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예상치 못 한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저게 뒤에도 눈을 달아놨나. 심장이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마친 그가 마무리를 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저벅 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려는지 내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정말 인가 보네."
"…뭐야, 장난친-"
걸려들었다. 아무래도 백이현 수작에 제대로 걸려든 것 같다. 떠본 건데 그 미끼를 덥석 물었으니. 나만 뭐 된 거다.
"왜 보고 있었는데. 나…."
"집 없는 사람도 아니고, 볼일 끝났으면 가. 빨리."
태연한 척 말했지만 태연하지 못 한 심장은 요동쳤다. 낮게 깔며 말하는 백이현이 부담스럽거니와, 하필 침대에서… 아무리 전에 같이 잠만 잤더라도 그때의 감정이 피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보고 싶으면, 이렇게 실컷 봐."
괜스레 시선을 피하는 내 얼굴을 잡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더 세차게 뛰는 심장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느새 목 울대까지 뛰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까 좋잖아. 얼굴도 잘 보이고."
긴장을 심하게 하면 눈에 띄게 움직이는 터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혹여나 백이현에게 들킬까 봐 안절부절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로 노심초사하는데,
'RRRRR……rrrrrrr'
고요한 적막감 속에서 옅은 진동소리가 났다. 그 핑계로 백이현 손 아귀에서 벗어나 가방 속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민혁 씨
잊고 있던 사람의 전화라는 사실에 죄책감이 서렸다. 백이현과 있는 동안 민혁 씨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 한 번을 생각하지 못 할 만큼.
백이현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 전화받기가 꺼려졌다. 내가 이 이 전화를 받는 순간 두 사람 모두에게 미안해질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전화야?"
"……………."
"받아."
"… 나중에 하면-"
"안 받으면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낀 불청객 된 기분일 것 같아. 불륜이라도 되는 것 같다고."
"무슨 말이 그래?!"
"네가 말하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눈치를 봐야 돼."
"……………."
"그러니까, 받아. 죄짓는 거 아니니까."
하는 수 없이 백이현 말에 따랐다. 베란다로 가서 받으려는데, 그냥 여기서 받아.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 서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동시에 기다림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벌써 나 혼자 두는 거예요?
"네?"
─ 정식으로 만나기 전에 벌써부터 바람난 거냐고요.
"……………."
─ 농담이에요. 농담. 그러니까 진짜 그럴 것 같잖아. 난 원래 쿨한 사람인데, ㅇㅇ씨한텐 쿨하지 못 할 것 같아서요."
"민혁 씨…."
─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죠. 보기보다, 잘 기다리는 타입이라.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리거든요.
"… 민혁 씨 그러ㅈ-"
─ 어떤 말도 아직은, 아직은 하지 마요. 듣고 나면 더 가까워질 수 없을까 봐 안 들을래요.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근데 나-"
─ 혹시, 잊어버렸을까 봐 다시 얘기할게요. 많이 좋아해요… ㅇㅇ씨.
"……………."
─ ㅇㅇ씨 많이 피곤하죠! 피곤하겠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네. 얼른 쉬어요.
"… 내일 연락드릴게요."
─ 좋은 꿈꾸고, 잘자요….
"… 네…민혁 씨도요."
전화를 끊으면서 무거워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백이현 말대로 답답한 미련 곰탱이라, 민혁 씨에게 상처만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민혁 씨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좋다고 하는데, 왜 나에겐 그런 용기조차 없는지. 그 상대를 바로 눈앞에 두고서 말이다.
"누가 보면 연인 사인 줄 알겠네."
"……………."
"애절하다. 애절해…."
"……………."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민혁 씨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사람 아냐. 함부로 말하지 마."
"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 내 앞에서 감싸고돌 만큼?"
"우리 집에 너무 오래 있었다. 그만 가. 이제-"
속상해진 나는 백이현을 떠밀어 문 밖으로 밀어냈다. 이렇게 밀어내 듯 내 마음속에서도 널 밀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새 문 앞에 세워진 백이현에게. 잘 가, 안녕- 하곤 매몰차게 문을 쾅 세차게 닫았다.
그리곤, 문에 기대어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지 않았다. 힘없이 주르륵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고개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미안해서……
한심해서……
바보같아서……
이런 나 자신이 싫어서…….
쏟아내려지는 빗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내리던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번쩍하더니 하늘을 깨뜨릴 만큼 매섭게 큰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리고, 정전이 찾아왔다.
고요해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무서워졌다. 외로움이 심장을 삼켰고, 주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비추는 액정. 민혁 씨의 부재중과 메시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확인을 누르고 불빛을 켜서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하지만 스위치로 전류가 흐르지 않는지 똑딱 똑딱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온 세상이 어둠 그 자체였다.
그렇게 1시간을 있으니 불안감이 커졌다. 비상 촛불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의지하던 휴대폰의 배터리도 깜빡깜빡, 곧 전원이 꺼질 것 같았다.
늘 맞이하는 밤이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오늘은 기나긴 어둠의 밤을 혼자서 헤쳐나가기엔 벅찼다. 계속되는 천둥소리에 압박감까지 느꼈다.
