠지만 정말 그녀가 내 전화번호를 묻는다면 참 용감한 거다. 난 말도 제대로 못 걸겠는데. 그렇게 용감한 인상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아무튼 받아줄 용의는 충분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함부로 거절하겠나?

  “저, 저기 손님.”

  “예?”

  “손님한테 이런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한데요.”

  사장님한테 직원이 손님한테 작업 걸었다고 말 안 할게요.

  “제가, ······, 음,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는데, 잠시만 가게 좀 봐주실 수 있을까 하구요.”

  아, 아아아, 그거였나? 화장실. 급해 보이긴 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게를 보지? 계산할 줄도 모르는데.

  “제가, 가게를요? 계산, 할 줄도 모르는데.”

  당황해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손님 오면 알려만 달란다.

  “그러죠, 뭐.”

  그러겠다고 하긴 했는데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고 속으로 바란다. 화장실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님 왔다고 얼른 나오라고 하기도 무안하다. 편의점 문이 열린다. 그렇지, 뭐. 꼭 이렇게 되라고 빌면 상황은 반대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옷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이상한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선다. 표정을 이미 찡그린 채다. 하필 들어온 손님이 저런 사람인지. 그러겠다고 해놓고 괜히 실수하면 안 되는데. 그 남자는 하릴없이 복도를 기웃거린다. 뭘 살 생각은 없는 건가? 그래, 그냥 구경만 하다 나가라. 내가 나설 필요 없게. 그래도 누군가 카운터에 있어야겠다 싶어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런, 그냥 있던 자리에 있을 걸.

  “담배.”

  “네?”

  “담배 달라고. 말보로.”

  바로 당황스러워졌다. 담배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다, 담배요?”

  내가 재차 묻자 그의 양눈썹이 안 그래도 찡그린 채였는데 더욱 찌그러진다. 이야, 속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저게 저렇게 찌그러지지?

  “담배 달라고, 담배. 한국말 몰라? 뭐야, 보기만 그렇고 혹시, 외국 노동자야? 이야, 요즘 외국애들 엄청 들여와서 싼 임금에 착취한다더니 이제 편의점에서까지 쓰나 보네.”

  아니, 멀쩡한 대한민국 청년을 외국인으로 몰다니.

  “저, 한국말 잘하는 한국 사람이거든요.”

  “그럼 담배 달라는데 왜 그걸 못 알아들어?”

  담배 달라는 걸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고. 담배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러지.

  “저, 잠깐 기다리셔야겠어요.”

  “기다려?”

  “네,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담배 사는 데 기다리라고? 담배 여기서 만들어서 팔아? 나보고 담배 사기 위해 기다리라고? 지금 내 앞에 기다리는 줄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게 잠시만 기다리시라니까요.”

  “아니, 손님이 왜 기다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점점 난감해지는 상황에서 그녀가 밖으로 나오는 걸 봤다. 휴. 안도하는 숨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아니, 신입 교육을 이렇게 시키나? 손님한테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고.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아니요, 이 분은 저희 직원이 아니고 손님이세요.”

  “손님이 왜 가게를 봐?”

  “제가 잠시 안쪽에 볼 일이 있어서······.”

  “직원이 자리를 비우면 쓰나? 편의점이 왜 24시간 오픈인데. 24시간 언제라도 손님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편의점 아닌가?”

  안도한 것도 잠시, 이 남자의 행동이 가관이다. 아주 자기가 무슨 왕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한다. 그녀가 사과하며 저자세를 취해도 기분 나쁘다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나무라듯 힐난하기를 계속하더니 그녀의 손에서 낚아채듯 담배를 받아 돈을 카운터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던져놓고 나간다. 많이 참았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더 열 받는다. 나는 여기 직원도 아니니 소란을 떨어도 상관없겠지.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가려는 나를 그녀가 얼른 잡아 세운다.

  “저기, 잠깐만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요.”

  그녀가 웃는데 눈가가 젖었다. 감정이 차올랐나?

  “괜찮아요?”

  ‘휴,’ 라며 숨을 내쉬는 그녀.

  “맨날 당하는 일인데 그래도 당할 때마다 적응이 쉽게 안 되네요. 제가 웬만한 일은 잘 참고 넘기는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하면 그건 견디기 힘들어서요. 아, 싫다, 저런 인간.”

  웃는데 목소리는 떨린다.

  “저 이제 나아졌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어떻게 위로해준다. 딱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그만 술 사주겠다고 해버렸다. 어쩌다 그런 말이 튀어나왔지? 나도 모르겠다. 상황이 그랬다. 화장실 때문에 가게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이상한 손님이랑 엮인 후 울상이 된 얼굴을 보는데, 윤재한테 들었던 얘기 때문인지 남일 같지가 않았다. 만약 윤재가 말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해도 상관 없었다. 보통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아닌데 대뜸 그런 수모를 당하는 걸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그 진상 손님을 뒤따라가서 뭐라도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나를 붙잡았다. 붙잡아놓고 울먹이기까지 한다. 차라리 그 인간이랑 싸우는 게 나았을 텐데 슬픈 얼굴을 한 여자 앞에서 무엇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저녁에 일 끝나고 보자고 했을 때는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만나려니 난감했다. 군대 후임이 언급했던 옛 여자친구를 만나서 어떤 얘기를 나눈단 말인지. 그래도 이미 한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약속 시간에 나타난 나를 반기는 그녀를 보니 나오길 잘했다고 속으로 다독였다. 동네에 있는 건 알았는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치킨집으로 향했다. 안은 허름했는데 맛은 이제까지 맛본 치킨 중에서 거의 최상급이었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고 하잖아. 언짢은 일로 엮어 그녀와 이렇게 치킨집에서 마주앉게 됐지만 어쩌면 이 만남을 준비하며 모든 게 착착, 진행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예감은 좋다. 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고 그 다음은 ······. 그 다음은 또 어떻게 진행되겠지. 지금은 즐거운 시간을 그저 만끽하자. 아, 술이 달다. 치킨이 녹는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세상이 너무 맛나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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