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크리스마스 징크스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10.24
  첫회보기
 
크리스마스 징크스 13
작성일 : 19-10-24     조회 : 341     추천 : 0     분량 : 5313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3.

 

  크리스마스 이브다. 우리 편의점 앞을 포함해 거리마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번쩍번쩍 빛이 난다. 하루 온종일 캐롤송이 들리지 않을 때가 없다. 대놓고 얘기해서, 크리스마스야 서양 명절이 변질 돼서 한국에 들어온 건데 왜 그렇게 다들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다. 뭐, 대수라고. 상업성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 그렇게 결론 내려야 맞는 말이겠지만, 사실 나 자신도 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주는 그 로맨틱한 낭만에 항상 들뜨곤 했다. 내 인생에서 행복하고 꿈같은 크리스마스만 보내왔다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거다. 그러지 못했으니 문제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울고불고 그 난리를 쳤는데 올해 크리스마스 또 이렇게 지낸다. 우울하고 답답하고 가슴 밑바닥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남들에겐 빛이 나는 크리스마스가 내겐 어둑하게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이젠 앞으로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무섭기까지 하다. 내년엔 얼마가 더 힘겨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려나?

  밖이 어둑해지면서 눈발이 하나씩 창밖으로 스치는 게 보인다. 오늘 함박눈이 내릴까? 그렇게 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겠네. 아주 염장을 지르는구나. 누구는 네모난 상자 같은 곳에 갇혀서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데. 그저,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랑 내일 크리스마스에 별 일 없이 무탈하게 보내길 기원한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이상한 손님이 와서 행패 부리고 가면 아예 바닥을 치는 상황이 될 거다. 그럼 거기서 헤어 나올 수나 있을 런지. 얼마 전 주인공이 심해 바다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영화를 봤는데 완전 내가 그 주인공 같겠지. 컴컴한 마음의 심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조금씩 산소를 잃어가는 상황. 아악, 상상만으로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하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크게 입을 벌리고 나를 빨아들이는 크리스마스 구덩이라니 꿈에 나올까 무섭다.

  아이고, 저 할아버지 눈 오는 데 나오셨네. 동네 쓰레기를 뒤지는 일명 청소부 할아버지. 한 번씩 지나가다 쓰레기통 옆에 앉아 쉬시기도 하시는데, 마음씨 좋은 우리 사장님도 이 할아버지한테는 냉랭하다. 아무래도 편의점 앞에 그렇게 죽 치고 앉아 계시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꺼림칙해서 피해가기 마련이고 편의점 영업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니까. 쓰레기 줍는 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없으신가?

  오늘도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으신다. 사장님은 벌써 나왔다 가셨으니 달리 얼굴 찌푸릴 일은 없겠고 난 별로 개의치 않는다. 조용히 있다 가시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날 좋은 일 하나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닐지. 거기다 크리스마스 징크스도 자꾸 마음에 걸리고. 내 어둡고 축축한 크리스마스 징크스를 깨기 위해 뭔가 착한 일을 해야 할 거 같았다. 순전히 그걸 증명할 아무 증거도 논리도 없는 내 혼자만의 이론이었지만.

  내 돈으로 채우고 야채호빵을 하나 꺼냈다. 종이에 잘 포장해서 밖으로 들고 나갔다.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은근히 추웠다. 그렇구나, 저 할아버지는 이렇게 춥고 눈 오는 날 밖에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죄송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 호빵을 멀거니 보기만 하셨다. 내가 재차 권하자 주름이 짙게 웃으시며 반갑게 받으신다. ‘얼굴이 예쁜데다 마음씨도 곱다,’ 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아진다.

  편의점 안으로 돌아와서 내다보니 맛있게 후후, 불어가며 드시고 계셨다. 추운데 안에 들어와 계시라고 하면 더욱 좋았겠지만 영업 중인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곤 한동안 바빠져서 할아버지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오늘따라 다 늦어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겠다고 들이닥치는 손님이 여럿 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편의점이 나름 호황을 누리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미리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준비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집 근처 편의점으로 서둘러 사러 오는 고객들.

  케이크가 팔려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와 진열을 해놓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문으로 다가오시는 게 보였다. 이전에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호빵 하나 드렸다고 친한 척 하시려는 건가? 뭘 더 달라고 하면 어쩌지? 갑자기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안이하게 선행을 베푼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할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내 앞에 봉투에 든 카드를 내밀었다.

  “어?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방금 어떤 총각이 와서 안에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어떤 총각? 혹시 주근호? 고개를 홱, 돌려서 밖을 보는데 바깥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눈발은 더욱 굵어졌고 길바닥 위로 눈이 상당히 많이 쌓였다.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가 앉으신다. 봉투를 열고 카드를 펼치자 각이 딱딱하게 진 글자체가 보였다.

  ‘희진에게

  나를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전화하겠다고 번호를 받아놓고 이제야 연락을 하다니 내 연락을 기다리느라 네 가슴이 까맣게 탔겠다. 아님 벌써 나를 잊어버렸겠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면 할 것이고 무릎 꿇고 빌라면 빌 의향도 있어.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지 않을래? 크리스마스를 너랑 꼭 같이 보내고 싶어. 오늘 저녁 일 끝나고 만나자. 지난 번에 갔던 치킨집도 좋고 소주방도 괜찮아. 너 원하는 대로. 시간 맞춰 기다릴게. 제발, 이대로 시작도 못하고 끝나게만 하지 말아주라. 부탁한다.

