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소품 거기에 두고. 오케이. 준비됐습니다!"
"15분 후에 선생님 도착하시면,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1,2학년이 처음으로 합작한 공연을 선보일 날이 이 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다들 새벽같이 극장으로 모여,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다시 점검에 들어갔다. 오늘은 살아계신 희극의 역사라고 해도 과분하지 않은 윤여정 선생님께서 오시는 날이었다.
특별히 1,2 학년의 연기를 지도해주시겠다고 오시는 터라 1학년은 입학하고 첫 선보이는 공연이기 때문에 들뜨면서도 가슴 졸이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반면 2학년은 조금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나름 1년 선배라고 말이다.
"긴장되죠. 코로 들이쉬고, 후우- 이렇게 입으로 내뱉어 봐요. 숨을."
"아, 네-"
엠티에서 얼굴을 익힌 우리는, 1,2학년 합작 공연에서 다시 만났다. 1,2학년의 합작은 총 세 개의 작품으로 그에 맞게 세 팀으로 구성되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작은 역할이라도 참여시키려는 의도로 진행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불만이 없었다.
세 팀 중 우리는 2팀이었고, 2팀이 맡게 된 작품 중 원래 배정되어 있던 배역의 학생이 부상을 입는 바람에 급하게 체인지 된 것이었다.
예비군이 없기 때문에, 우리 팀에서 1인 2역을 시키든. 다른 팀에서 데려와야 했다. 머리를 싸메고 고민하다 결국 1팀에서 섭외해 오게 됐는데. 그게 한영원이었다. 어쨌든, 가까이서 같이 공연 준비를 한다는 것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어때요? 긴장이 좀 풀려요?"
"조금요."
알려 준 대로 곧잘 따라 하는 영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영원이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잔뜩 있는 표정으로. 무겁게 입술을 떼고.
"…저번…에요…."
"…뭐가요?"
"…다치…셨잖아요. 저 때문에…."
"걱정 말라고 했죠. 괜찮다고."
"제가 남한테 피해주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그래요?"
"… 친한 사람 빼고요."
"그럼. 친해져요 우리. 그럼 안 미안해할 거죠?"
"그, 그런 뜻이 아닌…"
눈이 커다래졌다. 안 그래도, 동글 동글 귀여운 눈망울이 커지니까 더 귀여웠다. 실실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어지간히 미안했나 보다.
나만 보면 물어대는데,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왜 넘어져서 영원이를 걱정시키는 건지 한심한 녀석 하고 말이다.
몇 바늘 꿰맨 게 아직은 완벽히 아물지 않아서 아프지만, 영광의 상처라 여겼다. 내가 아픈 건 몰라도 돼요. 그 대신, 두고두고 가까이 있어주면 되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앞으로 친해지기에요. 어서요. 약속-"
"네? 아…."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손을 내려다보며 고갯짓하자. 그제야 아. 하며 새끼손가락을 드는 영원.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어린애 아닌데.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입이 꼬물꼬물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싸인 복사 코팅까지 할 건 다 했다. 그런 틈을 비집고, 딴 말하기 없기에요. 이제 절친인 겁니다.라고 쇄기를 박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영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접어 들어갔다. 어느 정도 긴장도 풀린 것 같고.
"곧 선생님 오시는 대로 시작한데요. 잘할 수 있죠?"
"…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어요."
"왜요? … 저번에 혼난 것 때문에요?"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그러네요."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진 그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2팀으로 옮긴 후 맡은 배역은 꽤 비중이 있었다. 주인공 역할은 아니었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얽히는 과정에서 빠져선 안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원하시는 감정에서 조절이 안 되고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특히 눈물신에서 그러했는데, 절제하며 우는 장면에서 그냥 펑펑 울어버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여러 번을 거듭 연습할수록 되려 대사도 꼬이고 눈물은 여전히 홍수였다.
조급해진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다그치고 따로 불러 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신을 넘기곤 했다. 그 걱정이 앞서서 자신감이 상실 한 영원을 보니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될지 몰랐다.
"자신에게 용기를 줘요. 잘할 수 있다고. 해낼 거라고. 알겠죠?"
확신 있게 말하고 어깨를 다독였다. 유난히도 작은 어깨 축이 늘어져 안타까웠다. 생각 같아선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애처롭게 바라보자.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는 영원. 감사합니다. 이따 봬요.
"언니는 어댈 그라고 쏘댕기는거여."
"기집애 일찍 일찍 댕기라니께. 넘다 늦게 다니지마. 배고프제? 씻고 밥 묵자."
