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첫회보기
 
크리스마스 징크스 11
작성일 : 19-10-24     조회 : 335     추천 : 0     분량 : 5497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1.

 

  ‘장희진’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맞구나’라는 감탄과 ‘이제 어쩌나’라는 망설임에 그저 ‘네’라는 대답만 입에서 튀어나왔다. 성의 없는 대답을 한다고 바로 한 소리 들었다. 술과 음식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도 머리 한쪽은 자꾸 윤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기 옛 연인과 이렇게 앉아있는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물론 둘 사이가 끝난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서슴없이 옛날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선임이 자기 옛날 여자 친구였던 사람인 줄 알면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면 배신감을 느끼려나?

  오늘 처음 말을 나눈 사인데 말이 잘 통한다. 머리를 좌우로 약간씩 흔들어가며 술잔을 드는 모습이 귀엽고 진상 손님 욕하는 행동이 전혀 밉게 보이지 않았다. 윤재가 반했을 만한 여자구나 감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항상 핑계를 대는, 그 놈의 술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별 저항감 없이 전화번호를 묻고 말았다. 말을 꺼낸 후에 후회하지 않았다. 물론 윤재는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내가 윤재 마누라랑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처음 만났는데 이런 감정이 든다면 제대로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술집을 나와 그녀와 함께 걸으니 차가운 공기가 피부 위로 닿는다. 밤이 깊은 시각, 사방이 조용하다. 그녀가 별 생각 없이 크게 웃어대다 그 소리가 너무 큰지 얼른 입을 오므린다.

  “자기 웃음소리에 놀라는 사람은 처음 보네.”

  “놀란 건 아니에요. 생각보다 크게 울려서 자는 사람들 깨울까 봐 조심한 건데요.”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들 생각 많이 해주고 그래?”

  “나름 챙기면서 살죠. 이래봬도 사회복지학 전공이에요.”

  아, 사회복지를 전공하는구나. 그럼 주변 잘 챙기겠네. 그러곤 드라마에서나 들을 만한 아주 간지러운 대사를 꺼내고 말았다. 어쩌다 그런 낯 뜨거운 말을 해버렸는지.

  “나도 희진이가 걱정해주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될 수 있을까?”

  대답이 없다. 그런 간지러운 말에 어울릴 대답을 찾기 힘들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바로 덧붙였다.

  “전화번호, 주지 않을래?”

  후아, 그 말을 해버렸다. 그랬다. 내가 한 거다. 믿어지지 않는 행동이다. 내 안에 그런 용기가 있었다니. 그녀가 전화번호를 건넨다. 아차, 제대하고 바로 전화 개통을 한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전화번호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없는 나라니. 그녀가 얼마나 미덥지 않게 볼까? 내일 당장 전화 개통부터 해야겠다.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돌아오는 길이 전혀 외롭지 않다. 차가운 공기도 아무렇지 않았다. 세상이 붕, 붕, 떠오르는 기분. 이래서 다들 연애를 하겠지. 장희진, 장희진, 장희진. 내일 전화를 개통하면 단축번호 맨 처음 자리할 그녀의 이름. 연애를 한다. 이런 나도 연애를 한다. 방금 헤어졌는데 그녀가 벌써 보고 싶다. 그녀도 그럴까? 그러기를 바란다. 이런 나라도 그녀에게 멋진 왕자님 같아 보이기를. 내일 전화를 개통하고 그녀에게 바로 연락을 해야지. 너무 매달리는 것 같을까? 그래, 조금 속도 조절을 하면서. 보고 싶다. 아, 희진 씨. 보고 싶어요.

  다음날.

  아침이 꽤 힘들었다. 그다지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술 마실 기회가 적었던 군대 체질이 아직 배어있어 약간만 마셨어도 몸이 놀란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가장 잘 알 테니까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나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 같은 조언을 듣고 싶었다. 난 짐짓, 가볍게 물었는데 엄청 긴 대답을 주저리 늘어놓는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역시 여자는 남자보다 두뇌가 훨씬 더 발달했다. 그런 복잡한 내용을 머릿속에 일일이 집어넣을 수 있다니.

  일단 전화를 개통하고 입을 만한 옷을 사기 위해 나섰다. 그녀도 술 마신 다음날 숙취로 힘들 테니까 정신이 깨는 오후쯤에 연락하는 게 적당하겠지. 동네 근처 휴대폰 매장에서 전화번호 개통을 하고 옷은 큰 매장이 많이 몰린 쇼핑센터에서 둘러보기로 정했다. 큰 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기분 좋게 골목길을 걸었다.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연애를 시작한다는 기대감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애써 내 자신을 가라앉혔다. 아직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버스 정류장에 윤재가 서 있었다. 여전히 짧은 머리지만 옷은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걸치고.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길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군복무 중인 현역인데. 내가 놀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본다. 처음엔 윤재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반가운 감정을 얼굴 위로 떠올리며 앞으로 다가온다.

  “주병장님!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어, 아, 그래.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어떻게 지내셨어요? 제대 잘 하셨구요?”

  “잘 하고 말고가 있나. 군대에 남아있는 사람이 힘들지 제대야 그냥 제대하는 거고. 어떻게 지냈어?”

  “하하, 사회 물 먹더니 바로 얼굴 좋아지셨는데요. 저, 말년 휴가 나왔습니다.”

  “그래? 아, 맞어. 말년 휴가 나간다고 나 제대할 때 인사 못할 거 같다 했었는데.”

  ‘어디 가세요,’ 라는 물음에 희진과 데이트 할 때 입을 옷 사러 간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하필이면 기다리는 버스도 같아서 정류장에서 함께 기다리다 버스에 같이 올랐다. 희진만 아니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더욱 반가웠을 거다. 군대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임이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군인 신분이 아니니까 말을 편하게 건네도 될 거고. 그런데 희진이 마음에 걸리니 어째 거북스러워진다. 빨리 헤어지고 싶었는데 버스에서 동석까지 하다니.