고작 천둥소리에 겁먹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능동적으로 숫자 키패드를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지속되었고, 깜빡이는 배터리에 초조해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 ……여보…세요.
목소리를 들으니, 안도감과 편안함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울먹거림이 목소리에 베었다.
"…불이. 불이… 안 들어와. 배터리도… 없어서 곧 끊길거야…."
─ 기다려 갈게. 끊지 말고 나랑 계속 대화해.
필요를 말하지 않아도, 백이현은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갈게라는 말에 안심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신을 보니, 그만큼 너에게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는 나란 걸 알게 되었다.
백이현이 끊지 말라고 안 끊길 전화가 아니었다. 백이현의 말을 끝으로 배터리가 나갔다. 꺼진 전화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여전히 현관 앞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한 나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에서도 배려가 묻어났다.
부스스 일어나서, 도어를 열었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날 위해 한 손에 가득 초를 들고, 휴대전화의 조명을 켜놓은 채 비에 흠뻑 젖어, 나갈 때와는 다르게 물이 뚝뚝 흐르는 몰골로 서 있었다.
우산도 있는 사람이 왜 비를 다 맞고... 그때, 현관 구석에 자리한 백이현의 우산이 눈에 띄었고, 쫓아내면서 우산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미안해, 나 때문에."
감기 걸린 상태에 백이현이라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목 따뜻하게 하라고 둘러 준 손수건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축축한 냉기만 담고 있었다.
한낱 내 감정에만 치우쳐 너에게 미안한 짓만 하고, 이런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와락 껴 안은 백이현에 의해 그의 품에 안겼다. 내 몸 젖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가워진 몸을 내 품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극장 안에서 차마 올리지 못 한 손을 지금은 그의 등으로 둘러 꼭 감싸 안았다. 내 체온이 너에게 전해지길… 그래서 나로 인해 받았던 상처가 아물길…
"아- 진심. 옷이 진짜 이것뿐이야?"
젖은 옷은 건조대에 널어 놓아서 갈이 입을 옷이 필요했다. 그래서 준 옷이 짧다란 발목에 알록달록한 바지가 일품이다.
이것 외에는 다 스키니 밖에 없는 터라. 급한 대로 내 옷을 주긴 했는데 티는 박스 티라 넉넉했지만. 바지는 어쩔 수 없이 작았다. 게다가 화려한 무늬가 한몫하니 금상첨화였다.
"뭐, 어때. 볼 사람 아무도 없는데."
"인간적으로 핑크에 꽃무늬는 너무하지 않냐?"
"그럼 어째, 그렇다고… 안 입고 있기도 그렇잖아."
아님, 젖은 옷 입고 계시던가요. 톡 쏘아보며 말하자, 무늬가 이게 뭐냐며 핀잔을 늘어놓던 백이현이 민망했던지 머리를 긁고는 조용히 내 옆에 앉는다.
"어딜 앉아! 넌 저기 가서 앉아."
"앉을 곳 없어. 그러다 촛불 쓰러뜨리면 어떡해."
변명은…. 백이현 말대로, 정전이 된 집안 곳곳에 은은하게 촛불이 가득 밝혀주고 있었다. 엉뚱한 생각 일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꽤 무드 있었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데….
정신 차려 한영원! 지금 무슨 생각을! 양 볼을 탁탁 쳤다.
"…… 기다…렸어?"
"뭘?"
"어둡고, 천둥치니까. 내 생각 밖에 안 나고 그랬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거 봐. 나 없으면 안 되겠지?"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가라고 한다! 어?!"
또, 틈만 나면 나오는 저 근거 없는 자신감. 나랑 있었던 일은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 그런 백이현을 흘겨보며, 허튼 소리 하지 마! 아직도 남아있는 기운이 존재하는지 백이현에게 막말을 해댔다.
사실은 백이현이 와서 좋으면서 말은 또 반대로 하고 있다. 한영원. 이렇게도 못 났을까. 어쩜 이렇게도…
단둘이, 촛불에 의지해서 한 공간 안에 있으니 여간 서먹 서먹한 게 아니었다. 이 상황에선 없는 일도 만들어서 움직여야 했다.
"달밤에 웬 청소?"
"촛농 떨어져서…."
"받쳐놔서 괜찮아. 그러지 말고 앉아 있어."
"아- 목말라 물 마셔야겠다. 너도 물 마실래?"
내게 할 말이 있는지 머뭇 머뭇 달싹이다 벌떡 일어나 팔을 끌어당겨 내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코 끝으로 잔잔한 꽃향기가 퍼졌다. 숨 쉴 때마다 자꾸만 내 향기가 맴돌았다. 내게서 가 아닌 백이현에게 내가 쓰는 바디 용품들의 향기가 짙게 베어 공기 중으로 퐁… 퐁… 떠다녔다.
그리고, 고요한 이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마음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져갔다.
이윽고 무겁던 그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말에 심장과 숨이 그대로 턱하고 멈추었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