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마에 구슬진 땀이 아슬아슬하게, 송골송골 맺혀있다가 숨을 훅 내쉬자 옆 선을 타고 도르르 떨어지니, 그런 백이현이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침착해 한영원. 이성의 끈을 놓지 말자고 다짐하고 곧장 손에 들려진 대용량 팝콘과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내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아는 매뉴얼이었다. 어니언 맛과 치즈 맛이 섞인 반반에 콜라를 싫어하는 내 입맛에 맞춘 맑은 사이다였다. 그것도 스프라이트… 여자는 작은 배려에도 감동을 받는데. 정말 가슴이 찌릿한 게 뜨거워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소한 팝콘 향기에 매료되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근데, 여기가 영화관인 줄 아나. 공연장은 음식물 반입 안 되는 거 모르나. 연기 전공하는 사람이 모를 리는 없고. 연극 보러 한 두 번 오는 것도 아닐 텐데. 백이현 바보 됐나 봐.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우릴 보고 있는 스텝을 까맣게 잊은 채.
"입장하실 거세요. 안 하실 거세요."
아까보다 더 사무적인 말투로 묻는 스텝이었다. 잠시 머뭇댔다. 들고 있는 팝콘을 만지작 만지작대고있으니,
"음식물 반입 안되세요."
설마 그런 상식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팝콘과 음료를 두고 가자니, 사온 정성이 때문에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안 들어가자니, 마지막 회차라는 게 여간 걸렸다. 어쩌지 어쩌지… 여태 결정을 못 내리는데.
"저희, 안 흘리고 먹을 수 있거든요."
백이현이 느닷없이 황당한 소릴 해댔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나 싶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꾹 입을 깨물고 버텼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엉뚱했다. 이에 스텝이 기막힌 얼굴로, 그건 안된다고 자르자 한소리 더 할 기세로 입을 열었다.
그런 백이현 품에 팝콘을 턱 안기고 덥석 손을 잡은 체 서있던 줄을 빠져나왔다. 어디 가. 공연 봐야지. 예상대로 백이현은 그렇게 말했다. 다시 돌아가자고 이끄는 걸 내 대답으로 막았다.
"팝콘, 눅눅해지면 맛없어."
약간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고 먼저 가는 내 뒤를 반박자로 빠르게 쫓아왔다. 그의 손을 잡았던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곤 오무작 오무작댔다. 기분이 몰랑 몰랑한 게 이상하게 꾸물해진다. 옆에 바짝 다가온 백이현을 한번 힐끔 보곤 이상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 길로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팝콘 사온 영화관에 다다랐다. 그냥 처음부터 영화관 오는 건데. 괜히 백이현 땀 한 바가지 빼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백이현만 망신살이 뻗쳤잖아.
근데, 백이현.
"그, 연극표 … 말이야."
아까, 강준 선배한테 받은 거지.
그렇게 묻자, 절대 들켜선 안되는 큰 비밀이라도 들켜 혼쭐이 날 사람처럼 먹던 음료에서 빨대를 빼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켁켁 거리며 사레 걸린 강아지 마냥.
"어떻게 알았어?"
"보니까, 딱 알겠던데 뭘."
"그런 눈치는 빠르면서 왜 …."
… 후 …… 아니다 ….
늘어지게 한숨을 쉬더니 여운이 길게 남는 말로 끝맺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백이현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귀엽긴. 덩달아서 백이현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고 살랑살랑 흔들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자연스레 넘겼다. 귀여운 강아지 같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도 없이 서있더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고는 하늘과 마주했다. 이내 나를 향해 짙은 숨을 내뱉었다.
백이현의 표정과는 반대로 나는 건수를 해낸 미소를 띠며 입에 바삭바삭한 팝콘을 한 알맹이씩 입안에 넣고 씹으며 영화관 안에 붙은 영화 포스터 목록을 살폈다.
민망할까 봐 아는 체 안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괜히 쩔쩔매는 백이현의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깔깔대는 웃음이 터지려는 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손 버릇 고쳐. 한영원."
"무슨? 나 손 버릇없는데."
"하- 참, 없다고? 막 … 어? 이렇게 … 어? 하는 거 … 하지 말라고 …."
"그러니까, 뭘? 알아듣게 설명해."