 근호 오빠가’

  글자들이 그렇게 적혀있다. 카드 위에. 크리스마스 카드에다 이렇게 길게 적는 사람이 있다니. 카드에 적힌 내용을 받아들이느라 한참을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읊었다. 주근호! 이 인간! 이제야 연락을 하다니! 밑도 끝도 없이 속에 갇혔던 응어리가 터져 나온다. 반가움보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어쩔 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밖을 내다보니 할아버지가 어딘가에 대고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근호 오빠 근처에 있어!

  다짜고짜 문을 밀고 나갔다.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본다. 방금 전까지 고개를 향하고 계셨던 방향을 보니 멀찍이 떨어져서 근호 오빠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 숨이 가빠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내 걸음이 그렇게 빠를 수 있다니 그때 처음 알았다. 근호 오빠는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내가 다가오는 걸 바라만 본다. 그 앞에다 그대로 손에 든 카드를 집어 던졌다.

  “지금, ······, 지금, ······.”

  흥분하니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제 와서 이러면 누가, 받아준대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쩌면 사고라도 났을까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 사람이 왜 그래요. 남 생각은 전혀 안 하나 보죠?”

  목소리가 떨리고 몸도 떨리고 기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변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말대답 할 기회를 주지 않고 뒤돌아서 그대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누군가 편의점 문 앞에 서 있어 바로 들어서진 못했다. 정말 대단한 타이밍으로 말보로 담배 때문에 한 바탕 했던 진상 손님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미운 놈은 미운 짓만 골라 한다고 어쩌면 나타나는 타이밍마저 이럴 때 나타나는지.

  문을 열고 들어서다 내 고함소리를 듣고 멈칫, 뒤돌아본다. 나랑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내 인생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경우는 참 드문데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올 수 있는 온갖 공격적인 에너지를 한데 뭉쳐 얼굴 위로 띄우고 뭘 쳐다보냐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발산했다. 통쾌하게도 내 서슬에 기가 질렸는지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바로 카운터 앞으로 오는 걸로 보아 다른 물품을 살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말보로 담배 맞죠?”

  그 사람이 말 꺼내기 전에 미리 물었다. 멀뚱히 나를 본다.

  “아님 다른 걸로요?”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간다. 입술을 간신히 떼어내 말을 뱉는다.

  “아, 아니, 말보로, 그걸로.”

  탁, 소리 나게 담배를 내려놓자 돈을 건넨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내 생애 이렇게 빠른 적이 있었나 싶게, 바로 잔돈을 집어 건넸다. 내 페이스에 적응을 못했는지 우물거리다 겨우 돈을 받아든다.

  “메리 크리스마스, 고객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되세요!”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이건 숫제 말로 하는 공격이다. 진상 고객은 뭔가 대답을 하려다 그만둔다.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보내라고 해준 것뿐인데. 그렇게 문을 열고 나선다. 쳇, 별 거 아니네. 그 손님이 나가고 나서 속에 쌓인 울분이 풀리긴커녕 더욱 뜨거움이 치솟아 오른다. 가만히 참고 있으려니 그걸 더 못 견디겠다. 그만 밖으로 나가서 근호 오빠한테 한바탕 쏘아줄까 했는데 이번엔 여우목도리 아줌마가 들어선다. 이 사람들이 아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서로 짜고 이러는지, 어째 반갑지 않은 고객들만 차례로 방문한다. 안 그래도 지난 번 두부 터진 일 때문에 마음에 앙금이 남았었는데 오늘은 건드리기만 하면 그냥 순순히 안 넘어갈 거라는 오기가 도진다.

  아줌마는 여느 때처럼 사지도 않을 거면서 진열장 복도 사이를 천천히 순시한다. 마치 물건이 제대로 놓였나 감시하듯이. 근호 오빠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몸에 열이 나고 숨이 가빠졌었다. 카운터 앞에 서서 억지로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순간 다 잊어버리고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기만 한다. 그저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거칠었던 숨이 겨우 가라앉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진정되듯하자, 이번에는 처량한 기분이 가슴을 슥, 베고 지나간다. 이게 뭔가, 신세 한탄이 이어졌다.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구나. 연타석으로 홈런을 두들겨 맞는 처량한 투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만 눈이 축축하게 젖어온다. 아, 진짜 잘하는 짓이다. 이젠 처량하게 울면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나 자아비판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줌마가 카운터로 다가온다. 오른손에 사각형 플라스틱 병 안에 담긴 커피음료를 들었다. 아줌마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직 울기 시작한 건 아닌데 처량한 기운이 여실히 밖으로 표출되어 얘가 왜 이러나 궁금해 하는 걸지도.

  처음엔 그 커피음료를 사려는 줄 알고 건네받아 바코드를 찍으려는데 얼른, 손을 뒤로 뺀다. 허망하게 내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멈춘다. 뭐지? 나랑 장난해? 아니, 불붙는데 기름 붓는 격도 아니고. 일단 가슴을 진정시켰다. 최대한 고객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거다.

  “계산하시게요?”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역시 물건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내게 잘 보라는 듯이 커피음료를 눈앞에 들이민다. 도대체 이 여자 뭐하는 거야? 안 그래도 지금 기분 무지 상했는데 슬슬, 참을성에 한계가 온다. 아주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그러는지 작정을 하고 기분을 긁는다. 그러자. 크리스마스 이브, 어디 한 번 제대로 보내 보자. 이것들아, 다 덤벼. 다 덤비라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맨위로맨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