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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눈을 뜬다. 그에겐 앞을 보게 해줄 눈도 그 시야를 덮을 눈꺼풀도 없지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눈을 떴다는 걸 안다. 눈이 뜨였다는 게 더 알맞다고 생각하며, 그는 아르콘과 만났던 순간을 기억 속에 되뇐다.
그의 두 눈엔 어느새 안구처럼 둥근 모양의 푸른 불길이 일렁였고, 서늘한 안광이 정면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회색 하늘. 마치 오랜 잠에서 일어난 기분이다. 몽롱함에 부스스 일어나자 그를 바라보는 네 쌍의 시선이 느껴졌다.
“용사…….”
겁을 모르는 것 같던 괴물들이 기세에 압도당해 몸을 떨었다. 앉은 자세로 머리를 털던 그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자 괴물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본능이 도망쳐야 한다고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그들은 본능에 충실하게 각자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넷 모두를 잡을 순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검은 눈물은 어느새 말라서 석영처럼 단단히 굳었다. 갈라진 뼈 사이사이에 파고든 눈물은 괴이한 문신처럼 보인다. 그것이 부스러지던 뼈와 뼈 사이를 봉합하듯 잇고 있다. 두 팔과 다리 또한 그것과 같은 성질로 보이는 물질로 새로이 자라나 있었다.
용사는 달라진 몸에 적응하고자 제자리 뛰기를 하고 주먹을 몇 번 쥐었다폈다 해보더니 몸을 기울여 단번에 달려 나간다. 전력을 다한 뜀박질에 바람이 그를 앞서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밀려난다. 그러자 쾅 소리와 함께 공기가 찢어발겨지고 거의 같은 순간에 안드라의 뒤를 잡았다. 경악한 안드라의 얼굴에 그 추진력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내려찍자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가 무너져 내렸다. 니알라도 졸트도 마그뉴웍시도 똑같은 방법으로 제압당해 몸이 무너지고, 용사의 손에 질질 끌려 한 곳에 쌓였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입을 가장 먼저 복구시킨 안드라가 동료의 밑에 깔려서 소리쳤다. 그 삼류 악당 같은 대사에 용사는 절로 헛웃음이 나와서 웃고 말았다.
“그래, 너희는 원래 그런 존재이거늘. 악을 범하도록 만들어진 탓에 그것이 악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가련한 존재들아. 스스로의 마음을 더럽히고 그 몸으로 죄를 행하는 너희들을 괴물이라 부르지 않으면 그 무엇을 괴물이라 부르겠느냐. 너희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듯이 나도 너희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번엔 두 번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없도록 무저갱 저 끝자락에 처박아주마.”
“푸하하! 인간인 네가 무슨 수로? 신을 등에 업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너는 절대 지옥문을 열 수 없어. 그리고 절대로 우리를 죽일 수 없어. 여기서 약속하마. 나는 몇 백 번이고, 몇 천 번이고, 몸이 복구되는 대로 인간을 죽일 거다. 너의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부숴버릴 거라고!”
악에 받쳐 소리치는 안드라의 모습은 괴물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추했다. 반성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용사는 오히려 마음을 편안히 먹을 수 있었다. 그는 괴물 여섯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곤죽을 쌓아올리고 그 앞에 앉아 기도했다. 그러자 천천히 하단전에서부터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영혼의 세계에서만 모습을 보이던 그것들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다.
첫 번째 배꼽 아래에 하단전 즉, 하천. 육신을 다스리는 하천을 완성했을 때, 용사의 육체는 인간으로서 완벽해졌다. 환골탈태를 이루며 부정을 씻어내고, 그의 몸은 인간의 극한에 닿았다. 그러자 인간 중에 아무도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두 번째 명치에 중단전 즉, 중천. 심신을 다잡는 중천을 완성했을 때, 용사는 평온함을 얻었다. 흔들림 없는 마음과 정신은 하천에까지 닿아 그를 곧 올곧게 만들었다. 어떠한 형태의 현혹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선이라는 것의 개념을 깨달아 그것을 몸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정수리에 상단전, 즉 상천. 이번에 영혼을 이끄는 상천을 완성하자 그는 격을 넘었다. 윤회하는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선택할 권리를 얻었고, 육신과 심신은 영혼에 감응해 그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바뀌었다.
