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백이현, 뭐 해. 가자-"
"네. 선배님 곧 따라가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적당히 하고 와. 과대표 후배님. 오늘 같은 날 모범생 티 내면 미움 산다."
웃으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일 있을 교수님 수업 준비로 분주했다. 그럼 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선배는 사라졌다. 손에 들려있던 포트 폴리오를 정리해서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두었다.
내가 2학년 과 대표이기도 했고, 교수님이 워낙 방송일로 바쁘신 관계로 특별하게 교수님이 하실 일 아니면, 내가 대신해드리곤 했었다.
오늘은 연극부 선후배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날인데. 말이 좋아 친목 도모지. 며칠 후 신입생들과 처음 가는 엠티에서 어떻게 골려 줄지 도모하는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잘해주면 어디 가 덧나나. 늘 눈물 콧물을 쏙쏙 뺀 후에야 잘해주니 말이다.
작년에 나도 당했던 일이었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엠티였다. 술을 진탕 먹고 바닥에 굴리고, 차디찬 바다에 입수시키고. 안 그래도 술에 취약한데. 다음날 상처투성인 내 몸을 보고 경악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차원을 높여서 더 업그레이드한다고 하긴 했는데.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아니라 받은 것에 몇 백배를 돌려주겠다는 심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돌아올 2박 3일간의 엠티가 심히 걱정되었다.
"야. 막둥이 너. 술 더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아- 너 이제 막둥이 아니지. 착각했다. 쏴리~"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새로운 막둥이를 뽑아야겠네."
"적당히. 적당히. 대~충. 마실 생각하지도 말라고."
작년에도 왔던, 경치가 좋은 콘도에서의 엠티가 시작되었다. 신입생 때, 내가 제일 막둥이같이 생겼다고 막둥이라고 부르는 선배님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다에서 조금 놀다가 학년 별로 메뉴를 만들어 거한 저녁을 먹은 뒤. 신입생들이 준비한 공연을 다 보고 나니 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
군기가 바짝 든 신입생들이 선배들 방으로 불려들어와 앉아있었다. 홀에서 재롱잔치 비슷한 공연들에 흥이 젖어 있어서 다들 들떠있는 상태였다.
작은 공연에서부터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춤을 선보이는가 하면 노래까지 아주 끼들이 똘똘 뭉친 신입생들이었다. 역시 해년마다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작년에 내가 신입생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못하는 게 없는 요즘 애들. 확실히 세대 차이라는 게 있는가 보다.
"너희들 준비 많이 했더라. 오리엔테이션 저리 가라 할 정도던데. 이번 년도 애들 아주 기대가 돼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예뻐하는 단계는 아니니까 착각은 말고."
"아, 제 특기가 착각입니다만."
"이놈 봐라. 아주 잔망 덩어리네."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다 보니 취기가 오르는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넉살 좋은 후배들이 있으니, 이제 맘 편히 나가도 되겠다 싶었다.
살짝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유독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는 여자 후배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동그란 눈망울을 가진 후배였는데, 그저 순전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살짝 빠져나온 나는 대본을 손에 들었다. 얼마 후에 있을 1,2학년 합작의 공연 준비로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올겨울에 졸업을 앞둔 4학년이라서 느긋한가 보다. 졸업이라 그리 편안하지 만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2학년인 나에게는 이런 시간도 아까웠다. 배울 부분도 많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술도 못 하는데. 앉아 있어 봤자 술맛만 깰 뿐이었다. 밖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으로 밤바다가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함께 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 대본을 보며 리딩하고 숙지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아줌니. 아줌니! 우리 어매. 어매 못 보셨어라?"
"오메 깜짝이야. 애 떨어질 뻔했네. 해 질 녘에 무신 소리여!"
"어매가 없어졌어라- 어매가!"
"아따 옥분아, 니 어매를 와 여기서 찾고 지랄이냐!"
"분명 여그는 안 왔지라. 다 뒤져도 없었는디 대체 어딜 가신 거여라. 속이 타 죽것네-"
"허구한 날 시집 간 딸래가 찾아 댕기쌌고, 참말로 니 애비도 몹쓸 사람이구먼. 쯧쯧."
"우리 어매랑 아버지 욕하지 마시어라. 우리 어매 지금 많이 아파서 그런것인께."
"허이고, 애비라고 감싸고 돌기는-"
"누나. 엄니. 무슨 일이여?"
"인철아! 오는 길에 혹시 우리 어매 못 봤냐?"
"집에 안 오셨어라?"
"그러니께. 지 어매를 와 여기서 찾는지 모르것당께."
"누나 엄니 말하는 거제? 내는 못 봤지라 … 시방 핵교에서 오자녀. 우째… 아즉도 안 들어오셨어라?"
"응, 분명히 마당에 앉아 계셨는디…."
"울지마러, 형아 오면 알지도 모른께. 쪼메만 지달려봐."
"오케이! 늘 여기서 걸렸는데. 이대로 가면 될 것 같아. 근데, 옥분이 감정이 조금은 부족 한 것 같다. 조금 더 다급하고 속상함을 살려봐. 감정을 실어서-"
"응 알겠어."
"그리고 아줌마랑 인철이도 아주 좋아. 이제 다음 씬-"
지금 1학년은 죄다 붙잡혀있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2학년들끼리라도 모여서 한참을 대본을 보며 맞춰 보고 있는데, 두세 명의 여학생들이 울면서 숙소 밖을 나오고 있었다.
기어이 울린 모양이었다. 뒤따라 나오는 여학생이 앞서간 여학생을 달래주고, 남학생들이 줄줄이 나오고,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았다.