"누굴 식충이로 아는 것이여. 꺼떡하면 뭣 먹어라.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아주 지겹당께."
"니가 뭘 몰라서 그려. 굶어 죽는 사람이 시상에 을매나 많은디."
"그라서 언니는 잘 살았어라? 잘 먹어서 잘 살 았냐고."
"니……."
"상철오빠 버리고 조건 좋은 남자랑 결혼하니께 다 우습게 보이제?"
"옥경이 니…."
"이 사실을 말순 아줌니가 아시면 큰일 날 것이고. 우리가 이 마을을 떠야 할거시여."
"나라고 속 편히 산 거 아닌께. 함부로 말 허지 말어."
"구질구질한 집 구석에, 맨날 놀음판이나 전전하면서 술먹고 우리 패기나 하는 아부지. 언니는 싫었잖애. 역겨 울 정도로 싫어했잖애. 그래서 지금 형부랑 결혼 한 거 잖여. 아님 아니라고 말 해보라고! 순딩이 같은 얼굴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내는 궁금해 디지것응께 말해보라고!"
"옥경이 이년아! 그 입 안 다물래!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인거여!"
"…어…어매…."
"니가 그라믄 쓰것냐, 언니가… 니 언니가 그 세월을 어쩌 살았는디. 니가 속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시냐. 어?"
"어매… 지는 괜찮으니께. 울지 마셔라."
"그라믄 안된다. 언니한테 그라믄 안 돼…." "그러니… 어매가 바보 … 소리 듣는 거 아니여라…. 동네 사람들이 … 뭐라 하는지… 들어나… 보셨…어라? 어매… 보고 바…보라요. 도망도 …갈 법한디……멍청하게 참고 산다고 바보라………미련허다고………"
위태롭게 대사를 이어가더니, 결국 눈물을 보이며 대사가 먹혀 들어갔다. 옥경이 역할의 한영원은 아직 울면 안 되는 대사였다. 악에 받쳐 말하다가.
언니인 옥분이에게 뺨을 맞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야 하는데… 또 다시 여기서 걸려 눈물을 쏟아내는 한영원이었다.
조용히 지켜보시던 선생님. 주변에 학생들이 오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우는 영원이에게 다가가지도 못 하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 했다.
보다 못 한 선생님께서 무대로 올라오셨다. 다독여주신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를 하고는 추 스러졌는지 다시 리허설이이어졌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또 걸리고 말았다. 그러길 여러 번 그때마다 선생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어…어매…."
"니가 그라믄 쓰것냐, 언니가.. 니 언니가 그 세월을 어쩌 살았는디. 니가 속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시냐. 어?"
"어매…지는 괜찮으니께. 울지 마셔라."
"그라믄 안된다. 언니한테 그라믄 안 돼…."
"그러니… 어매가 바보 … 소리 듣는 거 아니…여라…. 동네 사람…들이 … 뭐라하는지… 들어나… 보셨…어라? 어매… 보…고………"
죄송…합니다.
눈물을 한없이 쏟아내며 아예 주저 않아 버리는 영원. 하면 할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상태만 악화되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윤여정 선생님께서 앞 좌석에 앉으시며 입을 떼셨다.
"얘 누가 뽑았니. 얘 누가 이 역할 맡겼어."
"……………."
"울 때 안 울 때는 구분해야지. 어쩜 그렇게 분별력이 없어!"
"……………."
"주위를 한 번 둘러봐.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
"눈물 흘린다고 봐주고, 안쓰럽다고 봐주고 그런 거 기대하지 마. 얘 너네 집에서처럼 그런 거 받아 줄 사람 아무도 없어."
"……………."
"이 바닥이 그런 거야. 실제로 드라마 촬영 때 이런 식 이면 잘려. 너 때문에 낭비한 테잎값만해도 네 출연료를 넘어서니까. 테이프뿐인가. 조명에 스텝들은 무슨 고생이고. 더 피해 보기 전에 잘라야지. 왜? 너 말고 할 사람 많거든. 너보다 예쁘고 목소리 좋고 연기 잘 하는 사람이 줄을 섰어."
"……………."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될까. 독창성. 개성이 필요해."
"……………."
"희극이든 정극이든, 연기라는 것을 할 사람이 자기감정 하나도 제대로 조절 못 하면서 연기라는 걸 하겠다고 앉아 있어?"
"……………."
"연기 계속하고 싶거든. 비우고 와."
"……………."
"가슴속에 담아두면, 절대 연기 못 해.'
