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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난생 처음 밭을 보았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언데드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의아함이다. 언데드에게 생태라는 게 있을 리는 없지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스에게서 그는 어떠한 경계심과 생명력을 느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천적을 경계하는 듯하다.
‘살아 있는 것 같아.’
언데드는 생기에 민감하다. 그리고 그레이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활력은 생기와 정말이지 흡사했다. 그의 언데드로서의 본능이 저것을 먹어치우라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속삭였다. 청년은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욕구에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그레이스에게 다가간다.
“자네는 누구지? 그 배낭은 어디서 난 건가?”
쇠스랑을 높이 쳐든 그레이스는 위협적인 태도로 묻는다. 단숨에 두개골을 내리칠 것 같은 그 모습에 청년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언데드가 자세를 바로 잡자 그레이스도 조금이나마 경계를 풀었다. 그가 등에 지고 있는 것은 용사의 가방. 최소한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청년은 용사와 비슷한 어투로 말하는 그레이스를 보며 그가 자신이 찾던 인물임을 확신했다.
“당신이 그레이스 하이룽호른인가요?”
“내 질문에 먼저 답하게. 자네는 누구고, 그 배낭을 어디서 얻었지? 세 번 묻지 않을 걸세.”
“저는…….”
순순히 대답하려던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잊었음에 놀라고 말았다.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분명 수도 없이 불렸던 기억은 있는데 그 이름이라는 것 하나만 쏙 빼간 듯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이름이 뭐였지.’
부모님이 그에게 사랑의 의미를 담아 지어주었다는 그 이름. 아저씨의 입을 통해 듣던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손이 닿지 않는 저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 있다는 것은 아는데 입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청년은 당황스러움을 느꼈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했다.
“제 이름이 뭐였죠?”
그레이스는 그가 크게 당황했음을 알았고, 그의 기억의 공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언데드를 어째서 망자라 칭하겠는가. 본능이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더니 결국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에 그들을 망자라 부르는 것이다. 기억에 숭숭 구멍이 나 있다는 걸 알면 사람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데드는 당황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공항으로 이어져 결국엔 이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레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경계하는 것도 좋지만 이 청년을 돕는 게 먼저다.
“이 배낭은, 우리 마을을 찾아온 언데드가……. 어, 그러고 보니 그 분 이름이 뭐였지?”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야, 어딘가에 분명 기억이 남아 있을 게야. 내 이름을 그레이스 하이룽호른. 네가 찾던 사람이 바로 날세. 아무거나 좋으니 기억나는 모든 것을 되뇌게. 천천히 심호흡하고, 긴장하지 말고.”
몸은 죽었지만 본능은 호흡을 한다. 그레이스의 말에 따라 차분히 숨을 가라앉히던 청년은 조금씩 앞의 사건을 떠올린다. 스스로의 이름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용사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여행길에 무수히 많은 사슴 떼를 봤다. 비가 올 듯 짙은 회색 안개를 봤다. 보라색 꽃을 봤다. 무너진 성곽을 봤다. 고른 땅을 보았다. 그레이스 하이룽호른을 만났다. 이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여전히 기억은 완전치 않지만 더 이상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청년은 어째서인지 저릿한 것 같은 몸을 풀면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그레이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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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의 맥락을 파악한 그레이스는 청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켰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사나 그레이스처럼 원대한 목표가 아니다. 삶의 의미보다도 당장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분명히 아이리스에게도 해가 갈 것이다.
“난 아직 자네를 믿을 수 없네.”
아이리스에게 증오를 보이는 언데드다. 믿을 수 있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우선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해야겠지. 뭐라도 좋아, 네가 언데드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 속에 똑똑히 박아둘 수만 있다면. 임무를 주지. 하루에 한 편 꼭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써.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날 도와 밭을 가꿔도 되고, 가축을 길러도 되네. 공부를 하건 성벽을 쌓건 난 일절 간섭하지 않을 것이야. 다만 자네가 모든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기 전까지, 아이리스의 곁에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자네가 이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망자가 되었다고 판단된다면 난 주저 없이 자네를 죽일 것이야. 난 그분처럼 친절하지 못하네. 거기에 포기도 빠르지. 부디 잘 해내길 빌겠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청년은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르신. 저는 일기가 뭔지도 모를 뿐더러 무언가를 배우려 해도 읽고 쓰기를 못해요. 제가 유일하게 읽고 쓸 줄 아는 글자는 이름 몇 자 뿐이라고요.
“아…….”
그가 일평생 몸담았던 유랑민의 삶 속에서 익힐 수 있는 거라곤 사냥과 채집에 대한 지식 밖에 없어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없는 골이 띵 해지는 감각에 손으로 머리를 짚는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좋아. 낮에는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주변 지도를 세세하게 완성시키고 밤에는 나와 함께 글공부를 하지. 그거면 되겠나?”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렇게 그레이스의 일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보니 아주 오래전 글을 배울 때 썼던 힐류브리트어 교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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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아이리스는 잠이 들었고 청년은 열심히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찬장에서 슬며시 편지를 꺼냈다. 고작 삼 개월 하고도 보름이지만, 무척 오랜만에 꺼낸 기분이 들었다.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다시 그 편지를 쭉 읽는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청년이 현 인류의 생활상을 낱낱이 알려주었을 때다. 정착 생활을 버린 인류. 글을 배울 정도로 여유가 넘치지 않는 생활환경.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아이리스의 부모들. 마지막으로 편지에 쓰여 있는 또박또박한 글씨. 모든 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단서였다. 애초에 고대어가 변형되었다는 걸 용사에게 알린 이도 그레이스였건만, 너무 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정착 생활을 하지 않는 세대에 정착 생활을 하고, 고대어를 잊은 세대에 고대어를 쓰는 인간.’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순 덩어리다.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 편지를 남긴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여기에 적힌 아내라는 단어는?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싶었다는 이 이야기는? 그레이스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모유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먹지 못했다면 필시 걷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쇠했을 텐데, 그 어디에서도 그들 부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먹을 것을 달라 했으면 주었을 텐데, 그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덜렁 아이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어째서, 어떻게 언데드에게 아이를 맡기는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레이스는 고민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조금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리스를 바라본다.
“아이리스.”
그리고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러본다. 한 가득 의문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