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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말하라구.
작가 : 랑다정
작품등록일 : 201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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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
작성일 : 16-10-23     조회 : 411     추천 : 0     분량 : 6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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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

 

 

 

 

 

 

 

 

  째깍 째깍.

 

  밤에 들리는 시계 소리는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음 같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곗바늘 소리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하게 새벽빛이 새어들어왔다. 눈을 떠보니,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였다.

 

  백이현 가슴팍에 코를 묻고 폭삭 안겨서 잠을 잘 줄이야. 그의 폐 속으로 공기가 찰 때면, 나도 같이 들이쉬어 꽉 찬 느낌이었고, 그가 내쉬면 나도 같이 내쉬어 느슨해졌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과하게 특별해진 것 같은.

 

  고개를 올리고 보이지 않는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어느 정도 뚜렷해진 시야.

 

 

 

 

  "……………."

  "……………."

 

 ​​

 ​

 

  진짜 백이현 맞네. 말도 안 돼. 정말 현실이었다. 괜히 볼을 꾹 찍어보고 스스로 놀라 멈칫했다. 파노라마처럼 강하게 훑고 지나가는 기억의 단상.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화끈거렸다. 뜨거운 숨이 뱉어지고 그의 향기가 짙어졌다. 다시 그의 가슴팍에 코를 묻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날개 뼈 쪽으로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좀 움직여야겠다 싶어, 백이현의 팔을 살짝 떼어 보니 확실히 몇 시간 전보단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살짝 재끼고 몸을 움직여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나올 수 있는걸. 왜 어젠 나오지 못 했는지. 몸을 돌려서 간신히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최대한 소리 없이 일어나려는데, 강하게 허리 춤을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들 숨을 쉰 채 멈췄다. 그리고, 귀엽게 끙끙대며 허리께에 얼굴을 부지 적대는 백이현.

 

 

  여전히 꿈나라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양이다. 하얗고 길쭉하게 뻗은 손. 이현의 손은 부드러웠다. 계속 메만지고 싶을 정도로 그러했다. 하지만, 불순한 생각을 거두고 살짝 떼어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느낄게. 그의 살 냄새가 풍기는 손등에 코와 입술을 묻고, 약간의 촉 소리와 함께 내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잘 자. 이현아…."

 

 

 

 

  밖은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대낮과 같이 웅성웅성 시장통 마냥 시끄러웠다. 그래도 나름 조용한 곳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방음이 될 리 없는 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나 보네. 보는 이 없이 틀어진 TV소리. 코를 드르렁 골아대는 아저씨들. 한가운데에 삼삼 오오 모여서 얼굴에 희멀건한 팩을 붙이고 끝이 없는 수다에 박수까지 쳐대며 깔깔대는 아주머니 패거리.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는 연인이 부둥켜안고서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배고프다면서, 찜질방에 왔을 땐 맥반석 계란과 식혜라고 입안에 우걱 우걱. 끝도 없이 밀어 넣으며, 일정한 페이스로 잘도 먹는다. 저러다 혼자서 계란 한판을 다 먹을 기세였다.

 

  포스트잇에 간단한 쪽지를 써 놓고. 곧장 갈아입을 옷 가지와 가방 속에 세면도구를 챙겨. 절친 고우리를 불러냈다. 애가 원래 새벽잠이 없기로서니 찜질방을 좋아하는 우리를 불러낸 건 잘 한 일이었다. 밖에서 혼자서 우두커니 있는 것도 웃기고,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

 

  더 큰 이유는, 혼자 있으면 괜히 백이현 생각에 우울해질 것 같아서였다. 집을 두고 밖에서 밤을 지새우다니, 내 집을 고스란히 백이현에게 뺏긴 거나 다름없었다. 모른 척. 아침까지 부둥켜안고 잘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의 시작은 싫었다. 백이현이 맨 정신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성적인 판단이 아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비비적비비적 일어나. 마주 보는 것도 민망할 것이고. 혹여나 '미안. 실수였어.' 와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지독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기 싫어했다. 그런 생각이 강력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하지 못 한다. 바보 같고 멍청해 보이겠지만 도저히 그런 말을 먼저 할 정도의 작은 용기도 없다. 나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온통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만약.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만약, 그렇다면 상처받는 몫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니.

 

 

 감당하기 싫어.

 

 

  늘,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재고 재다가 시기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그래서 그런지 익숙해져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에게 익숙하다고 착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

 

  백이현은 늘 내게 착각을 안겨준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줄곧 그래왔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술도 못 마시는 애가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애가, 인사불성이 되어선 예고도 없이 불쑥 집 앞까지 찾아왔고, 숨통을 조여 올 만큼 잊을 수 없는 키스까지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같이 잤는데. 정말 잠만 잤는데.

