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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말하라구.
작가 : 랑다정
작품등록일 : 201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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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 다른 행동
작성일 : 16-10-30     조회 : 593     추천 : 0     분량 : 9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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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내 귀를 의심했다. 비 맞고 피곤해서 이젠 헛것이 들리나. 하지만, 그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백이현에게서 떨어져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잘 못 들은 게 아니라고.

 

 

 

 

  "베개 하나만 줘. 자고 갈래."

 

 

 ​

 

  다시 상기시켜주는 백이현의 확인사살 덕분에 현실을 직시했다. 이젠 허락받는 말투가 아닌, 통보에 가까운 어조였다. 제대로 뻔뻔남으로 전락한 백이현. 역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생각이 확실해졌다.

 

 

 

  "이게, 한번 자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나 요기 바닥에서 쭈그리고 자도 잘 수 있어."

  "여기가 네 하숙집이라도 돼?"

  "나 코도 안 곯아. 죽은 듯이 잔다고. 되게 얌전해."

 

 

 

  그 와중에, 자신을 어필하며 자리까지 틀었다. 자신이 잘 공간까지 봐뒀다며,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걸리 적 거리지 않을 동선까지 계산했단다.

 

  아이고, 두야. 나더러 너랑 또 한공간에서 어떻게 자라는 거야. 집도 절도 없는 사람처럼. 왜 이렇게 우리 집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한영원, 너도 혼자 자기 무섭잖아, 편하게 날 안고 자는 인형이라고 생각해."

  "뭐, 뭐라고? 인형? 니가 인혀-엉?!"

  "그치? 인형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생겼지?"​

  "셋 샌다. 젖은 옷 갖고 나가라 너-!"

  "인정도 없이 매정하긴, 은인한테 막대하고! 빗소리 지금 들리지. 지금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데. 사람이 걸어 다닐 수가 없어. 홍수 날 것 같아."

 

 

 

 

  어휴, 이 선배야. 이것도 선배라고-

 

  어디서 농담 따먹기야! 침대 위에 있던 베개로 사정없이 보이는 곳은 죄다 두들겨 패줬다. 그만! 아프다고 이러다 사람 잡겠어.

 

  아 쪼옴! 저지하던 백이현이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 모퉁이에 무릎이 걸려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쿵! 소리가 너무 적나라해서 내 머리가 다 아픈 느낌이었다.

 

 ​

 

 

 

 

 

 

 

 

 

 

 

 

 

 

 

  결국엔, 소원대로 우리 집 바닥에 드러누워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은 채. 환자처럼, 환자 코스프레까지 선보이는 백이현. 얼음주머니를 얹는 건 소원이 아니었겠지만…

 

 

 

  "사람 잡으니까, 속이 시원하세요 후배님!"

  "…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짜 미안한 사람 맞냐.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머리에 이따시만한 혹 어쩔 거야. 열이 뜨끈뜨끈해."

  "그러니까, 까불지를 말았어야지."

  "하룻 밤 재워주는 게 어때서, 어차피 옷도 다 젖어서……."

  "………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래."

  "어쭈, 변 선배 입은 아직 살아 계시나 봐요? 입도 열이 훅훅 나 보실래요?"

 

 

 

 

  머리 부딪히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으시네! 다시 부딪혀야 제정신이 드시려나?

 

 

  그제야, 입을 꾹 다물고 아이고아이고 소리만 연신해댄다. 아우, 아주 쫑알 쫑알. 밤이 되니까 어찌나 입이 살아있는지. 투덜 투덜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수준도 못 되는 것 같다. 어쩜, 알다가도 모를 백이현.

 

 

 

 

  "어휴…."

 

 

 

  한바탕 웃지 못 할 폭풍이 몰아치고, 고요해진 방안. 밖은 여전히 빗소리로 가득했다. 아니, 아까보다 더 거세진 것 같았다. 창문을 뚫고 들어올 모양새로.

 

 ​ 결국 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누운 백이현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한들 엄연히 남녀이거늘… 어찌 태평하게 있을 수 있겠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다가 바닥에 누운 백이현을 봤다가, 바스락바스락 이불과의 마찰음이 빈번해지자,

 

 

 

 

  "잠… 안 와?"

 

 

 

 

  저도 안 자고 있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답하기가 민망하기도 했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잠자는 듯 숨소리 늘 내자, 잠꼬대했나 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부스럭부스럭. 백이현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이유는 나를 향해 몸을 돌아누웠기 때문이었다. 얼른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빗소리… 좋다."

  ​"……………."

