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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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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징크스 12
작성일 : 19-10-24     조회 : 352     추천 : 0     분량 : 5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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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사흘째.

  전화한다고 해놓고 연락 한 번 못한 채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라도 기다리다 열 받았지 싶다. 이제 와서 어쩐다? 시간이 이만큼 흘러서 대뜸 연락하면 받아주기나 할런지. 그래, 직접 편의점으로 가서 말을 전해야겠다.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면 해결 못할 일이 어디 있겠어.

  집 앞 편의점에 가는데 오늘처럼 제대로 차려 입고 가긴 처음이다.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날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멀리서 편의점이 보일 정도 거리에 도달했을 때 골목 안으로 황급히 숨어들었다. 분명히 윤재였다. 윤재도 날 봤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니 일정한 보폭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날 봤다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을 테니 보진 못했겠지. 하필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하고 많은 시간과 장소 중에 이렇게 마주치다니.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지금 지나가는 거냐고.

  최대한 자세를 낮춰 힐끔, 거리자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윤재도 누군가를 보더니 다급하게 어딘가로 숨는 게 아닌가. 처음엔 희진을 본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윤재가 있던 자리를 지나가는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도 윤재를 얼핏 보긴 했는지 잠깐 두리번거리며 윤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어떤 상황이지? 윤재가 왜 사람을 피하지? 결국 편의점에 들르지 못했다. 윤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희진이 거기서 일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기다리다 만날 생각인 거야? 결국 오늘, 찾아가지 못했고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윤재랑 함께 있다 전화를 받을지 모르니까.

  나흘째.

  하루 종일 윤재를 보고 피해야 했던 내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나도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윤재를 피했겠지. 떳떳하다면 그런 행동은 나오지 않았을 거다. 윤재와 희진이 이미 헤어진 상태니까 불륜은 아니다. 하지만 윤재의 얘기를 통해 희진을 알아보고 이렇게 만나게 된 거다. 여차하다 전화번호를 달라는 얘기까지 꺼냈고. 아무래도 내가 윤재의 과거를 이용해 여자친구를 사귀려 하는 것 같아 그게 죄책감으로 느껴지나 보다. 애초부터 그런 생각으로 접근한 게 아니다. 편의점에서 그 사건만 없었다면 말을 나눌 기회조차 없었을 터였다. 나는 떳떳해야 한다. 마음에 켕기는 게 없다고. 그런데 전화번호까지 받아놓고 왜 전화를 못하니? 왜 말을 못해? 왜 못하냐고?

  정직이 최선이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게 정답일까? 윤재가 휴가 나와서 희진을 찾아보려 했다는 대화가 떠오르자 그랬던 마음이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윤재가 희진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면 어쩌지? 이미 둘이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오늘도 답이 안 나온다. 그래, 하루만 더 내 자신에게 시간을 주자. 내일도 이런 상태이면 정말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겠다. 하염없이 생각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 인생에서 이렇게 주저하는 나 자신을 처음 본다.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닷새째.

  오늘은 정말 큰 마음 먹고 희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을 했다. 모든 일이 다 들통 나도 내가 비난받을 일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었으니까. 너무 일찍 전화하면 실례될 것 같고 아침에 영어회화 수강하러 다닌다고 했으니까 적당히 점심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려고 했다. 대강 언제쯤 전화하자고 적절한 시간을 가늠하는 중이었는데 윤재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늘 볼 수 있겠냐고. 내일 복귀하는데 그 전에 날 보려고 일부러 시간을 냈단다. 이런, 난데없이 심장이 쿵, 쿵, 울린다. 난 잘못한 거 없다니까! 이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다.

  동네 가까운 데서 보자고 하는 걸 굳이 멀리 있는 술집으로 가자고 우겨 내가 원하는 대로 약속장소를 잡았다. 내 단골 중 하나라면서. 희진에게 나랑 윤재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좁은 동네에서 언제 어떻게 마주칠지 모르니까. 술집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윤재는 휴가 나와서 한 일들을 기분 좋게 나열한다. 군대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한다. 나는 윤재가 하는 얘기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며, 안주가 나오면 안주를 열심히 먹어대고 술이 나오면 열심히 술을 마셨다. 윤재가 ‘오늘 주병장님 술이 많이 고프셨군요,’ 라며 바로바로 잔에 술을 채운다.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왔을 즈음 윤재가 희진의 이름을 꺼냈다. 혹시 술기운에 내가 생각 없이 그 이름을 언급한 게 아닌가 하고 뜨끔, 했지만 분명 윤재가 먼저 꺼냈다.

  “이제 정말 정리해야겠다 싶어요.”

  “어, 그래?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어제 동네 골목을 지나다 희진이 단짝친구를 봤거든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한쪽으로 숨었어요. 피하게 되더군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희진이한테 못할 짓을 하긴 했구나, 라고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됐어요. 정은이라는 그 친구는 희진이랑 많이 친해서 함께 어울리기도 했어요. 태어나서 누굴 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희진이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대상이겠어요. 앞으로 상종 못할 아주 나쁜 인간이겠죠.”