  “휴가 기간 동안 뭐하면서 보내려고?”

  “일단 먹고 싶은 음식 먹으러 돌아다녀야죠. 군대가 사람 원초적으로 만든다고, 원래 먹는 거에 민감하지 않은데 이렇게 변했어요.”

  “나도 똑같았어. 휴가 나올 때마다 먹고 싶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실컷 먹고 가. 그래봤자 군대 복귀하면 아쉬움은 항상 남지만.”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고 친척 어른 분들도 찾아뵙고 바쁠 겁니다. 지나고 나면 금방일 거예요.”

  “그거야 항상 그래.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맨날 아쉽고 복귀하기 싫고, 그 마음 알지.”

  윤재의 표정이 쓸쓸하게 바뀌는데 내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얘기가 나올지 듣기 전에 감이 온다.

  “희진이 생각을 했었어요. 내가 헤어지자 해놓고 무슨 염치인가 싶지만 그래도 같은 동네 사는데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가 들더군요.”

  “다, 다시 연락하고 싶은 거야?”

  속으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빌었다. 나는 연기에 전혀 재능이 없다.

  “사실 연락했었습니다.”

  “어? 아, 그, 그래. 그래서?”

  “전화번호가 바뀌었어요. 혹시나 해서 예전 일했던 카페에도 가봤는데 그만둔 지 오래였죠. 예전 살던 집에도 들렀는데 모르는 사람이 살더군요. 어디 멀리로 이사 갔나 봐요.”

  아직 이 동네 살아. 저기 골목 아래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알바 해. 내가 그 말을 어떻게 꺼내겠나. 나한테 희진이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은 것도 아니고 내가 굳이 묻지 않은 말에 답해줄 의무는 없으니까. 그래, 안다. 비루한 변명일 뿐.

  “그, 으, 렇, 구나. 아직도 그녀 생각 많이 해?”

  “군대 있으니까 더 생각나네요. 항상 단조로운 일상에 맨날 보는 것도 똑같고 주의를 분산시킬 만한 게 없으니 자주 떠올라요.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인데 참 한심하죠.”

  그다지 받고 싶지 않았지만 윤재가 알려주는 전화번호를 마다할 수 없었다. 내 연락처도 건네고 싶지 않았지만,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부 화면을 올리고 기다리는데 알려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버스에서 먼저 내리며 휴가 끝나기 전에 꼭 한 번 보자고 건네는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그 후 예정했던 곳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치고서야 황급히 벌떡 일어나 하차벨을 눌러댔다. 오늘 계획은 모두 틀려먹었다. 당장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희진에게 전화를 하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분명 대놓고 잘못한 일은 없는데. 차라리 윤재한테 희진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희진을 만나지 못했겠지. 서로 얼굴을 마주했더라도 제대로 된 인사 나눌 기회조차 없었을 거다. 그저 편의점 점원과 스쳐가는 한 명의 고객이었겠지. 모르겠다.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옷을 살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하는 소리에도 몸을 일으킬 생각은 않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가렸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 거지.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이틀째.

  새로 산 휴대폰을 반복해서 들었다 놓았다. 저장해놓은 단축번호 위에 손가락을 얹어놓기를 여러 번, 그러나 차마 누르진 못하겠다. 윤재가 희진과 내가 같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설마 날 배신자라고 하려나? 배신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잖아? 나는 그저 윤재가 하는 얘기를 들어준 것뿐이다. 내가 먼저 나서서 둘 사이 얘기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려준 정보를 이용해서 내게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었다고 할까? 딱히 윤재가 말했던 내용을 이용한 것도 없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그녀의 이름이 장희진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그녀와 엮이게 된 상황은 그녀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그러다 그 이상한 남자손님과 마주하게 됐다. 윤재 덕분이라고 할 만한 건 없다.

  희진이 내가 자신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게 문제가 되려나? 굳이 숨기려고 한 건 아니다. 다만 윤재와 좋지 않게 헤어졌으니까 윤재라는 이름을 그녀 앞에서 들먹거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그걸 희진에게 반드시 말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런가? 그러잖은가? 그렇지? 그렇잖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한심한 놈이었나 참담한 기분이 든다. 아무런 결정을 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뒤로도 못 나가겠다. 어쩌지? 어떻게 한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연락을 할까? 오늘 윤재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었다. 행복한 단꿈에 젖어 앞으로 그녀와 보낼 좋은 시간을 상상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 연락을 하자. 윤재가 걸리지만 어쨌든 끝난 사이잖아. 희진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자고. 아, 머리를 너무 많이 썼더니 피곤이 몰려오고 급하게 졸음이 온다. 한숨 자고 맑은 정신으로 희진에게 전화를 걸자. 아, 졸려. 아무리 버텨도 눈이 저절로 감긴다. 전화하는 거야. 한숨 푹 자고.

  헉, 지금 몇 시야? 눈이 떠졌다. 얼른 시계를 본다. 이런, 밤 12시가 다 됐잖아. 이렇게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 자버린 거야? 이 시간에 연락을 할 수도 없고. 결국 오늘 전화를 못 하는구나. 아, 이게 뭐야? 주근호, 이게 뭐하는 거냐고? 언제부터 이런 바보가 돼버렸냐고?! 내일은 반드시 희진에게 연락을 하는 거다. 알았지. 꼭이야, 꼭. 더 이상 미루지 말자. 그러다 영영 연락할 기회를 놓쳐버릴 거다. 내일은 연락하는 거다. 내일, 반, 드, 시!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맨위로맨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