  ​"조용한 밤도 좋고. ……도 좋고…."

 

 

 

 

  자…?

 

 

 

  말 끝을 흐리다가. 자? 하고 물으며, 다시금 질문을 했다. 바로 아래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백이현이 누워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렇다고 거리라고도 하기엔 너무 짧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복잡한 심경을 먹어치웠다. 보이지 않는 생각들이 공중으로 흩어져 어지럽게 만드는 밤이다.

 

 

 

 

  "… 잠이 오냐, 넌…."

  "……………."

  "나는 미치겠는데. 정작 본인은 세상없이 자네."

  "……………."

  "바보 같지. 참 답도 없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

  "……………."​

  "어쩌면, 나는 바보 온달이고, 너는 … 너는 …."

 

 

 

 

  … 예쁘다.

 

 

 

 

  이 모습을 형이 보면, 등신이라고 욕하겠지.

 

 

  어느새 침대 앞에서 턱을 궤고 날 바라보는 듯했다. 실눈도 들킬 것 같아서 몇 번 뜨지 못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예쁘다. 라고 말 한 뒤에 혼자 중얼대더니 수줍어서 얼굴을 가리고 난리가 났다. 크게 웃지도 못 하고 끅끅 웃으며 달밤에 웬 생쇼인지. 기가 막혀서 눈을 번쩍 뜨여 그런 너와 눈이 마주칠 뻔했다. 상상만 해도 민망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와 나와 나란히 옆으로 누운 백이현.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둔감해진 감각에, 치밀하면서도 민첩한 행동으로. 백이현이 침대로 올라오는 줄도 몰랐었다.

 

  백이현 이게 미쳤나 어딜 올라오는 거야. 부들 부들 떨고 있는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반복해서 매만졌다. 움찔. 움찔. 속눈썹이 다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그냥 잠이나 푹 들었더라면… 후….

 

 ​ 그의 가느다란 손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아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백이현 손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던가…

 

  그 손길에 노곤 노곤해져. 나도 모르게 잠이 들려고 할 때쯤, 볼에 닿은 말캉함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고 벌떡 일어날 뻔했다. 터지려는 숨을 겨우 억누르며 떨리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진정시키느라 에너지를 죄다 소비한 기분이었다.

 

 

 

 

  "깨어 있었더라면, 못 했겠지. 비밀이다. 자는 영원아."

  "……!!!……."

  "깨어있는 영원인, 깨어나도 모를 일이지."

  "……………."

  "자는 모습도 예쁘다."

  "……………."

  "잘 자라…."

 

 

 

 

  이불을 다독다독 덮어주고 어느새 조용히 내려간 백이현, 내가 깰까 봐 살짝살짝 움직이는 본새가 엉거주춤한 자태가 혼자 보기 참 아까웠다.

 

 

 

 

  예… 예뻐? 내가?

 

 

 

 

 

  가끔. 화장에 공을 들이거나, 안 입던 샤랄라한 원피스, 치마를 입으면 예쁘다고 해주던 백이현이었다. 근데 지금 이 상황 뭐지, 내 볼에 닿은 거 말캉한 게, 촉감이 촉촉했다. 숨소리가 가까이서 느껴지는 게 입술이 분명했다.

 

  몽롱한 기분만으로도 복잡한데, 나한테 왜? 그건,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는 거 아냐? 그럼 백이현이 날 좋아하는…

 ​

  에이 설마, 백이현은 남잔데. 당연히 한 공간 안에 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라고 하기엔 정황들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어슴푸레한 새벽에 머릿속에선 때아닌 진실공방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와서, 일어나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백이현이 허튼짓하는 동안 나는 간과한 것 밖에 더 돼? 웃길 거야 분명. 그래서 도저히 일어나 따질 수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

 

 

 

 ​

 

 ​

 

 ​

 

 

 

 ​

 

  아, 더워. 더워서 엎치락뒤치락 그러다가 어느새 2시간이 흘렀다. 말캉함이 닿은 볼은 여전히 간질간질, 미치게 간지러워 여러 번 문질렀다. 믿어지지도 않고….

 

  이렇게 속이 시끄러우니 잠 잘 시기를 놓친 건 당연했다. 벌써 새벽 3시인데 잠이 오지 않는다. 뜬눈으로 잠을 설치는 와중에. 어디선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세했지만 앓는 소리가 확실했다.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니, 푹 잠이 든 이현이가 내는 소리였다.

 

  아, 뭐야. 정말 뻗었나 봐. 나보고 잠이 오냐 더니 혼란만 안겨주고 본인이 더 잘 자네.

