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옅은 조명에 의지해서 자리를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백이현의 뒤를 쫄래 쫄래 따라다니다가 정면을 향했다. 오늘 볼 무대의 소품들이 자리 한 것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배우로써 관객들 앞에서 선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나 한영원이 아닌. 극 중에 누군가로 분하여 캐릭터의 성격을 끌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내겐 발가벗은 기분이지만, 늘 새로운 도전이자 새 인생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배우의 길. 쉽지 만은 않을 게 분명하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숙제를 해결하지 못 해. 유능하고, 완연한 배우는 아닐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연기하는 동안만큼은, 평상시엔 느끼지 못 하던. 온몸 구석구석 퍼지는 전율을 잊을 수 없기에. 관객과 같이 숨을 쉬는 공간 안에서의 끝자락을 놓을 수가 없다.
"거기서 뭐해, 얼른 와."
"응, 가-"
앞서가던 백이현이 내가 따라오지 않자 얼른 오라고 불렀다. 천천히 가도 될 것을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발만 움직이다 무심결에 발치에 닿는 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 위험을 감지한 백이현이 잽싸게 달려와 나를 받쳐 주었다. 매사에 덤벙댄다고 백이현에게 늘 잔소릴 듣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작은 사건 사고를 만드는 나였다.
"하여튼, 한 눈을 못 팔아요 내가."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걱정해주는 백이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 미소가 번졌다.
정확히 꼭 집어서 이렇다 할 기분이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이런 백이현을 보고 있자니 꼭 내 남자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응 괜찮아 고마워. 앞 좀 보고 다녀,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아프지 않게 내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이는 백이현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손가락 사이로 백이현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했다. 혹여나 빠질세라 단단하게 깍지를 낀 것이다. 그렇게 자리에 착석할 때까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걸어갔다.
혹시 모르니까. 잡고 간 다는 의미였을까. 눈치를 보다가 내 손을 잡고 이동하던 백이현의 뒷모습에 또 한번 반했다.
이런 식으로 라면 나는 백이현에게 끝도 없이 반할 것 만 같았다. 이런 게 정말 사랑인가.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하던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ㅇㅇ아 너는 어떤 사랑하고 싶어?'
표현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에 서투르다고.
연극이 시작되는 동시에, 백이현은 진지해졌다. 배우로서의 백이현이 되어 대선배 연기자분들의 연기를 심도 있게 감상했다. 이따금씩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무대에 대한 평을 속삭였다.
저 부분은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네. 라던가. 역시 선생님이시다 감정 표현이 달라… 정말… 브라운관하곤 또 다르네. ㅇㅇ아… 나도 선배님들처럼 될 수 있을까? 라고.
백이현 말대로, 선배님들의 연기는 완벽 그 자체로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극 중반부부터 곳곳에선 훌쩍 훌쩍 우는소리가 났고,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커튼콜 하실 때의 두 분의 모습은 자체 발광에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터지도록 뜨거운 박수갈채가 극장 안을 가득 메웠고, 더 울컥해졌다. 덕분에 나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쉴 새 없이 닦아내느라 옷소매가 축축해졌다. 백이현은 티가 나지 않게 턱 끝을 가끔 훔쳤다.
또 딴에는 남자라고, 우는 티 내기 싫었나 보다.
"선생님들 뵙고 갈까?"
"지금?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나가서 코너만 돌면 꽃집 있을 거야. 꽃다발 사서 다시 오자."
"아, 잠깐만."
극장을 나와서 로비로 향하는 동안 백이현이 뜻밖에 얘길 했다. 선생님들을 뵙고 가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눈시울 붉어진 몰골로 찾아뵙긴 아직 쑥스러워 백이현을 붙잡았다.
큰 선배님들이시다 보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로 하기도 했고, 왠지 가슴이 먹먹한 게 톡하면 터질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목울대가 아팠다.
"다음에 찾아뵈면 안 될까."
"온 김에 뵙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너 보고 싶어 하실거야. 바쁘셔서 요새 통 수업 못 해주셨잖아."
"다음에, 다음에 다시 오자. 응?"
별말이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시울로 뜨거운 게 몰리더니 목이 메었다. 어째 아까보다 더 짙어진 눈물을 참느라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뒤늦게 찾아온 울음보가 조절이 안돼서 어지간히 말썽이다.