"아주 상습적이면서 모른 척은…!"
나름 손동작으로 설명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이해력이 딸리는지 초 집중해서 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 눈만 땡글 땡글 뜨고서 고개만 갸웃거리니, 눈을 푹 감곤 자신의 이마를 짚어 포기한 듯.
"… 아니야 ……."
오늘따라 아니라는 말을 많이 하는 백이현이다. 바닥을 툭 차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 말인데."
"응."
"강준 선배가 했던 말 … 상처받지 마."
"… 선배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 들어."
"그러려니 해. 잊어버리면 더 좋고 …."
백이현 지금 내 걱정하는 건가. 상처받지마는 무슨 본인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나 약았잖아. 약아빠져서 그런 말에 상처 안 받아."
애써 괜찮은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만 올리면 웃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사실 그런 말에 상처 안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상대방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만 하는데, 어쩌면 백이현 너한테 못 되게 굴어서 벌 받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너한테 못 되게 굴고 싶지 않은데, 나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걸. 난 몸도 마음도 다 삐뚤어졌나 봐.
"그래, 너 여우다. 여우. ㅇ여우!"
볼을 늘어지게 잡고 흔들어대는 백이현. 야 아파. 아프다고, 이게~ 어~? 적당히 해라. 아아! 안 아프게 살짝 잡을 것이지 융통성도 없게 진짜 힘줘서 잡고 늘어지면….
"……………."
찡그린 얼굴이라, 백이현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못 했는데 사람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어쩌겠다는건지. 무어라 설명하긴 그렇지만, 딱 오해하기 좋은 표정이었달까. 사랑스럽게 여자친구를 보는 눈빛 같았다.
"연극 … 못 봐서 어떡하냐. 너 보여주려 했는데."
"괜찮아, 너랑 봤으니까."
"봤어? 나랑? 언제?"
"예전에 영화로 말야."
괜찮아, 너랑 봤으니까.
…라니, 말 해놓고 아차 싶은 게 백이현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모르는 눈치였다. 어떻게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어감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친근하고 긴장을 늦춰서 마음속에 있는 말이 섞여 나와 버렸다.
"그…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내용이더라도, 뻔할 뻔 자인 로맨스 굳이 안 봐도 된다는 말이야."
혼자 민망함이 솟구쳐 애써 누르느라 입이 바싹 바싹 탔다. 백이현이 들고 있던 음료를 덥석 잡고 빨대로 시원한 음료를 쑤욱 빨아들였다. 기포들이 목구멍으로 진입하면서 따갑게 찔러댔다.
덕분에 찡그려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 백이현이 푸흐흐 하고 웃었다. 이게 실성을 했나.
"왜? 왜, 웃냐. 기분 나쁘게."
"…기분 나빴어? 미안…."
"뭐가 좋아서… 내가 그렇게 웃겨?"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푸흡-"
"얼씨구. 바른대로 말해."
응? 어서 말해! 하며 팔을 꾹 찌르자. 눈이 호선을 그리며 더욱더 예쁘게 휘어졌다. 더 꾹 꾹 찌르며 잡고 흔들자 간지러운지 숨넘어갈 소리로 꺄르륵 거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덕분에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주위가 다 화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이현의 웃음은 항상 내게 그래 왔다. 뼛 속에 잠자코 있던 심장을 조물거리는 건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숨을 얕게 쉬며 다스려 보았지만 괜히 침이 꼴깍 삼켜졌다. 입을 옹그리며 쳐다보자. 백이현이 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코를 비비며 말했다.
"그 빨대. 내가 먹던 거라서…."
아- 순간, 벙쪘다. 다문 입이 벌어지려고 했고, 눈이 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연관 지어져 선 백이현과 했던 취중 키스가 떠올랐다.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맨 정신이고 백이현만 취해있었으니까.
파노라마처럼 그날을 기억이 또 내 머릿속에 눌러 앉아 내 볼을 불그스름하게 붉혔다. 들킬세라 볼을 감싸 쥐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뭐 어때. 그나저나… 영화 볼 거야?"
"좋다… 너랑."
"새로 개봉한 영화 제목이야?"
"아니, 그냥… 좋아서."
"좋은 것도 쎗다."
"사실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나도."