 

 

 

 

 

 

 

 

 

 

 

 

 

 

 

 

 

 

 

 

  "뭐어? 그 자식 고자 아니- 읍!"

 

 

 

  왜 막고 난리야. 숨 막히게!

 

 

  낯 뜨거운 언변에 민망해져서 급한 대로 우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곧바로 내 손을 밀쳐낸 우리의 입을 또다시 막을 틈은 없었다. 내 얼굴을 가릴 뿐.

 

 

 

 

  "그러니까. 백이현이 너희 집에서 잤다는 건데. 널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맞네. 맞아. 백이현 고ㅈ-"

  "야! 넌 상상을 해도 꼭 저질이냐!"

 

 

 

 

  맞는 말이잖아. 사방에 벽 있고 위에는 지붕 있는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 혈기 왕성한 두 남녀가 같은 침대 위에 있는데. 멀쩡히 쿨쿨 잠만 자냐! 어떻게 된 게 키스만 하고 쓰러져! 그게 고자가 아니고서야 말이 돼?

 

  핀잔 아닌 핀잔 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하도 답답해서 털어놓은 말을 다시 입안으로 되돌려 집어넣고 싶었다. 대신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해. 고자라고 할 때마다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이 멍충아.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얘기해."

  "…난, 못 해."

  "그러다 백이현 뺏긴다."

  "……………."

  "기집애. 그건 또 싫은 거잖아."

 

  그건 또 싫은 거잖아.

 

 

 

  나의 불완전한 특성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절친다운 말이었다. 거부할 수 없이 딱 맞는. 짜증나지만 인정하게 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입안이 바짝 말라, 강한 갈증을 느껴. 우리가 먹던 식혜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차가운 식혜가 식도를 타고 쑥 위로 진입했다.

 

 

 

  "그러니까. 잡으라고. 어이구, 이 답답이들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응? … 닮는다고?"

  "그냥 말하면 되지. 좋아한다고, 속시원히!"

 

 

 

  누가 잡아먹냐. 요즘 시대가 조선시대도 아니고.

 

 

  본인이 더 답답하고 속이 타는지, 으이구우-. 하며 가슴팍을 몇 번 두드리더니 목덜미를 잡고 바람을 일으키다가 앞에 놓인 식혜를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벌컥 벌컥 마셨다. 캬 소리까지 내며, 야무지게 비워낸 식혜 통을 턱하니 내려놓고. 내 머리에 계란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 아프잖아! 멀쩡한 바닥 두고, 남의 머리에!"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으며,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몇 번 반복해서 냈다.

 

 

 

 

  "어째 하는 짓도 똑같냐."

  "…똑같다니. 백이현과 내가. 그것도 똑같다니!"

  "내 보기엔, 둘 다 어디 가 모자란 것 같아."

  "야, 걔랑 싸잡아서 얘기 하ㅈ-"

 

 

 

 

  앞에 놓인 내 휴대폰이 울려 말이 똑 끊겼다. 이 시간에 누구.. 액정을 확인해보니, 백이현이다. 새벽에 잠이 깨기라도 한 건가. 다시 한번 시간을 보니 어느덧 아침 결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됐지? 우리랑 찜질방에서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손에 묻은 소금 가루를 탈탈 털어내고, 액정 위에서 뱅글 뱅글 배회하는 검지 손이 주춤 주춤. 손끝까지 떨렸다.

 

 받을까 말까. 받을까 말까.

 

 

 

  "양반 못 되는 자식이네. 얼른 받아!"

  "ㅇ, 안 돼!"

 

 

 

  아! 둘 다 멍한 얼굴로 서로를 잠시 아주 잠시. 쳐다봤다. 웃겼는지, 몇 번 코웃음이 새 나오더니 큰 리로 터지고 말았다. 받지 않으려는 나와. 받으라는 우리. 옥신각신하다. 자동으로 거절이 눌러졌기 때문. 기막힌 상황에 나는 벙 쪘지만. 우리는 캑캑대며 숨넘어갈 듯 웃고 있었다.

 

 

 

 

  "고우리.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아. 아니 이- 본의 아니게 튕겼다. 너."

  "…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래 좋다."

 

 

 

  백이현. 어디. 속 좀 시커멓게 타보라지.

 

 

  대체 얘 아까부터 뭐라는 건지. 좀 알아듣게 얘기해! 허벅지를 찰싹 때리자. 식혜를 먹는 입을 빨대에서 급히 떼어내고 꼴깍 급하게 삼킨 뒤 약간의 기침과 함께 남은 웃음을 마저 웃어댔다. 그리고 그 뒤에 하는 말은 온전히 고우리의 생각이긴 했지만.

 

 

 

 

 

 ​

 

 ​

 

 

 

 

 

 

 

 

 

 

 

 

 

 

 

  '기다려. 백이현이 고백하게 만들어 줄게.'