가족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 아직도 내겐 힘이 드는가 보다. 처음보단 많이 나아졌고 이젠 제법 감정 조절도 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데, 선생님의 무대여서 그런지 가만히만 있어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선천적으로 무슨 조절 장애가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취약해서야.
결국, 눈물이 주륵 흘렀고 재빨리 옷소매를 가져다가 눈을 꾹 눌렀다. 그 모습에 당황한 백이현이 양팔을 잡고 얼굴을 가리던 손을 떼어냈다. 자신의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다가 안되겠던지 자신의 품으로 와락 껴안았다.
백이현의 쇄골 바로 아래 가슴 부근에 내 입술이 닿았고, 그의 숨소리, 심박동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 모든 게 갑작스러워 깜짝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저 아무 말없이 그저 뒷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손길이 부드러워 순간 잠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쓰다듬는 손길에 긴장했던 근육들이 이완되었는지 몸도 느슨해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안겨있으니 너무 좋다. 그저 한없이 안겨 있고 싶어.
이내, 분위기에 이끌려 힘없이 축 늘어진 손을 차츰차츰 올려 백이현의 허리에 두르려는데.
"백… 이현? 여기서 뭐 해."
뜻밖의 인기척에 움찔한 손이 올라가려다 공중을 배회하고 다시 축 늘어졌다. 구두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백이현의 동기이자, 나에겐 선배인 연서 선배가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드럽게 쓸어주던 손길을 거두고 뒤를 돌아봤다. 더 안겨있고 싶었는데.
한 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메고 한 손에는 꽃다발과 쇼핑백을 안은 채 우리 앞에 섰다. 오는 모양새가 선생님들 뵈러 온 모양이었다.
백이현 옆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곤,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아 기분이 팍 상했다. 평상시에도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를 싫어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차… 연서. 여긴 어쩐 일이야."
"영원…이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우는 후배를 달래주는 선배라 …."
"……………."
"……………."
"두 사람. 혹시, 연애해?"
인사도 무참히 씹고는, 무작정 연애해? 라고 물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얼굴 근육이 경직되고 긴장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 과한 신체 변화를 느낄 이유가 없음에도 그러했다. 여자의 직감으로 연서 선배가 백이현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뭐, 연서 선배 말고도 호감을 표하는 여잔 많았으니까.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써도 참 피곤한 일이었다.
아무 대답이 없자 연서 선배는 우리를 번갈아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두 사람 연애하냐구.
"선생님들 뵈러 온 거 아니야?"
"왜 묻는 말에 대답 안 해줘."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 백이현이 다른 말로 돌렸지만, 연서 선배는 확고한 대답을 얻고자 재차 물었다. 자신이 궁금한 건 꼭 알고 지나쳐야 하는 집요함 때문이었다.
"대답할 의무 없고."
"후배 앞에서. 백이현 정말 이럴래?"
"우린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먼저 가볼 게."
한 쪽 어깨에 손을 올리곤, 꽉 끌어당겼다. 일전에 자신을 귀찮게 하던 여자를 떼어낼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서 밀착 시킨 후. 스킨십으로 상대의 기분을 제압하는 그런 식으로.
난 지금 이 자리에서 굴욕적인 기분을 느끼고만 있을 수 없었다. 상대가 느껴야 할 굴욕감을 반대로 내가 느끼고 있었다.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매번 이용하는 백이현이 몹시 야속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한 번도 말 한 적 없으면서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을 착각 속으로 밀어 넣는 것도 한 두 번이면 족했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심정을 상습적으로 당하는 게 이젠 싫어졌다. 오죽하면 내가 그런 상황마저 타협하려 들었는지 한심했다.
처음엔 이렇게 여자친구 대역이라도 하는 게 어디야. 하며 나 자신을 다독이는 것도 미련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이렇게 짓밟을 순 없다고.
"연서 선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
"이현 선배랑 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영원아…."
"맞잖아요. 선배랑 저 아무 사이도 아닌 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연서 선배의 얼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 누구든지 내가 백이현 곁에 있는 걸 싫어했다. 나란 존재는 백이현에게 가기 위해서는 걸림돌 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가깝게 지내는데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둘도 없이 친한 것 같지만 완전한 친구 사이가 아닌 우리를 남들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순간 속이 심하게 뒤틀렸다.
"한영원!"