 

  몸을 던지다시피 침대로 눕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썼다. 잠이나 자자. 생각은 내일 아침에 마저 해도 늦지 안….

 

 

 

 

  "흐… 끄 으응…."

 

 

 

 

  머리까지 둘러쓴 이불을 내리고 다시 백이현이 누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앓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바짝 다가가서 숨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끄응… 흐으응…."

 

 

 

 

 

  강아지가 앓는 것처럼 안쓰러워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혹시나 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소스라치게 화들짝 떼어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불을 걷고 내려가 백이현의 몸을 더듬자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고 열 투성이었다. 이마는 펄펄 끓는데. 백이현은 추운지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어제 그 비를 맞고, 감기가 제대로 도진 게 분명했다. 몸살까지 겹쳐 제대로 앓게 생겼다. 우선은 열부터 식히고 보자. 먼저 응급처치로 옷을 벗겨야 했다.

 

  심호흡 한 번 크게 쉬고 티를 돌돌 말아 올렸다. 안 보려고 노력했지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을 붉히며 찬수건을 가져와 몸에 올려두고 이마에도 올렸다.

 

  워낙 열이 심하다 보니, 뜨거운 몸의 열기가 차게 느껴지나 보다.

 

  공중에 손까지 휘휘 저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미간이 구겨져 애타게 찾는데, 도무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손을 잡으며 괜찮다고 안심을 시켰다. 몇 번을 토닥토닥이며 말하자. 스르륵 손을 내리고 구겨진 미간도 도로 펴졌다.

 

  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주고, 식은 수건을 다시 적셔서 얹어주었다. 이렇게 아픈 백이현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다. 늘 나더러 아프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아프지 마, 백이현…."

 

 

 

 

 

 

 

 

 

 

 

 

 

 

 

 

 

 

 

 

  "뭐어? 완전 노골적으로 자고 간다던?"

 

  와- 변 선배 최고다. 완전 내 스타일.

 

 

  흥분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말하더니, 목이 아픈지 가볍게 문지르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빨대를 쪼옥 빨아들이는 고우리. 그 성량으로 쉴 새 없이 말하니 성대에 무리 올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 아니 그래서.

 

 

 

  "그래서, 넌 뭐라 그랬는데?"

  "뭘 뭐라 그래, 안 된다고는 했지."

  "끝? 설마 허무하게 끝?!"

  "… 차마 젖은 옷 입고 가라고 할 수 없겠더라."

  "기집애. 솔직히 처음부터 자고 갔으면 바랬던 거 아냐?"

  "야, 고우리!"

  "그래서 간 사람 다시 불러들인 거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갑자기 천둥에. 정전까지. 무섭잖아! 스위치는 먹통이고!"

  "음~ 여우 같은 년. 두꺼비 집은 올려봤고?"

 

 

 

 

  그게 뭐야. 몰라? 어, 몰라 그게 뭔데. 너 나이가 몇 갠데 그걸 몰라! 거실 어딘가에 네모난 케이스 붙어있는 거 있어 불 나갔을 땐 누전 차단기 다시 올리면 불 들어오는 경우 많아 변 선배가 그거 안 올려주던? 응, 안 올리고 촛불 켰…

 

  먹던 빨대를 급하게 떼고,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하는 고우리. 얘는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웃을 때는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가끔 공공장소에선 이러면 모른 척하고 싶다. 가리지를 않아요. 때와 장소라는걸. 이럴까 봐 좋은 뷰가 트인 창가를 포기하고 이목을 덜 끄는 구석진 곳으로 왔구만.

 

 

 

  "와, 너네 쩔어. 너무 귀엽다. 너 말고 변 선배."

 

 

 

 

  끝말을 맺기도 전에 또다시 웃음이 터져서 한참을 웃어댔다. 웃으려면 같이 웃지 혼자만 웃고, 지켜보던 나는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아줌마같이 웃으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경청하며 눈을 반짝 반짝이는 우리.

 

 

 ​

 

  "작정했네, 작정했어. 근데 밤에 간호해 주면서 별일 없었어?"

  "또 무슨 음란마귀가 씌이셨을까."

  "음… 달콤한 입술 위에 chu 라던가… 왜~ 노래도 있잖아. 입술 위에 Chu~ 내 볼 위에 Chu~"

  "무. 무슨? Chu고 나발이고, 얼어 죽을-"

 

 

 

 

  간밤에 도둑 볼 키스를 했던 백이현이 떠올랐다. 절묘하게 노래와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겪은 나로서는 그 말은 차마 하지 못 했다. 무엇보다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우리 같은 성정에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3자 대면하자고 성화를 지길 테니까.

