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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자신을 그레이스라 소개했다. 살아있을 적에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백 년의 세월은 흙을 파먹던 무지렁이 농사꾼을 뛰어난 지식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용사 스스로가 오백 년을 살았으니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음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첫날부터 용사의 기대를 아득히 넘은 정보를 제공했다.
“저는 육체를 잃고 잡다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더 이상 먹을 필요도, 잠 잘 필요도 없어졌으니 남는 게 시간이었죠. 몸을 쓸 필요가 없어지니 공부가 취미가 되더군요. 그런데 지식을 가르쳐줄 선생이 없으니 결국엔 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계 각지를 돌면서 책을 모았고 그렇게 모은 책들을 세계각지의 다른 도서관에 잘 놓아두었습니다.”
“그 책들이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주 훌륭한 일을 해주셨어요. 제가 직접 가지러 가겠습니다. 어디에 얼마큼이나 모으셨습니까?”
“대략적으로나마 책이 있는 장소와 개수를 지도에 표기해두겠습니다. 약도를 그려 가시지요. 꼭 용사님께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괴물들을 조심하세요. 두개골이 바스라지면 아무리 언데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용사도 잘 아는 사실이었으나 걱정해주는 그의 마음을 느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용사는 그레이스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긴 시간을 살아온 그다. 오히려 용사보다 이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레이스일 것이다.
두 사람은 기탄없이 서로의 의견을 말하며 상세한 계획을 세웠다. 하늘이 어정쩡한 보라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간략하게 계획에 틀이 잡혔고, 용사는 쉬는 시간을 가지며 그레이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레이스, 나는 이곳을 복구하게 된다면 그대에게 성주를 맡길 생각입니다.”
그레이스는 당황하여 물었다.
“어찌 용사께서 직접 다스리지 않고요? 당신께선 저보다 통솔에 능하십니다.”
“그래서예요. 나와 당신이 앞으로 향해야 할 곳은 아득히 먼 곳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규합하고, 다시 그 풍족했던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기껏 수복해놓은 성을, 이 중요한 도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순 없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통솔해야만 하고, 나는 그게 그레이스, 그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는 용사의 말에 납득했다. 이곳, 흐릉달은 현 인류의 구심점이 될 중요한 거점이다. 용사의 말처럼 아무나에게 통솔을 맡겨도 될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용사가 성에 묶여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인력 낭비가 된다. 그러니 그 또한 자신이 성주의 자리를 받는 게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곳이 안정화되고 믿을만한 자를 선발해낸다면 제 재량으로 성주의 자리를 반납하고 그대를 따르는 여행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무례를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성주 자리를 받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군요. 당신 같은 인재를 놀려둘 생각은 없으니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꼭 그래주셨으면 좋겠네요.”
표정을 바꿀 순 없었지만, 둘은 마음이나마 웃어 보였다.
“그럼 성주직도 허락했겠다, 임명식과 함께 간단하게나마 축하라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봐야 술도 못 마시는 몸인 걸요.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임명식까지야······.”
그레이스는 생전 처음 있는 일이 쑥스러워서 두개골을 긁적인다.
“뭐 어떻습니까. 사람은 원래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물이거늘. 기분이라도 내는 거지.”
용사는 그레이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창고에서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오백 년 넘게 숙성시켜놔서 거의 썩었다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녹이 슨 은잔에 그것을 따르며 높이 들어올린다.
“자! 건배합시다! 건배!”
“거······ 건배.”
입에 털어넣은 포도주가 골반을 타고 줄줄 흐른다. 술 맛을 알 수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그그럼에도 밤은 즐거운 축제 분위기를 냈다. 그렇게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지새우니 금방 아침 해가 밝았다. 용사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후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이곳에서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대를 믿으오, 그레이스 성주.”
그레이스는 전날 용사가 만들어준 은패를 꾹 쥔다. 이것은 용사가 준 믿음의 징표다. 그는 그것에 보답하고자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이 그레이스 하이룽호른 1세. 믿고 맡겨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이룽호른은 흐릉달의 드높은 자라는 뜻으로, 이 또한 용사가 전날 밤 그레이스에게 내려준 새로운 이름이다.
“그럼 근시일 내에 다시 보길 기원하겠소.”
커다란 배낭을 하나 걸머진 용사는 그렇게 점이 되어 사라졌다. 또다시 혼자 남은 그레이스는 용사를 배웅한 잔해더미 위에서 폐허가 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굳게 다잡는다. 가장 먼저 무얼 해야 할까? 어젯밤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레이스, 그 밖에 아는 사람이 없고, 그렇기에 그 밖에 할 수 있는 이가 없는 일. 지난 오백 년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