"이현 선배가 확실히 말을 안 하셔서, 연서 선배가 계속 물으시잖아요."
왜 내 이름을 그렇게 크게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인걸. 오히려 자신이 화가 난 듯 버럭 하는 백이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화낼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단단하게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툭하고 내렸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오해했잖아. 두 사람 그럴 사이 아닌데."
"충분한 답변이 되셨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향해 무작정 걸어갔다. 걷는 다리 보다 주먹으로 힘 가득 실렸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당당하고 싶다.
앞에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하고 싶은데 현실에선 그러지 못 했다. 늘 힘없는 약자같이 제 할 말을 하지 못 했다.
방금 같은 상황에서 네. 이현 선배 제가 좋아해요. 뭐가 잘 못 됐나요. 하고 당돌하게 지르기 딱 좋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반대를 택했다. 내 마음을 또다시 숨기고 돌아선 것.
되려 백이현에게 서운한 마음만 가득 쌓아 놓고 불을 지폈다. 미워 백이현이 미워하면서.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지.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말이다.
어디 가 물러 터지기로 한 건지. 왜. 어째서 내 밥그릇 하나도 못 챙겨 먹는 거야. 한영원!
"아!"
"어?"
나 자신에게 한 말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배회하다 보니. 땅만 보고 걷다가, 어디에 부딪히고 말았다. 분명 이마가 정통으로 부딪혔는데, 통증은 찌릿찌릿하게 코를 타고 느껴지면서 뒤로 넘어졌다.
순간 짧게 기절했는지 눈을 뜨니 같은 공간 속에서 날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좀 들어?"
"한영원. 이 바보야 앞을 보고 걸어야지!"
"조심하지 그랬니."
다름 아닌 강준 선배와 백이현. 그 뒤로 서서 구경이라도 하듯 바라보는 연서 선배는 마지 못 해 한마디하는 듯 했다.
"내가 누군진 알겠지? 나 누구야!"
"이현아, 영원이 정신없을 텐데…."
"나 누구냐고. 나 봐봐."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 일어날 수 있겠어?"
누구긴 누구야. 애증의 백이현이지. 아우 쫌 놔봐. 볼살을 꼭 쥐고 자신을 보라며 돌려대는데, 꾹 눌린 살이 아파 죽겠네. 백이현의 손아귀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잠깐이었는데 볼이 마비가 된 것처럼 꽤나 얼얼하다.
그리고 네…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오뚝이 마냥 벌떡 일어났다. 강준 선배에 뜻 한 바 없이 안겨있던 게 너무 민망해서 쏜살같이 벌떡 일어났다.
평상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기만 한 강준 선배였는데, 다정한 말투로 걱정하는 건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근데 그 와중에 내 걱정을 하는 건지 야단을 치는 건지 모를 백이현.
"그렇게, 벌떡 일어나면 어떡해."
"죄송해요. 실례 많았습니다. 전 괜찮으니 가볼게요."
"어? 영원아…!"
"잠깐만!"
강준 선배가 다가와 내 머릴 받치더니 자신의 손수건으로 내 코를 틀어막았다. 눈만 깜빡이자,
"피 나…. 이러고 그냥 가려고 했어?"
아까보다 더 세게 코를 막아주더니, 가까운 의자에 앉혀 주었다. 어쩌면 내가 강준 선배를 잘 못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강준 선배가 맞긴 한 건지 보고 있으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나 꿈꾸는 거 아니지…. 꿈이 아닌데 왜 자꾸 꿈같이 느껴지는지…. 지금 강준 선배의 모습은, 마치 여동생 아프다고 걱정해주는 오빠 같아….
"제가 할게요. 선배님."
강준 선배가 잡고 있던 손 위로 손을 포개며 자신이 하겠다 하고 내 옆자리에 백이현이 앉았다.. 강준 선배는 민망한 듯 손을 떼어내곤 가방에서 페트병이 아닌 고급스러운 보틀에 담긴 물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마셔."
"… 아니에요. 괜찮아요."
"두 번은 말 안 한다."
"죄송해요….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어요?"
"물병은 안 돌려줘도 돼."