 

  그래서 그날…. 술 취해서 한 취중키스도 말하지 못 했다. 고백 한 것도 아니면서,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키스를 해오더라고 말하면… 혹시나 백이현이 안 좋게 비추어질 까봐서였다.

 

  안 그래도 주위에 여자 많은 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내가 말하긴 김샐 것 같고, 아무튼 잘 해봐."

  "기승전 없이 뭘 잘해보래."

  "있어. 두고 보면 알아. 내가 돕지 않아도 나름 잘하네."

  "… 뭘 말야? 알아듣게 말해. 이젠 혼잣말도 해?"

  "아무튼 간에 모름지기 때가 있는 법."

  "우리야, 네가 그런 말하니까. 웃겨."

  "간만에 바른 소리도 못하니. 그래서, 여전히 변 선배는 연락 안 돼?"

  "아직… 그날 이후로 연락 없어."

 

 

 

  그 후로 학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간호를 하다가 잠이 푹 들었는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백이현은 없었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옷도 없어졌고, 목에 메어준 손수건도 함께 사라진 빈자리엔,

 

 

 

 

  '아- 진심. 옷이 진짜 이것뿐이야?'

 

  '인간적으로 핑크에 꽃무늬는 너무하지 않냐?'

 

 

 

 

 

  꽃무늬에 핑크는 너무하지 않냐며 칭얼대던 그 잠옷이 널려있었다. 세탁까지 해서 섬유 유연제 냄새까지 솔솔 풍기며 떡하니 널려있는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못 듣고, 어쩜 백이현이 나간 줄도 모르고 잠만 쿨쿨 잤는지.

 

  심지어 침대에 곱게 누워있는 내 모습을 보니 백이현이 옮겨 놓은 게 틀림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하고선 빨래까지 해 놓은 채 말도 없이 사라졌다.

 

  계속 전화랑 문자를 했지만 답도 없었고. 주변 선배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는 곳이라도 알아두는 건데.

 

 

 

  백이현. 잠수라도 탄 거야 뭐야. 누가 이딴 빨래해달랬어?

 

 

 

  마음이 허했다. 채워진 것도 없을 텐데…그래서 무뎌졌을 텐데… 공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단지 백이현이 사라진 건데. 그런 건데.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이 예고도 없이 밀려들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내 마음속에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자리 잡더니…

 

 

 

 

 

  '…… 기다…렸어?'

 

  '어둡고, 천둥치니까. 내 생각 밖에 안 나고 그랬어?'

 

  '거 봐. 나 없으면 안 되겠지?'

 

 

 

 

 

 

 

  응, 너 없으면 안 되겠어.

 

 

 

 

 

 

 

 

 

 

 

 

 

 

 

 

  머리가 묵직하고, 온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 만 같았다. 그래, 몸살이 안 오고 배겨. 옮겨도 제대로 옮았다. 옮길 매개체가 명백하니, 그럴 수밖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끝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서 떴다. 흐릿한 시야로 천장만 보였고, 밖에서 들려오는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는 귀에서 윙윙 울려 들렸다.

 

  밤새 욱시근한 두통에 끝도 없이 시달리다 보니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도 못 해서 그런 건가. 도무지 맥을 못 추겠다. 하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나야 했다.

 

  바쁜 방송 일정으로 정말 가끔, 얼굴 잊기 전에 한 번씩 오시는 안교수님이 보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안교수님의 부름은 꼭 가야 했다.

 

  흔한 일도 아닌 데다가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고, 앞으로 배우로서의 방향도 어떻게 잡아주실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오는 게 힘들겠지만, 상쾌한 공기도 맡으며 걷는다면 좀 나아지겠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연극을 하나 준비 중인데 배역을 맡기고 싶어서."

  "네? 저한테요?"

  "응. 근데 과 애들은 오디션을 치러야 한다고 밀어 부치는 바람에…."

  "아, 네…."

  "반대로 내가 밀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러면 영원이에게 특혜를 준다고 말이 많을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아뇨, 괜찮아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볼 땐 그 배역 네가 하면 딱인데."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거. 경험이다 생각하고, 대본이 미리 줄 테니까 연습해. 오디션 날짜는 일주일 후 오후 2시. 학교 소강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네 실력을 믿으마. 내 안목이 죽지 않았다는 걸 네가 증명하는 거야.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를 좋게 봐주신 교수님 덕에 특혜를 보는 건 좋지만, 그랬다간 과 선배들에게 찍힐 게 분명했다. 후배들에게도 좋은 평판이 돌아다니진 못 하겠지.