 

 

  웃기고 있네. 입까지 삐죽 올리며 비웃었다. 고온 찜질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고백은 무슨. 고우리. 그러는지는 얼마나 연애를 잘해서 나보고 연애 고자니, 뭐니 운운하는지. 기분이 더럽게 나쁜 말인데 부인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어후, 어떻게 생겨먹은 게 이따위여서. 그런 소리를 듣고 사는지.

 

  대충 몸을 씻고 찜질방을 나와. 한 손엔 세면도구가 가득 들어 물이 뚝뚝 흐르는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집 쪽으로 갔다가, 혹시나 백이현이랑 마주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뱅뱅 돌다 학교로 와서, 가디건으로 잘 감싸 캐비닛에 넣어두었다. 철컹 소리가 나게 닫고,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살다 살다 별짓을 다하네. 하긴, 어젯밤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긴 했지.

 

  백이현의 품에 안겨 잔 것 자체가. 아니지, 입 맞춤 한 것-

 

 

 

 

  "야! 한영원!"

 

 

 

 

 

  엄마 깜짝아! 심장이 격하게 덜컥 내려앉았다. 심박수가 마구 올라가고,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기분이랄까. 죄진 것도 없는데, 그랬다. 낯 뜨거운 어제 일을 떠올리는 시점에서. 실제로 백이현 얼굴 보는 거 자체가 되게 꺼림칙한데. 하필 이럴 때 불러 세우냐. 넌.

 

 

  눈치 제로 같으니.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돼!"

 

 

 

  급하게 쫓아온 모양인지, 목까지 차올라 곧 토할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질문 폭탄을 던졌다.

 

  폰은 액세서리냐. 전화랑 문자는 아예 안 보고 살아! 그럴 거면 뭐 하러 들고 다녀.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그리고, 계집애가 밤새도록 어딜 싸돌아다니는데. 자고로 잠은 집에서 자야지 여잔! 내 말 듣고 있어? 어디서 잤어, 어? 어디서 잤는데-

 

 

 

 

  "아주 소문을 내라, 너 우리 집에서 잤다고."

 

 

 

 

  백이현 말을 듣고 있자니, 꼭 우리 동거하는 사람처럼 말이 그렇게 들렸다. 자기 여자 단속하는 남자같잖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겠어. 그렇지?

 

 

 

 

  "아… 목소리가 너무 컸나?"

 

 

 

 

  이미 들을 사람은 들었겠다 싶다. 그제야 주위를 살피며, 팔을 잡고 나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나 깜짝 놀랐어."

  "…왜?"

  "여자 집 처음이거든. 나…."

 

  정말 처음이야.

 

 

  미친놈. 이 와중에 실실 쪼개고 있어. 얼굴은 또. 왜 빨개지는데. 이놈 보소. 쉴 새 없이 코까지 비비며 민망함을 호소했다. 당황하거나 수줍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앞으론 술 먹지 마. 술도 못 이기는 게-"

 

  그러다, 아무 여자 집에서 잘라.

 

 ​

  자식들에게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모양새도 신경 쓰지 않고 아들만 바라보는 목소리였다. 술이나 잘하면서 취하면 말도 안 하지. 별생각 없이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백이현을 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지해지는 백이현이.

 

 ​

 

 

  "…괜찮아."

 

 ​

 

 

 적응이 되질 않는다.

 

 ​

 

 ​​

 

  "넌 아무 여자. 아니잖아."

  "어…?"

 

 ​

 

 ​

 

 작은 기대. 일말의 착각도.

 

 ​​

 

 ​

  "고마워. 재워줘서…."

 

 ​

 

 ​

 

 ​하지 말자.

 

 

 ​

 

  "… 됐어. 인사 받자고 한 일 아냐."

 

 

 

 

  사실이 그러했다. 나도 정신없는 상태였지만, 모른 사람도 아니고. 술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너를 길바닥에 두고 내몰라라 할 수 없었다. 백이현 네 앞에선 무심한 척, 쿨한 척 만 할 줄 알았지. 그 정도로 몰인정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정말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리고, 어젯밤에 말인데…."

 

 

 

 

  백이현이 정수리 부근의 머릴 의미 없이 매만지며 뒷머릴 긁었다. 그러면서 입이 마르는지 순둥이 같은 얼굴로 혀를 날름날름 거려, 마른 입술을 골고루 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뜨거운 열기가 몸을 뒤덮는 찰나.

 

 ​​

 

  순간, 머리가 새 하얘졌다. 술 마신 뒤엔 단 한 번도 전날 일을 기억한 적이 없던 너인데, 굳이 어젯 밤이라고 하는 거 보면.

 

 

 

  혹시…

 

 

 ​

 

  다짐한지 몇 초도 안 되어

 

 

 

 

 또다시 작은 기대. 일말의 착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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