그럼 난 간다. 그래. 그럼 그렇지 그 성격이 어디 가. 대답 없고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연서 선배랑 자리를 떴다. 내 착각 일진 모르지만 강준 선배가 연서 선배를 억지로 데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백이현과 둘만 있는 게 굉장히 껄끄러웠다. 아까 내가 했던 말과 행동도 있고 해서 얼굴 보고있기도 불편했다.
"벌받은 거야."
"벌? 지금 나 코피 쏟은 게 벌받은 거라고?"
"그래. 이 답답한 미련 곰탱아."
"뭐래. 아까는 여우라며, 한여우!"
"취소야. 그 말 취소라고."
"아주 대 놓고 욕을 하네. 욕은 내가 더 잘하거든."
"자랑이다. 코피 쏟고 욕 잘하는 게."
티격태격 거리다 백이현이 먼저 푸흐흐 하고 웃었다. 우리의 냉전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싸워도 오래가지 못 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백이현과 나의 싸움이 그러했다.
싸움이라는 게 어느 한 쪽이 굽히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화해라는 게 성립됐다는 건 한 쪽이 굽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이에선 굽히는 쪽은 늘 백이현이다.
"자. 아- 해봐."
"뭐 하자는 거야."
"너 먹여주는 거야."
"됐어. 나도 손가락 열개 있어."
"얼른! 곱게 받아먹어. 손 떨어져."
"떡볶이 먹으면서 유난은."
코피를 쏟았으니, 뭐라도 먹어서 손실된 혈액을 보충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작정 가까운 떡볶이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못 말리는 백이현. 게다가 한다는 말이 이건 1차란다.
그럼 앞으로 2차 3차가 있다는 말인데.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줄 아나보다. 게다가 지금은 먹여주겠다며. 아- 아- 거리며 신생아 놀음을 하고 있으니. 극장 로비에서 불꽃 튀며 냉전을 치르던 사람들 맞나 싶은 지경이다.
접시에 가득 담긴, 뽀얀 속살에 먹기 좋게 빨간 양념이 묻어 윤기가 흐르는 떡볶이를 쿡 찍어 입앞으로 갖다 주길래 못 이기는 척 받아먹었다.
"어이구. 잘 받아먹어서 예쁘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거다."
그리고, 여자들한텐 예쁘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잘 알아 둬.
새침한 표정으로, 빤히 눈을 맞추자. 좋을 대로 생각하란다. 괜한 기대를 했어. 예쁘다는 말에 혹해선 안 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어묵 국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자꾸 먹이려는 백이현 때문에 곤욕이었다. 결국,
"자. 이것도 먹어 봐."
"앗, 따거."
"왜 그래?"
츤데레 처럼 틱틱대며 받아먹고 씹는데 입안이 쓰렸다. 매운 게 닿으니 입술에서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팝콘 먹을 땐 괜찮았는데. 입안과 입술을 혀로 살살 문질러보니 생채기 같은 게 느껴졌다.
그 사이로 피가 나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요 입술이랑 입안이 따가워."
"그래? 난 괜찮은데…."
"되게 쓰리네. 왜 이러지?"
"그런 경우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응."
"나 몰래. 꼬깔콘을 먹었다던가. 꿀 꽈배기를 먹었다던가. 감자칩을 먹었다던가…."
"아니, 과자 안 먹었는데."
"뜨거운 걸 먹었다던가."
"그것도 아닌데. 어묵 국물 입에도 안 댔어."
"……설…마,"
설마 뭐? 반문하니 백이현은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휘저으며 에이 아니다. 하며 떡볶이를 마저 먹었다. 뭔데. 궁금하게 말을 하다 말어. 흘겨보자. 개구지게 웃는 백이현이 물컵을 들고 벌컥 벌컥 마시더니 궁금해? 하며 떠보기 시작했다.
아니 안 궁금해. 딱 자르자, 이건 만약인데… 하며 끝말을 길게 늘렸다. 별로 안 궁금해요. 떡볶이 드셔 얼른 먹고 가자. 백이현은 자는 모습도 아이 같더니, 먹는 모습마저 아이 같다.
입에 묻은 떡볶이 양념을 닦아주려 냅킨을 뽑아 쓱쓱 닦아주는데.
"넌 꼭 애같이. 입가에, 묻히고 먹어."
"그럼…."
이윽고, 닦아주던 팔목을 덥석 잡아. 손길이 멈추었고, 백이현이 하는 말에 사색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외간 남자와,
"격정의 키스신을 찍었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