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됐다고. 모른 척할게. 너도 신경 쓰지 마."
"…어?…ㅁ-"
바빠, 수업 있어. 먼저 간다-
백이현의 말을 끊었다. 굳이 민망한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미안, 실수였어.' 와 같은 말이 나올 근원을 아예 차단해 버려야 했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발악 같아.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최대한 쿨 한 척하며 웃어넘기지만 속은 그렇지 못 했다. 한동안. 아니 어쩌면 너랑 마주하는 시간 동안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마르고 닳도록 곱씹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키스 한번 했다고 나랑 사귀어야 한다는 둥. 책임지라고 할 만큼 꽉 막힌 여잔 아니니까.
"잠깐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봐, 앞서 걸어와서는 어느새 팔까지 꽉 잡고 있는 백이현.
"아- 아프잖아."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더 수상하다. 너."
"뭐…를… 내가 뭘!"
참, 내가 들어도 당황한 목소리가 역력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는 탓에 재빨리 눈을 회피했지만. 쿵. 쿵. 쿵. 머리끝까지 울리고 목울대 부근이 심하게 뛰었다. 긴장을 격하게 하면 여기 쇄골이 교차하는 가운데 부분이 팡. 팡. 팡. 뛰어올라 티가 나버리곤 했다. 들킬까 봐 얼른 손으로 가렸다. 백이현이 보지 않아야 하는데.
"혹시, 나를…."
그다음 나온 말은, 상상 초월. 숙고해진 예상을 완벽하게도
"계단에 굴렀다거나, 구타를 가했다거나…. 물론 네가 그랬으리라곤 생각 안 해. 근데-"
빗나갔다.
"아침에 샤워하려는데, 몸에 멍이. 멍이 그렇게 많이 들었더라고."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순간, 웃으면 안 되는데… 작은 구멍으로 바람 빠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푸훕하고 터졌다. 사실, 어제 데리고 올라오면서 계단에 찧고 벽과 난간봉에 수 없이 부딪혔던 터라, 어느 정도 잔해가 남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한번 볼 래? 난, 처음에 무슨 심각한 피부병 걸린 줄 알았어."
이 정도 일 줄이야.
옆구리 쪽을 보여주겠다며, 여기가 제일 심해. 봐 봐. 공개적인 야외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티셔츠를 올리기 시작했다. 반자동으로 올리는 손을 잡았지만, 이미 반쯤 말아올린 상태라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기 민망했다.
보랏빛으로 점이 크게 여러 개가 찍혀져 적나라하게 멍 자국이 드러났다. 재빨리 내렸지만, 이미 허여멀건한 무언가를 봐버려서 괜히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다굴 당한 거지. 나…"
얼른 말해줘.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대답은 안 하고,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뺨을 툭툭 치자, 손까지 잡으며 진실을 말해달라고 성화였다. 백이현에게서 나온 '어젯밤'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들어박혔다. 그 세 어절 속에 모든 의미가 포함되어 들려오는 것 같아서 다시 긴장되었다.
예고도 없이 다가와 나를 헤집어 놓은 너의 붉은 입술. 꽉 껴안고 놓아 주질 않아, 본의 아니게 안겨서 잔 너의 품속. 오밀조밀 복잡 오묘하고도 차마 형언 될 수 없는 감정들이 함축되었다. 애석하게도, 어젯밤이라는 말 한마디에.
설레는 감정이 고스란히 묶였다. 하지만, 간밤에 가슴팍에 코를 박고 맡았던 백이현 냄새 말고. 익숙하고도 익숙해서 나에게 조차도 나는지도 모르는…. 나의 향기가 너에게 나고 있다. 말을 하면서 움직일 때마다, 이따금씩 바람이 나를 향해 불 때마다.
신기해.
나와 같은 향기를 지닌 백이현이.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향기가 난다는 건 매우 특별하게 와 닿았다. 작은 것에도 이렇게 너와 엮으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그게, 백이현 너라서 더 그러고 싶은 거겠지.
"어이. 멍 때리지 말고. 솔직히 불어라."
"너. 내 거 썼지?"
내가 말하고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어? 아…. 네 물건 신세 좀 졌다."
"……………."
"칫솔 없어서 새 거 뜯어 쓰고… 화장대 위에 있는 거 보고 대충 찍어 발랐어."
의외로 백이현은 눈치가 빨랐다. 뜬금없는 한마디에도 알아듣고 바로 원하는 대답을 했다. 무엇보다, 백이현이 내 물건을 썼단다. 세면도구만이 아닌, 그것도 화장대 위까지 섭렵했나 보다.
"그, 뭐지? 욕실에 있던 거. 투명 보라색 용기에 든 거품 나는…"
"비욘드 바디워시?"
"응. 그래. 그거. 향기 진짜 좋더라. 그래서 한참을 여러 번 씻었어."
많이 나?
자신의 살에 코를 박고 킁킁대며, 역한가? 난 좋은데. 중얼거리며 말하더니. 다시 한번 많이 나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답 없이 멀뚱 멀뚱 쳐다보고 있으니 내 쪽으로 한발 성큼 다가와서 불쑥 귀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킁킁댔다.
또다.
심박수가 쿵쿵대 들킬까 봐 숨을 훕- 하고, 들이쉬어 내뱉지 않고 꾹 참았다. 언제 떨어질래. 얼른 떨어져. 이대로 내 심장 안녕하지 못 하겠어. 조급해진 나는 손톱으로 옷을 꼭 쥐어잡았다. 점점 차오른 숨에 손 톱으로 허벅지를 꾹 누르는데.