  윤재는 술이 꽤 취했는지 점점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낸다. 술이 거의 떨어질 즈음 조금 울기도 했다. 희진과 내가 만난 얘기를 어떻게 꺼내볼까 하고 눈치를 봤지만 그가 취해가는 모습에 그 말을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끝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윤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엿새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윤재에게 전화를 했다. 왜 희진이 아니라 윤재에게 전화를 한 건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아마 윤재가 부대로 복귀하기 전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제 상당히 취해서 아직 일어나지 못했을라나? 이미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집을 떠났을 수도 있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가족들이 마중 나가냐고 묻고 가족들이 같이 가지 않으면 버스 정류장에 나가 배웅하겠다고 전했다. 나도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거겠지.

  정오가 다 되어가는 즈음 윤재에게서 오는 전화가 울린다. 가족들 모두 일이 있어서 혼자서 짐 챙겨서 나가는 중이란다. 그게 그렇다. 첫 휴가 때는 안쓰러운 마음에 온가족이 나서서 배웅을 한다면, 말년 휴가 때는 여러 번 휴가를 거쳤고 이제 곧 제대도 하니까 가족들이 그다지 챙기지 않게 된다. 나도 말년 휴가 나와서 거의 혼자 지내다 부대로 복귀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왠지 다른 사람 같다. 부대에서 자주 봤던 모습인데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생경스럽다. 내가 마중을 나오니 나름 감동한 모습이다.

  “주병장님, 이러실 것까진 없는데. 가는 길까지 배웅을 나와 주시고. 어제 숙취로 고생 안 하셨어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느라 애 먹었습니다.”

  “어, 나도 많이 힘들었어. 우리 어제 꽤 마셨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제대하면 꼭 찾아뵙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나도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답했지만 그때까지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윤재가 부대얘기를 두서없이 건네는 동안 희진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위해 틈을 봤다. 아차, 그만 윤재가 탈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재는 그 버스를 보고 곧바로 버스카드를 찾기 위해 지갑을 꺼내 뒤적였다. 버스카드를 찾아 집어내면서 다른 것도 꺼내든다. 희진의 사진이다.

  “이거 아직도 갖고 있었네요.”

  이야기를 꺼낼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버스야 다음에 오는 것 타면 되고.

  “저 대신 처리 좀 해주세요.”

  나한테 사진을 쓰윽, 내민다. 갑자기 허를 찔려 버렸다. 머리가 멍해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랐다. 버스 왔다고 내 앞에서 사진을 흔드는데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을 내밀어 사진을 받아들자 빠르게 거수경례를 하더니 버스 안으로 사라진다. 버스가 출발하고 난 뒤에도 얼빠진 얼굴로 손에 든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처리해 달라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에 희진의 사진을 들고 터벅터벅, 발길 향하는 대로 걸었다. 편의점 앞 길은 일부러 피했다. 이런 상태로 희진과 마주치길 원치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면서도 내가 발을 이끄는지 발이 날 이끄는지 알 수 없게 정신이 혼미했다.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 그게 밥 먹으라는 소리였는지 아님 어디 나갔다 오니라고 묻는 건지 헷갈린다. 침대에 걸터앉아 사진만 내려다 봤다. 이건 무슨 계시지? 정말 사진을 처리해 달라고 한 건가? 사진이 아니라 희진을 잘 부탁한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안다. 그저 그러길 바라는 내 마음이라는 걸. 윤재는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나 혼자 그렇게 원하는 쪽으로 치부하고 있다. 처리한다와 부탁한다는 어감이 확실히 다르다. 그걸 혼동할 리가 없지. 게다가 윤재가 희진과 나 사이를 알고 있을 리 없는데 어떻게 내게 희진을 부탁한다고 했을까. 윤재에게 미안하지만 않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바로 희진에게 달려가서 얼굴 제대로 마주하고 많이 보고 싶었다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을 거다.

  갈 사람은 가버렸다. 윤재는 그렇게 버스를 타고 홀연히 부대로 복귀했다. 결국 그에게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윤재를 보려고 해도 윤재가 제대한 후에야 볼 수 있겠지. 이제 윤재 생각은 그만하고 희진에게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희진에게 연락해서 무슨 말을 꺼낼까 고심하다 무심코 달력을 봤다. 등 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 내렸다. 맙소사, 일, 주, 일! 그랬다. 전화하겠다고 해놓고 일주일이 흘러버렸다. 믿겨지지 않는다. 희진의 전화번호를 받은 게 일주일 전이었다고? 일주일이나 지나서 연락하는데 좋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 어쩐다. 나한테 기회가 있기나 한 걸까? 괜히 혼자서 온갖 이것저것 잡생각에 빠져있다 일을 망쳐버린 게 아닐까 조급해진다.

  생각을 해야 해, 생각을. 어떻게 하지? 어쩌지? 전화만으론 그렇겠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해야겠다. 그냥, 사과하는 말만으론 약하겠지? 이벤트를 준비할까? 내 미안한 마음을 확연하게 보여줄 노력을 한다면 그녀가 받아줄 확률이 더 크겠지. 그래, 금방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그때를 노리자. 그나마 낭만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면 날 용서해줄 마음이 더 커지리라. 뭘 할까? 어떤 준비를 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래,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크리스마스마저 지나면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다. 제발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기를 바랄 뿐이다. 될까, 안 될까?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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