"……………."
"연기의 혼을 담을 공간조차도 없는데. 그 상태로 무슨 감동을 선사할 수 있겠어."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 부들 떨렸다. 무대 위에서 윤여정 선생님의 말씀을. 아주 가느다란 바늘이 되어, 영원이의 몸속에 박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긴장해서 더 안 되는 걸 텐데 가슴을 도려내는 말만 하셨다. 이를 지켜보는 내가 마음이 쑤시고 더 아파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보는 앞에서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한 거나 다름없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기가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로 얼룩진 눈물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면서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선생님의 뼈가 박힌 야단을 다 듣고 나서야, 빠른 속도로 걸어내려와 무대 뒤편으로 해서 나가버렸다. 그제야 숨 막힌 분위기가 풀리고
"아무도 따라나가지 마. 잘한 거 없어. 연극 영화과가 장난도 아니고. 저런 정신 상태로 무슨 연기야. 내버려 둬라 얘-"
따라나가려는 여학생들에게 일침을 놓으시고, 우선 옥경이 역할만 뺀 나머지 학생들과 계속 리허설을 이어나가셨다. 눈치를 살금 보다가 기회를 포착해서 무대 뒤편과 이어진 복도로 나가자. 밖으로 통하는 문이 끼익 닫혔다. 그새 저기로 나갔나. 놓칠세라 얼른 쫓아 나갔다.
희미하게 보이는 옷자락을 따라갔다. 건물 뒤편을 지나서 안 쪽으로 들어서니. 넓은 터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거기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영원이가 있었다.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흐느끼는 소리와 어깨가 마구 들썩였다. 아까 힘내라고 잘하라 수 있다고 해줬는데. 말만 했지 막상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게 없어서 미안해졌다. 옆에 살포시 앉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이걸로 닦아요. 목 놓아 울진 말고, 목 상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슬며시 드는 영원. 그새 눈이 부은 것 같다.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는진 모르지만."
"……………."
"많이 보고 감정을 터뜨려서 풀면 돼요."
대게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입도 잘하는 편이라서,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울 순 없겠지.
"내가 …."
"……………."
"내가 … 앞으로 도와줄게요."
"……………."
"우리, 뭐든 같이 해."
같이 공연장과 영화 무엇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러 다녔다. 그 덕분인지, 이젠 제법 수월하게 눈물 연기를 잘 견뎌냈다. 2주일 밖에 남지 않아 빠듯했지만, 우선 급한 건 합작 공연이니까.
2주일 내내 공연 보고 연습하고 공연 보고 연습하길 반복했다. 어떤 연극 공연 보다가, 정말 대성통곡하고 울었는데… 그러고 나오면
"속이 시원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라고 했었다. 그 후론, 연습실에서 대사도 맞춰보고 맹연습을 돌입한 결과 정말 눈에 띄게 달라졌다. 대사 하나하나 목소리에 실리는 음성이 자신감도 많이 얻은 모습이 보였다. 무사히 1,2학년 합작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은 듯했다.
공연이 끝이 나고도 연습을 빌미로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웃고, 같이 느끼고, 어떻게 보면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극장도 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밥도 먹으러 가고, 같이 다니고 손만 안 잡았다 뿐이지 밟고 있는 코스는 연이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떤 날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지 내 어깨에 푹하고 기대어 잠이 든 적이 있었다. 그때, 정말 떨렸는데.. 혹시나 깰까 봐. 2시간 가까이 같은 자세로 있느라 엉덩이에 쥐가 났었나.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도 일어나지 않아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이만하면 힘이 들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나는 언제부터 너를 좋아했던 걸까. 언제부터지… 기다리는 거, 지켜보는 거, 도와주는 거, 다 자신 있는데…
단 한 가지, 네가 날 좋아해 주는 거, 그건 아직 자신이 없다.
"영원아, 너는 어떤 사랑하고 싶어?"
동아리방에서 같이 보던 러브 액츄얼리가 끝나고 영원이에게 제일 처음 물어 본 질문이었다. 눈을 마주 보지 않고, 눈동자만 굴렸다.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 했다. 대게는 어떤 사랑을 하고 싶다고 뚜렷한 생각을 갖고 있던데, 영원이는 달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아니 사랑이라는 것에 낯설어하듯.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밤 열두시가 돼서야 집에 왔다. 교수님이 시키신 일에, 학과 과제에 여러 가지로 치여서. 2학년 때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3학년은 건너 띄었는데, 4학년 과대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래서 결국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촛농처럼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지이잉-'
잔잔하게 울리는 진동을 무심코 확인했다. 이 시간에 누가… 바로 열차 자세로 바짝 일어났다. 퍼져있다가 순식간에 우뚝 바른 자세로 앉았다.