 

  지금도 좋은 건 아니겠지만, 이것보다 더 나빠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혜도 특혜 나름이지. 어쨌든 낙하산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본다는 거니까. 굳건한 입지를 향하는 길을 충실히 가면 되는 거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나오는 거북이처럼….

 

  껑충껑충 빠르게 뛸 수 있는 실력 때문에 당연히 우승을 하겠지 하고 자만했던 토끼, 결국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어? 순간의 달콤함이 평생의 쓰디쓴 기억이 되게 해선 안 되니까.

 

 ​

 

 ​

 

 ​

 

 

 

 ​

 

 ​

 

 

 

 

 

 

  굳게 마음을 먹고 방을 나와 대본을 가방에 넣었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머리가 어질해졌다. 벽을 짚고 머리를 받쳤다. 시야가 흔들려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약이라도 사 먹고 오는 건데, 급하게 나오느라 약국 들를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 갈 힘조차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보이는 출구를 향해 한 발을 힘겹게 내디뎠다…

 

 

 

 

  ​"영원씨!

  "……………."

  "​큰일 날 뻔했어요."

 

 

 

 

  몸살 기운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는데, 다행히 누군가가 받쳐주었다.

 

  익숙한 목소리…. 오랫동안 들은 건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편안했다. ​항상 같은 톤으로 내 걱정. 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또한…

 

 ​ 머리가 아파서 눈을 뜨지 못 했다. 인사조차 하지 못 한 상황에서 오해하기 좋은 포즈로 안겨있었다. 서둘러 빠져나오려는데.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 하게 했다.

 

 

 

 

  "완전히 불덩인데. 아프면 아프다고 말-"

  "……………."

  "대체 언제부터 아픈 거예요."

  "저… 괜찮아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후… 미안해요. ​​​"

  "… 민혁 씨가 왜요."

 

 

 

 

  내가 미안하죠. 민혁 씨 마음 받아주지도 못 하고, 내치지도 못 하고 우유부단한 제가 더 미안해요. 어쩌다가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됐는지. 민혁 씨도 참 …….

 

 

 

  "병원 안 갔다 왔죠. 병원 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조금 쉬면 돼요."

  "​말 들어요. 참는 거 그만하고, 영원씨 자신한테 좀 솔직해져봐요."

 

 

 

  할 말이 없었다. 비단 내 몸이 아픈데 참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 앞에서 솔직한 적도 없고 늘 나 자신을 꽁꽁 숨겨두었다.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그러고 보니 민혁 씨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꾸 내 허물을 들키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난 민혁 씨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그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맘 받아 달라는 거 아니에요."

  "……………."

  "​​그래서 거절하는 거라면, 내가 싫어요."

  "……………."

  "병원 가요. 가서 치료받고 건강한 모습 보여줘요."​

 

 

 

 

 

  영원씨, 아픈 모습은 내가 못 보겠어요.

 

  심장 속까지 저릿한 미안함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민혁 씨를 바라보았다. 잡은 양팔을 문지르며 다독이는 그가 간간이 웃었다. 부드럽게 설득하는 표정을 담고서 말이다. 이어서 내 이마를 짚고 얼굴을 감쌌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눈 주위도 뜨겁고. 열이 눈으로 가나…. 눈을 감으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우는 거 아닌데, 왜 눈물이 나….

 

 

 

 

  "거 봐요. 몸이 욕해요. 아픈데 병원도 안 데려간다고."

 

 

 

  살도 빠졌네. 완전 반 쪽 됐어요. 알아요?

 

 

 

 ​ 안쓰러웠던지 감쌌던 손으로 눈가를 닦아주곤 다시 자신의 품으로 꼬옥 품어주었다. 민혁 씨가 숙여서 나를 안았기 때문에 그의 어깨에 턱이 닿았다.

 

  안아주는 사람은 민혁 씨인데, 지금 이렇게 아플 때 옆에 있어주는 건 백이현이었으면 … 그랬으면 좋겠다고 … 생각 들었다.

 

  백이현이 안아주던 그날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머리는 아닐지라도 늘 마음과는 어긋났지만, 포근하고 기대고 싶게 해주던 다정함을… 몸은 기억한다고…

 

 

 

 

  "…알겠어요. 민혁 씨 말 대로 할-"

 

 

 

 

  눈을 뜨고 무심코 정면을 바라본 복도에는,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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