검은 눈물은 그가 선택한 고행의 결정結晶으로 본래 그가 뛰어넘을 수 없었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인간으로서 한계를 넘었어야 할 그가, 인간의 육신을 던져버리고 죽지 않는 망자가 된 바, 하늘로가 아닌 죽은 자의 세계로 그 길이 이어졌다.
곧 두개골에까지 불이 들어오자 화마는 온몸을 집어삼키며 커져간다. 그러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한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혼에 드리우는 차가운 기운에 괴물들은 발작적으로 몸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지만, 몸이 멀쩡하지 않은 그들 모두 도망치지 못했다.
바닥에서부터 살점이 부글부글 끓으며 올라오고, 거기에 새빨갛게 충혈된 커다란 눈이 돋는다. 그 눈이 희번뜩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괴물들에게 가 멈췄다. 그러자 삼지창을 든 악마 두 마리가 나타나 문을 만들기 시작한다.
피를 발라 살점을 치덕이고 그것을 벽돌 삼아 테를 두른다. 벽돌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것은 이마에 뿔이 돋은 갓난아이들. 응애응애 우렁차게 울던 아이들이 살덩이에 찌부러져 육편이 되어 벽돌의 틈을 메운다. 모든 것이 살과 피 그리고 뼈와 내장으로 이루어진 문은 바닥을 향해 떨어지듯 덜컹이며 활짝 열렸다. 열린 문에 보이는 그 검은 공간에서 귀곡성이 울리고 구원을 바라는 수많은 손이 뻗어 나와 허공을 훑었다.
간신히 입을 복구한 졸트가 외쳤다.
“안 돼! 제발! 용서해줘! 다시는 인간을 죽이지 않을게! 그냥 산속이든 어디든 외지에 처박혀서 조용히 살게! 제발! 지옥은 싫어! 두 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부탁이에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사님. 자애로운 용사님, 제발.”
그러고는 진심으로 뉘우친듯 흐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임을 용사는 알고 있다. 안드라는 말도 안 된다며 발버둥을 치다 수많은 손에 붙들린 채 지옥문을 넘었고, 발로르와 네프릭토스는 변변한 반항조차 못하고 살점에 파묻히듯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용사의 발밑을 기던 졸트 또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손에 낚아채였다. 마그뉴웍시는 용사와 신을 조롱하다 악마의 삼지창에 피떡이 되어 스르르 녹아들었다.
그것을 앉은 자세로 가만히 관망하던 용사를 향해, 니알라가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겹게 내장을 밧줄 삼아 버티며 말한다.
“이대로 끝일 거라 생각해? 웃기지 마! 너는 불행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여섯한테서 고작 스무 명도 지키지 못한 녀석이 무슨! 너의 그 비루한 힘으론 한 줌의 목숨조차 구원하지 못해! 고작 신의 힘에 취해 날뛰던 망아지 주제에 제가 잘난 것처럼 날뛰더니 꼴좋다! 아직 우리는 102명이나 남아 있다고! 지옥에서 지켜볼 거야! 네가 처참히 무너지는 그 모습을 보고 실컷 비웃어주마! 하하! 하하하하!”
미친년처럼 웃던 니알라조차 반으로 찢어진 채 지옥에 던져지자 살점은 녹아내리듯 사라졌고 용사의 몸을 태우던 불꽃이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꺼졌다. 괴물들을 전부 처리한 용사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묻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괴물들에게 당한 열여덟 구와 목이 부러져 두개골이 손상된 한 구를 제외한 나머지 한 구가 코로 깊숙이 안개를 호흡하더니 좀비가 되어 상체를 세운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는 용사와 눈이 마주치자 곧 사태를 이해한 듯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 이봐! 괴물들은, 괴물들은 어떻게 됐지? 생존자는 없는 거야?”
용사는 홀로 남은 그 좀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심장이 뭉개진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