오늘 정말 이상한 백이현.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해댄다. 혹시,
"너 어디 아픈 거 ㅇ-"
"영화 말고, 우선 나가자."
이마를 짚어 보려는데, 팔을 덥석 잡고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목울대가 콩콩 뛰는 게, 그새를 못 참고 왼쪽 가슴께에 자리한 마음이 가만히 있지를 못 하는가 보다.
그렇게 영화관을 나와서 정처 없이 10분 정도를 걸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리가 아프진 않았다. 나무가 일정하게 심어진 거리를 걸으며 적당히 땀을 식혀 줄 바람도 불고, 눅눅하지 않고 개운한 습도가 기분을 들어 올려주었다.
무엇보다, 보일 듯 말 듯 한 조도로 백이현의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았다.
어느새 다 먹은 팝콘 케이스를 덜렁덜렁 손끝에 메단 채 뒷짐을 지고 걸었다. 다 먹은 팝콘임에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이현이 사 왔다는 사실이. 그냥도 아니고 땀을 뻘뻘 흘리고 사온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그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을 팝콘 케이스가 내겐 점점 특별해지고 있었다.
한발 한발 맞춰 걷는 게 행복해졌다. 두둥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행복이 별 건가. 이런 게 행복이지. 쌀랑해진 저녁 기운이 마냥 춥지 만은 않게 느껴졌다.
"쿨럭쿨럭 …."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기침을 하는 백이현, 그냥 목이 가려워하는 마른 기침 소리가 아닌데.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요즘 피곤해 보이더니 면역력이 약해져서 감기라도 걸린 건가. 저번에 우리 집 앞에서 밤새웠던 게 생각나 굉장히 미안해지고 있었다.
"감기 걸렸어? 아픈 거 맞지!"
" …… 어?"
"어쩐지!"
하는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했어. 백이현의 옷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손으로 옷 감을 만져보니 얇디 얇았다. 아직 퍽 여름이 아니어서, 낮과 밤의 온도 차가 꽤나 났다. 낮도 쌀랑하지만 밤은 더 춥다는 뜻이다.
"옷은 왜 이렇게 얇아."
"괜, 괜찮아."
"밤으론 아직 춥다며,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
"감긴 언제 걸린 거야."
"이러다 괜찮아져. 가까이만 오지 마."
가까이만 오지 마.
이제서야 가까이 오지 말란다. 옮을까 봐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 순간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키, 키스 어떡하지. 내가 감기라도 옮는 날엔, 아. 뭐 같이 다니다가 옮았으려니 생각할…. 아 몰라 몰라. 옮으면 옮는 거지. 그깟 감기가 대수야. 어떻게든 둘러대면 되겠지.
"뭐, 뭐 해?"
"가만있어 봐. 움직이지 말구."
"애도 아니고, 괜찮아 정말."
"말 들어, 목을 따뜻하게 해야 돼."
"괜찮다니까……."
"이래야 안 도져. "
핸드백 속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서 백이현 목에 둘러주었다. 갑자기 다가가니 깜짝 놀랐는지. 흠칫거리더니, 말과는 다른게 손수건을 둘러주는 손길이 느껴지는지 아이 마냥 얌전하게 목을 내어주고 있었다. 키 높이가 안 맞을까 봐 무릎까지 굽혀주면서 말이다. 가까워진 우리 사이로 여전히 내 것인지. 이현에게서 피어오르는 것인지 모를 향기가 에워쌌다.
"자. 다 됐어. 감기 나을 때 까진 하고 다녀."
"응… 알겠어. 고마워."
괜히 쑥스러워져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다시 이현이와 거리를 두었다. 그때, 백이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에 불이 번쩍했다. 느리게 확인하던 백이현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로 번졌다. 나를 향해 쓰윽 고개를 돌리더니 굉장히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어? 야아- 또 어디 가는데."
흡족한 표정을 보여 준 후. 정확히 몇 발 자국을 더 걸어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내 손을 잡고 끌고 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째 아까부터 계속 이곳저곳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이 든다. 뭐, 그게 백이현이라서 싫진 않지만. 이제 집에 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택시를 타고, 이동한 곳에서 깨졌다.
"여기야, 다 왔어."
"여기는 왜? 집에 가는 거 아녔어?"
"보여주고 싶은 게 생겨서."
