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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용사
작가 : NewtDrago
작품등록일 :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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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흐릉달
작성일 : 19-10-28     조회 : 217     추천 : 0     분량 : 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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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이름, 언데드의 도시 흐릉달

 

  흐릉달은 터가 좋다. 정확히 말하면 좋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좋아졌었다. 즉, 용사가 도시를 가꾸며 살던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단 뜻이다. 이제는 거의 풍화되어 흩어졌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인간의 흔적을 쫓으며 용사는 마을을 탐색 중이다. 머릿속 기억과 현 풍경을 비교하며 걷기를 한참. 마을 외곽을 빙 두르는 메마른 수로를 발견한다.

 

  언데드가 도시를 점령하고, 사기邪氣가 침범해 토지는 황폐화됐다. 땅이 기운을 잃으니 식물이 자라지 않고, 식물이 자라지 않으니 자연스레 지하수가 고갈되고, 물이 마른다. 물이 없으니 동물은 이곳으로 발길을 향하지 않는다. 흔적을 보면 오백 년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백 년은 이 모습 이대로 방치되었을 거다. 그 덕에 잘 정비돼 있던 수로는 무너졌고, 도로는 쩍쩍 갈라졌으며 성벽은 허물어졌다.

 

  수로를 따라 걷다 보니 성문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작은 동산을 오르듯 무너진 성벽을 타고 오르자 버석거리며 부스러지는 농지가 보였다. 어디까지 메말랐는가? 그 크던 드라흐릉 강마저 그저 깊은 협곡처럼 보인다. 용사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도시 재건 계획을 차근차근 그려나간다.

 

  이 망가진 도시를 왜 재건하려 드냐고 그에게 누군가가 묻는다면, 용사는 분명 좋은 터가 될 수 있는 여건 때문이라고 말 할 것이다. 이곳에 처음 도시를 건설했던 이유하고 같다. 흐릉달을 수복한다면 그에게 있어서도 인류에게 있어서도 분명 좋은 거점이 되어줄 것이다.

 

  드라흐릉은 이제 물이 흐르지 않지만 여전히 커다란 물길이니까 수원을 이어주기만 하면 다시 강으로 거듭날 수 있다. 비록 이곳저곳 무너졌지만 그 틀만큼은 유지하고 있는 도시의 기반 시설도 인프라를 형성하는데 이용하기 좋다. 도시 재건에 필요한 자원은 도시와 끝자락이 맞닿은 안드리아 산맥과 봉우리를 넘으면 얼마 안 가 보이는 바다에서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으니 도시 수복 계획은 몇몇 개를 제외하곤 그저 과거의 내용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용사는 이 일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우선 한 일은 시체를 치우는 것이다. 본래 장례를 따르면 매장해야 옳지만, 그래서야 언데드가 근절되지 않는다. 거기에 이미 손상될 대로 손상된 시체들. 차라리 자국도 안 남게 없애버리는 게 낫다. 흐릉달에 있는 시체를 모두 정화하고(불로 태웠다.) 그 가루를 한데 모아 공동묘지에 매장한 다음, 종이를 만들기 위해 움직인다.

 

  도서관에 있던 책과 종이는 살짝 손을 대자 부스러졌고 그건 기름을 먹였던 지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용사는 작도에 필요한 종이와 탄炭을 만들 생각으로 산맥을 오른다.

 

  보통 섬유질이 많은 식물은 산에 많지 않지만 그로 번 시 나무(파초와 비슷한 가상의 나무)는 다르다. 자생력이 좋아서 평야든 산이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펄프(종이섬유)를 뜨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으래 섬유가 많은 식물은 저수가 잘 돼서 주변 토지에 물이 풍부하다. 뼈칼로 힘껏 땅을 파니 세 네 번 만에 셈이 솟았고, 그 구멍을 넓히니 봇물 터지듯 경사면을 따라 콸콸 흘러내렸다. 그걸 한데 모아 돌로 길을 만들어 흐릉달에 임시 수원을 연결한다. 언데드는 물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곳은 엄연히 도시다. 작업을 하는데 물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언제고 찾아올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작은 물길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숯은 어차피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할 거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아무 침엽수나 골라도 된다. 그로 번 시 군락 옆에 자란 팔름(참나무와 비슷한 가상의 나무)을 잘라, 양 어깨에 통나무를 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용사는 정보, 그러니까 지식과 지혜를 소중히 여긴다. 돌과 나무가 물적 자원이라면 지식과 지혜는 심적 자원이다. 암만 가지고 있어도 손해 볼 일 없고, 언젠가 쓰게 되는 것이 심적 자원이다. 그것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작도를 할 마음을 먹었고,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도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도는 흐릉달을 수복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건 중 하나였다. 작도를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을 지형 그리고 지물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그 와중에 커다란 수원을 찾는다면 강에 물을 댈 수도 있으며, 최종적으로 작도를 위한 여행은 결국 그의 궁극적인 목적인 인간과의 만남을 가져다 줄 확률을 높인다. 그것은 곧 작지만 분명히 타오르는 희망의 촛불이 되어 용사가 나아갈 길을 밝히고, 마음을 굳세게 만들 촛농을 녹인다.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즐겁게 작업을 시작한다.

 

  그 굵은 통뼈로, 용사는 어렵지 않게 섬세한 작업을 해나간다. 누군가 봤더라면 용케 그런 일을 한다며 놀랐을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종이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장치다. 숯을 만드는데 생목을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 팔름을 꼬챙이에 걸고 불을 피워 말린다.

 

  그것이 마르는 동안 과정을 간략화하기 위해 그로 번 시를 가루가 될 정도로 잘게 쪼갠다. 이러면 섬유가 흐물흐물해지는 시간이 짧아진다. 그 가루를 펄펄 끓이고 널찍한 잎으로 만든 간이 뜰채로 섬유와 이물질을 걸러낸다. 이물질은 버리고 섬유를 적당한 넓이, 적당한 두께로 고르게 핀 뒤 햇볕 아래에 말리면 조악한 종이가 완성된다.

 

  그것을 너는 동안 바싹 마른 팔름 통나무를 뼈칼을 이용해 장작으로 만들고 하나하나 구워서 숯을 만든 후 숯을 다시 분쇄해서 고운 진흙과 섞고 화덕을 이용해 단단해지도록 구웠다. 완성된 연필심과 종이를 보면서 용사는 흡족해했다.

 

  “음, 나쁘지 않군.”

 

  별다른 장비 없이 만든 것 치곤 꽤 준수한 모양새였다. 그는 시험 삼아 성경의 가장 첫 구절을 지도의 토대가 될 첫 종이에 첫 연필심으로, 왼쪽 상단에다가 고대어로 기재했다. אֵלבָּרָאעוֹלָםʽôwlâm’êlbârâʼ 그리고 그것을 따라 읽는다.

 

  “올람엘브아르.(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지도에 첫 점이 찍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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