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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지도를 그린다. 축적은 자신이 걸은 한 걸음을 지도 위 0.5mm 정도로 이용한다. 실제 도량형으로 따지면 33.33cm 정도다. 뼈만 남아 부피가 줄었다지만 그 거구가 어디 가진 않는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인간이고 그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지도를 완성시키니 수월하게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동안 만든 지도는 흐릉달 지역 일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도에 그려진 흐릉달의 모습은 크게 변한 모습 없이, 기억 속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모습에 용사는 그만 실소했다. 그리고 대로를 걸으며 보았던 광경을 회상한다.
아무리 잘 닦은 길이라도 사람이 이용하지 않으면 땅이 다져지지 않고 결국엔 수풀이 우거져 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런데 비록 손으로 관리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곳을 이용하며 땅을 굳게 다진 이, 아니 이들이 있었다.
녹이 슬고 구멍 뚫린 체인메일을 입고, 이가 나간 창칼을 손에 든 채 여전히 대로순찰을 돌고 있는 이들. 해골마에 오른 언데드 기사 둘과 그 뒤를 따르는 해골병 여섯이 바로 그들이다. 언데드가 되고 분명히 이지를 상실했음에도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그들은 대로를 따라 흐릉달 일대를 돌아다녔다.
어기적어기적 순찰을 도는 듯한 그들을, 용사는 하루 꼬박 따라다녔다. 그들의 몸에 나 있는 처절한 전투의 흔적들. 어찌나 세게 물렸는지 뼈에 사람의 잇자국이 나 있고, 갑옷은 무기가 아닌 농기구에 꿰뚫린 흔적이 대다수다. 몇몇은 뼈가 마치 짓이겨놓듯이 부러졌다.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뼈가 부러질 수 있는지, 용사는 아무런 방법도 떠올릴 수 없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마른 핏자국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더덕더덕 붙어 있거늘, 그들의 병기에 무언가를 벤, 반항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용사는 어느덧 지도를 그리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나고, 그는 직접 축복을 진행하며 이 경악스러운 죽음의 굴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주었다. 곱게 빻은 여덟 명 분의 뼛가루를 땅에 묻으며 용사는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나를 대신해 이곳을 지켜준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어리석고 못난 이를 주인으로 섬기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그곳에서 편히 쉬거라.”
용사는 울고자 하였으나 울지 못했다. 성대가 없어서 곡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뼈다귀로 이루어진 몸은 야속하게도 위로의 말만 무미건조하게 내뱉을 뿐이었다.
“그대들은 어쩌자고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웠느냐. 그 큰 두려움을 어찌 이겨냈느냐. 아무도 그대들을 탓하지 못했을 것이거늘, 어쩌자고 죽어서까지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다 무너져버린 도시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냐.”
용사는 그들의 흔적으로부터 흐릉달의 마지막 참상을 떠올린다. 묘지의 시체가 언데드가 되어 일어나고, 언데드에게 죽은 사람들이 또다시 언데드가 되어 파도처럼 몰아쳤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도망친 이들도 있을 테고, 그 가족마저 내팽개치고 달아난 이들도 있을 테지. 하지만 이 여덟의 용사는 끝까지 남아 시민들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윽고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죽어,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서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할퀴고, 잇몸이 으스러지도록 물었을 것이다. 땅을 찍던 농기구가 그들의 몸으로 날아들어 뼈를 부러뜨리고 결국 그들을 하나 둘 죽음으로 몰아갔겠지.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결코 시민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다.
용사는 세 달 동안 굽히지 않았던 몸을 그들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굽힌다. 성호를 긋고, 무릎 꿇어 간절히 빌며 그의 신을 찾는다.
“주여, 이들의 영혼을 거두소서. 소인이 눈을 뜨기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이 이곳을 지켰나이다.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이들을 이끌어주소서. 평온을 주소서. 안식을 주소서. 이들, 영웅들은 의로운 이들이니, 저의 죄는 잊지 마시되 이들의 죄를 잊으시고 용서하소서. 당신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나이다.”
짧은 고별기도가 끝나고, 용사는 영웅들의 모습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다시금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한 회상을 마치고, 용사는 지도를 들고 표식을 살핀다. 그의 걸음이 어느덧 바닷가에 다다라 있었다. 용사는 분명 앞으로도 그들을 회상하며, 거론하고, 추모하며, 기억 속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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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 내가 왔소.”
용사가 부른 노인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라 했지만 분명 용사보다 어린 나이다. 하지만 그는 늙은 몸으로 죽어 아직까지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언데드였다. 노인이라는 것이 늙음을 뜻한다면 그의 육체만큼은 확실한 노인이다.
그 연륜만큼이나 그의 의지는 또렷하며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용사가 노인을 두 번째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용사는 지도를 만들던 도중 우연히 그와 만났다. 그를 통해 용사는 자신이 모르는 역사 이야기를 듣고자 했지만 그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한다며 낚싯대와 낚시 바늘 그리고 미끼를 요구했다. 이야기를 하는 데에 낚시는 제격이라면서. 그러면서 노인은 언데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허허롭게 웃었다.
용사는 언데드가 되어도 이성을 유지할 정도로 선하고 강고한 그의 정신에 보답하고자, 그리고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흔쾌히 흐릉달까지 돌아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찾아다가 대를 만들고 철을 가공해 낚싯바늘을 만들고, 땅에서 지렁이를 찾아 미끼를 마련해 오던 참이다.
“흘흘, 자네 왔는가?”
“여기, 낚싯대와 미끼를 가져왔소이다.”
노인은 낚싯대를 받자마자 미끼를 달아 바다에 휙 던졌다. 파도를 맞아가며,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낚시를 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용사도 노인처럼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제야 노인의 입이 열렸다.
“젊은이가 노인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구먼.”
“고기를 낚아봐야 먹지도 못할 테니, 그것이 참 아쉽소. 낚시로 세월만 낚아야한다니, 그 무슨 억울한일이외까?”
“이미 죽은 우리잖은가, 굳이 살아있는 것을 탐한들 바뀌는 것은 없네.”
역시, 노인도 언데드답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증오와 극심한 공복을 느끼는 모양이다. 시달린다―――― 라고 표현하기에는 그는 그 느낌에 초연한 듯 보였다. 용사가 그 말을 듣고도 조용히 낚싯대 끝을 바라보고 있자 노인은 다시 말했다.
“그래, 이 노인장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지? 그런데 말일세, 그 전에 내 한 가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물어봐도 되겠는가?”
“무엇이오? 얼마든지 대답해드리외다.”
노인은 그 말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달그락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을 하나하나 골라 내뱉듯 띄엄띄엄 말했다.
“자네······ 는, ······아니지. ······자네는 누구······인가? 아니야, 이게 아니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게 옳겠습니까?”
그건 이미 정답을 짐작한 자의 물음이었다. 용사는 짧게 대답했다.
“용사.(אֲרִיאֵל’ărîy’êl)”
그리고 고대어를 알아들은 노인은 고개를 주억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