번화한 대학로. 이곳 대학로는 백이현과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를 데리고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와줬으니까.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걸로 닦아요. 목 놓아 울진 말고, 목 상해.'
'…………….'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는진 모르지만.'
'…………….'
'많이 보고 감정을 터뜨려서 풀면 돼요.'
'…………….'
'내가 …."
나만 아는 나무 밑에 푹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며 말을 걸어 준 건 백이현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못 했다. 어떻게 찾아왔고, 왜 나에게 와주었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등을 따스히 토닥여주는 손길이 더 간절하고 필요로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기만 한 상황에서 백이현이라는 사람은 내게 정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느껴지는, 큰 선배 같았고 선배로 얼굴만 익힌 상태라 다 알진 못 했지만… 듬직하고, 이 남자라면 믿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기억…나?"
"언제…?"
이곳은, 연극을 볼 수 있는 극장들이 아까 갔던 곳과는 비교도 안되게 즐비한 곳이었다.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잡고 있는 작품도 간혹 눈에 띄었다. 하늘 같으신 선배님들이라고 해도 진배없는 분들이셨다.
쓰윽 둘러보니, 전부터 보고 싶었던 연극이 눈에 띄었고,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뭐가 바쁜지 보러 오지 못 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백이현은 자연스레 그 공연장으로 데리고 갔고, 주춤하면서 올려다보자 늘어난 소매를 잡아당긴 백이현이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선생님한테 무척 혼났던 날. 울먹이면서 무작정 뛰쳐나갔잖아. 나무 밑에서 엄청 울고, 결국엔 목도 쉬고 눈 탱탱 부어서는."
"……………."
"그러고 보면, 뛰쳐나가는 거 습관이지?"
"야. 백이현!"
"아우, 귀안 먹었다. 아직 내 고막 탱탱하다고."
"……………."
"어째 고분고분하다 했어."
"별 걸 다 기억해."
밉지 않게 흘겨보자. 백이현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애꿎은 코를 비비적 거리며 말이다. 백이현도… 그때를 말하나 보다. 교수님도 배우이시기도 하지만, 이름 석자를 말하면 다 알만한 배우분들이 같이 와주셔서 연기 지도를 받는다. 근데, 그날은 꽤 나이가 지긋하신, 대선배 연기자 분이 수업을 해 주신 적이 있었다.
장면이 적당히 슬픔을 내비치고 대사를 읊어나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감정이 폭발했다. 대사를 읇지도 못 할 만큼 그랬다. 다른 부분은, 잘 넘어갔지만 … 꼭 특정 대사를 읊는 장면은 절제 능력이 고장 난 듯 눈물을 펑펑 쏟아냈었다.
그래서, 눈물 콧물 쏙 빠지게 꽤나 호되게 혼났지.
'희극이든 정극이든, 연기라는 것을 할 사람이 자기감정 하나도 제대로 조절 못 하면서 연기라는 걸 하겠다고 앉아 있어?'
'………………'
'연기 계속하고 싶거든. 비우고 와.'
'……………….'
'가슴속에 담아두면, 절대 연기 못 해.'
'……………….'
'연기의 혼을 담을 공간조차도 없는데. 그 상태로 무슨 감동을 선사할 수 있겠어.'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뚜렷했다. 연기는 뭐든 다 자신 있는데 말이다. 가족. 가족과 관련된 작품은 내게 가장 취약했다.
가슴 시리도록, 애절하게 울리는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족 드라마 장르는 고약스럽게도 내겐 고역이었다. 연기 레슨이 있던 날 하필 받은 과제가 가족물이었다. 늘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해서 잘 비켜왔는데, 그날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와 헤어져 살았던 게, 눈물과 감정 절제가 되지 않는 이유도 그 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남자라는 족속들에게 상처받기 싫은 거고,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대학생 새내기였던 나를 백이현이 그 길로, 연극을 보여주며 자청해서 개인 지도를 해주었다. 곁에서 있어주던 백이현이. 그래도 선배는 선배라고 어찌나 듬직하던지.
못 다한 아픔이 많은 나에게 백이현이라는 남자가 들어온 계기도, 그때부터 일까.
'내가… 앞으로 도와줄게요.'
'…………….'
'우리, 뭐든 같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