"다들 어디 가는 거예요?"
"아, 4학년 선배님들이 신입생들 담력 테스트 시키시겠대요."
뒤처져서 걷던 후배 한 명을 잡고 물었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암울한 표정이었다. 그날 비밀리에 진행한다던 프로젝트가 이거였나 보다. 선배들 참 하드코어네. 업그레이드가 어쩌고 하더니.
얼른 발길을 따라붙었다. 술이 취한 선배들이 걱정되기도 했고 분별력 없이 행동하다간 사고라도 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라고 막 가는 거야. 지금 날도 어두운데, 그리고 산은 길 잃기도 쉽고. 정말 무모한 선배들이 아닐 수 없었다.
공연이 코앞인데 연습은 안 하고 저렇게 술에 취해서 추한 모습만 보이다니, 이걸 후배들이 배울까 봐 창피해졌다.
빠르게 간 곳은 산행 입구였다. 작년엔 산은 안 타봤는데. 걱정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산행 입구엔 표지판과 가로등이 있기는 했지만, 오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명씩 짝 지어서 갈 거야. 온 순서대로 남녀 두 명씩 서봐."
여기저기 술렁이고 뭉그적대며, 주춤 주춤 서 있자. 답답해하던 선배들이 버럭 하기 시작했다.
"니들 선배 말이 말 같지 않냐? 배우는 깡이 있어야지. 그러고도 니들이 연극 영화과야! 사회 나가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있어. 이깟 담력 테스트가 뭐라고 벌벌 떨어 떨길!"
목소리가 제일 큰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마지 못 해 일렬로 줄을 서는 신입생들. 위험한 일이었다. 이럴 때 강준 선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카리스마가 있어서 선배들도 꼼짝 못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 선배들 통제도 해주고, 이렇게 일이 진행되게 두지 않았을 텐데. 하필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선배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갓 신입생을 벗어난 고작, 2학년인 내가 나서서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2학년 남학생 몇 명을 선배들 몰래 1학년 몇 명과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술이 상당히 취한 남학생들이 많아서 이대론 위험했다. 공연 준비한다고 빠진 2학년 빼고 죄다 술을 마셔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한 것이었다.
"어? 왜 한 명이 비어."
"그러게, 신입생들 남녀 각각 짝수 아니었냐?"
"짝수 맞는데요. 남학생 한 명이 배탈이 심하게 나서 근처 병원 갔어요."
"지랄. 아주, 가지가지 하십니다. 배탈도 풍년이다."
인원을 체크하던 여자 선배가 꼬라지가 제대로 난 얼굴이었다. 다들 남녀 두 명씩 줄을 섰는데, 하필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남학생도 아니고, 여학생이라니. 그리고, 자세히 보니 아까 방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던. 귀엽게 생긴 여자 후배 같았다.
"신입생이랑 같이 갈 사람 손."
여자 선배가 마지못해 인원을 채우려고 선배들과 동기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자 아무도. 선뜻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겁쟁인가.
"뭘 선배들까지 끼워! 그냥 혼자 보내."
귀찮은 듯한 어투로 남자 선배가 말하자. 마지막에 서 있던 1학년 여자 후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이 모든 상황이 낯설 텐데,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곧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후배가 너무 안쓰러웠다. 손을 바들 바들 떨면서 안절부절 못 하던 후배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래. 혼자 가야 제대로 담력 테스트가 되지."
"너무하세요. 선배라고 권위 휘두르는 거 무조건 옳지 않아요. 그럼 저 안 할-"
"제가 할게요!"
저요! 저요!
여자 후배가 선배님을 향해 과감하게 말하는 걸 보다 못 한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잘라버렸다. 그리고 후배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놀란 듯 고개를 지켜드는 후배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여있었다. 이 상황이 무서워서가 아닌, 꽤 오래 참았다가 터진. 분노의 눈물 같았다. 꽤 성격 있네.
"하여튼, 저 지랖지랖- 변지랖. 아무도 안 한다는 걸."
"저도 담력 테스트해 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해도 되죠?"
"네, 그러세요 후배님. 어련하시겠어요."
멋쩍게 웃으며, 상황을 둥글게 둥글게 넘어갔다. 다행히 취중이라 후배가 한 말을 못 들은 선배는 개의치 안 아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여자 후배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물끄러미 쳐다보며, 감사합니다. 짧게 말하는 후배. 감사할 것까지야... 나쁘지 않았다. 흔한 인사말이었지만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웬만하면 말이에요."
"……………."
"신입생 벗어나서 입지 굳힐 때 까진 조용히 있는 게 좋아요. 찍혀봤자 좋을 게 없거든."
"……………."
"아까같이 선배님들 말에 토 달면, 바로 찍혀요. 앞으로 4년이 가시 밭 길이라고요.
"……………."
"그렇다고 내 말까지 곡해해서 듣진 말고요."
"……………."
"나죽었음네 하고 살다 보면, 살만한 날. 언젠간 오지 않겠어요?"
아무 말없이 듣고 있던 후배와 나 사이에서 적막감이 흘렀다. 되게 여려 보였는데, 가까이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직 무어라고 말 하긴 그렇지만….
"왜 이러세요."
"오해하지 마요."
"그러니까 왜요!"
"술 많이 안 마셨나 봐요."
"호랑이 굴인데, 정신 차려야죠."
"오, 세다."
가까이 가서 킁킁 냄새를 맡으니, 이상한 변태 보듯이 하는 여자 후배. 대답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공이 장난 아닌, 외유내강인가 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