[잠이 안 와. 나올 수 있어?]
단, 저 한 문장의 문자 때문에, 벗었던 옷을 바로 주워 입고 운동화까지 대충 구겨 신으며 부리나케 나왔다. 분명 피곤해 죽을 것 같았는데. 영원이의 문자라면 실제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올 수 있었다.
사랑을 하면 엔도르핀이 나온다던데, 아무래도 영원이는 내게 엔도르핀보다 더 강한 역할을 하는가 보다.
[나, 놀이터. 놀이터로 와.]
놀이터에 있다는 문자를 받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놀이터로 돌렸다. 요즘 들어 자주 잠이 안 온다고 하는 영원이다. 불면증이라도 시달리는 건가 걱정돼서 뭘 어떻게 하면 숙면에 좋을지 인터넷으로 계속 검색하며 왔다.
입구에서부터 끼익 끼익 쇳소리가 났고 그네에 앉아서 흔들 흔들 거리며 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뭔가 둥글게 둥글게 그리는데… 궁금해서 다가가니 황급하게 지우고 나를 올려다봤다.
"왔어… 혹시 자는데 깨운 거 아냐?"
"나… 나도 잠이 안 와서. 운동… 하려던 참이었거든."
"이 밤에?"
"어. 아직 바람은 찬데, 운동하기엔 시원하고 좋잖아."
그렇구나. 밤 공기가 좋긴 하지…. 하며 자신의 옆 그네를 툭툭 치며 앉으란다. 가까이 가서 앉으려다가,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그네 밀어 본 지도 오래돼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네 밀어줄까?"
그러자 기겁을 하며, 내가 애야? 됐어- 라고 딱 잘라 말하는 영원이. 하여튼, 쎄. 어쩜 한결같이 센지. 엠티 때
'너무하세요. 선배라고 권위 휘두르는 거 무조건 옳지 않아요. 그럼 저 안 할-'
'술 많이 안 마셨나 봐요.'
'호랑이 굴인데, 정신 차려야죠.'
이렇게 말하는 거 보고 진짜 세다고 생각했는데. 뭐 요즘도 가끔씩 깜짝깜짝 놀란다. 그거에 비하면 지금 딱 잘라 말하는 건 센 축에도 못 끼지. 이 정도면 애교다. 애교.
"왜에, 뭐 어때. 밀어 줄게.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뒤편에 서서 그네를 서서히 밀어주었다. 됐다고 하더니, 막상 밀어주니까. 바닥에 대고 있던 발을 떼고 약간 공중으로 띄웠다. 안전하게 양 줄을 잡고. 예쁘기도 하지. 어렴풋이 몸에서 나는 향기가 내게 닿았다.
항상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밤이라 짙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샤워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사이좋게 밀어주고 있으니까. 꼭 어릴 적 꼬마의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땐 동네 누나 동생들 사이에 끼어서 공기도 하고, 모래로 두꺼비 집 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했었는데.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리니,
"비웃지 지금. 나이 먹고 그네 탄다고."
"아, 아니. 아냐. 그냥… 생각나는 게 있어서… "
가볍게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막 여기가 간질거려… 숨 막히게.
놀이터를 나와 코너를 돌아 곧장 너희 집으로 향하는 길. 곳곳이 드문드문 서 있는 전등이 깜빡이는 가로등. 밤에 여길 혼자 나왔단 말이야? 밝지 못 한 길 때문에 어두침침 으슥했다. 당장 시청에 전화해서 가로등 갈아달래야지.
은은한 달빛. 꼭 가까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 달처럼. 우리 사이에 닿을 듯 말 듯. 서로의 손등이 가볍게 스친다.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전율이 손등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풀거리고, 어깨에 걸친 숄더가 약간 흘러내렸다.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주면서…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덥석 잡았다. 어? 하며 돌아보던 영원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하며 반문하는데 정말 딱.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팔을 확 당겨서 안아 버렸다. 그리고 5분 같던 5초 동안 꽉 껴안고,
"잘 자. 창문 꼭 닫고."
간다. 재빨리 품에서 떼어낸 뒤,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몇발자국을 떼고,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까지 뛰어왔다. 터질 것 같던 심장. 내 가슴에 닿았던 너를 생각하며…
아무래도, 잠 못 이루는 이현의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