여기저기 킁킁대더니, 아무렇지 않게 어깨 부근에 코를 박고 깊이 들이쉬었다.
"크흡-"
급하게 숨을 내뱉어 예쁜 소리가 나지 못 했다.
이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던 백이현의 동그란 호선의 눈 꼬리가 흐드러지게 휘어졌다. 민혁 씨와는 차원이 다른 그런… 대본 연습하다 나무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웃던, 그 살인적인 미소였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말려 올라가고 고른 치아가 딱 여덟 개씩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 네 모습에 넋을 놓았다. 그리곤, 입을 달싹 달싹거리더니. 한 쪽 입꼬리가 우물 쭈물거렸다.
영원아,
"나한테, 네 향기 나."
"야, 떨어져서 걸어."
누가 보면 오해해. 우리.
그리곤 백이현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늦은 오전과 오후에 할 일이 없다며.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수업을 듣겠다고, 따라오길 자처했다. 안 그래도 같은 향이 나는 게 신경 쓰이는데, 딱 붙어 걸으니 더욱더 신경이 곤두섰다.
솔직히 모를 사람은 모르고 넘어갈. 괜히 아무짝에 쓸모없는 걱정이기도 했지만. 아는 사람이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할까 봐. 그러니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닌데.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단정 지을까 봐서. 사람이라는 게 오해의 동물이라 약간의 오해의 소지만 있어도 충분히 그럴 테니.
"오해하긴 누가 오해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내 말이 틀렸다고 하듯 거스르고, 바짝 다가왔다. 태연하게 어깨에 손을 두르더니 자연스러운 보폭을 맞추어 같이 걸었다.
"야, 백이현. 손 내ㄹ-."
"한영원, 아직도 이현이한테 선배 취급 안 하냐."
내 말을 가르고, 제3의 인물이 들어섰다.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백이현이나 나나. 너 나 할 거 없이 뒤를 돌았다. 보자마자, 백이현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악수를 청했다. 그런 백이현의 악수를 받아주며 나를 주시하는 눈빛으로 보는 그 인물은, 동아리실에서 함께 있던 남자 선배였다. 대놓고 반항했는데,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것이다. 거두어질 줄 모르던 눈초리에 뻘쭘해진 나는 고개를 까딱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아침 식사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아냐, 지금 약속 있어서."
"오~ 인기쟁이."
넉살 좋은 백이현, 껄끄러워진 강준 선배와 나 사이에서 나름 애쓰고 있는 게 보였다. 웃으면서 대하기 싫은데. 백이현의 노력을 봐서라도, 웃어야지. 나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한번 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보면 참 능력 좋아."
"… ?"
"선배들 깔보는 능력."
"……………."
"어디, 나한테도 해보지."
"……………."
"서강준이라고, 불러 봐."
그때 당시의 상황을 꽤나 고깝게 봤나 보다. 선후배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일부러 웃으면서 말에는 뼈가 묻혀있었다. 그렇게 선배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답도 안 하고 뛰쳐나갔으니. 싹수없는 기집애로 제대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선배의 일침이. 덕분에 자존심을 건드렸다. 선배들 앞에서 백이현을 백이현이라고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충분히 말 대답할 나였지만. 백이현의 노력을 봐서라도 억눌러야 했다.
나 같아도, 후배가 그딴 식으로 기어올랐으면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가만 안 뒀을 거야. 참자. 참아. 선배들이 보기에 나는 한참 어리고, 어린 애송이에 불과할 테니.
서강준. 눈이 유난히 매서운 선배였다. 무의식적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래 보였으니. 그런데 지금은 고의적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리고 옆에서 더 쩔쩔매는 백이현은, 그야말로 재롱부리는 강아지 같네.
이 와중에, 옅은 미소를 만드는 백이현이 신기했다.
"선배님? 제가 그렇게, 불러봐도 되겠습니까."
"겨 오르냐. 가만히나 있으면."
"네. 알겠습니다."
"하여튼, 넌… 아휴, 팔불출 새ㄲ-"
"아아! 맞다. 선배님. 저한테 주실 거 있으시죠오~?"
백이현과는 같은 학년이었지만, 이번에 전역해서 복학하신 터라 백이현에게도 학번이 다른 선배는 선배였다. 복잡한 한국의 대학 위계질서여. 진짜 짜증 나.
근데 뭘 줄게 있다는 거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리깔듯 지켜보더니, 백이현의 말에 아, 그래. 이거 주려고 너 찾아다녔다. 임마. 긴장감을 푸는 친근한 미소를 띠며 백이현의 팔을 툭 치는 스킨십까지 보였다.
"내가 이거 구하느라 안 하던 아부까지 다하고…."
"역시 선배님 밖에 없어요. 나중에 찐하게 한 턱 내겠습니다."
힘들었다고 장난스러운 한숨을 쉬는 강준 선배에게 백이현이 웃으면서 받아치자. 기분이 나아졌는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금세 싱글벙글해진 백이현이 감사하다고 몇 번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그깟 게 뭐라고. 강준 선배는 그런 백이현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내게는 나중에 또 보자는 어마 무시한 여운을 띄우고 자리를 뜨셨다.
배웅 아닌 배웅까지 하러 간 백이현. 그래 봤자, 나무와 나무 사이. 한 그루 거리인데, 쩔쩔 메긴. 졸업하면 다 똑같은 인간인데. 하여간 남자들의 쓸데없는 의리는 알아줘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약간 기분이 다운이 되었지만. 백이현이 살랑살랑 웃으며 받아든 걸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내게 뛰어온다. 나풀거리는 난방과, 바람에 살포시 날리는 앞머리.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편안하고 차분해지는 느낌.
또다시 너에게서 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