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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말하라구.
작가 : 랑다정
작품등록일 : 201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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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몰랐던 진실 [백이현 외전: 外傳 4]
작성일 : 16-10-31     조회 : 363     추천 : 0     분량 : 6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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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주문하시겠습니까?"

  "……………."

 

 

 

 

  생전 안 쓰던, 비니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등 돌린 채 저 멀리에 있는 테이블을 주시했다. 간혹 말소리나 움직임이 느껴지면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다고 가려질 아우라는 아니지만, 생긴 건 멀쩡한 내가 때아닌 탐정놀이에 휘말렸다. 백이현 네가 어쩌다가, 미행까지 하고 있는지.

 

  아버지 아시면 난 진짜 남자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왔으니.. 혹여나 들킬까 봐 최대한 몸은 낮추고, 몸은 여기 있지만, 온갖 신경은 이미 저쪽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손님… 손님…?"

 

 

 

 

  어느새 내가 앉은 테이블에 직원이 와서 주문할 것을 재촉했다. 언제 온 건지도 모르게 서서 말을 거는데 깜짝 놀랐다. 움찔하고 계속 저쪽 테이블을 주시하는 것도 계속됐다. 그런데 모든 게 예민한 지금. 직원의 목소리 높낮이마저 신경 쓰였다.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제스처를 취하자 당황한 듯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눈에 보는 메뉴를 대충 쿡쿡 찌르자, 받아 적으며 주문한 메뉴를 한번 더 읊는데, 미치는 줄 알았다. 힘겨운 주문을 마치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켜보기 모드로 들어갔다. 역시 숨어서 지켜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네.

 

 

 

 

  "그럼, 저는 지금. 여배우님과 식사를 하는 건가요?"

  "네? … 아… 아니에요."

  "영광인데요. 사인받아놔야겠어요."

 

 

 

 

  술수가 뻔한 작업 멘트가 오가는데도 영원이는 좋다고, 눈까지 휘어지게 웃고 있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딱 봐도 선수네. 여자들 잘 홀리게 생겼구만. 선글라스 너머로 유심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칠 것 같으면 고개를 훽 돌렸다. 심장 쪼그라들어서 이 짓도 오래 못 하겠다 싶다.

 

 

 

 

 

  "주문하신, 갈릭 스테이크, 고르곤졸라 피자, 새우버섯 크림 파스타 나왔습니다."

 

 

 

 

 

  또다시 나타난 직원. 음식 메뉴를 너무 크게 얘기해서 이목이 쏠릴까 봐 심장이 팔딱 거렸다. 고개를 탁자로 처박고 직원이 갈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손을 흔드니 직원이 눈치를 보다가 풋 하고 웃고 사라졌다. 웃음거리가 되든 말든 내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고갤 들었는데 상다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시키는건데. 뭐가 이렇게 많아.

 

 

 

  "영원씨는 어떤 남자 스타일 좋아하세요?"

  "민혁 씨는요?"

  "그쪽 제 취향 아닌데…."

  "네?"

  "아……."

  "……………."

  "남자 취향 아니라고요."

  "풉, 이런 개그 좋아하시나 봐요."

  "… 많이 어색했나요?"

  "조금요. 그럼 어떤 여자 스타일 좋아하시는데요?"

  "제가 먼저 질문했어요. 먼저 답해요."

  "…음. ……딱히 글쎄요…."

  "정말 한 가지도 생각 안 해봤어요?"

 

 

 

  먹다가 코로 넘어올 식상한 질문하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코웃음이 나와 죽겠다. 언제 적 작업 스킬을.. 도대체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 분노의 칼질로 스테이크를 잘라서 입에 쑤셔 넣었다. 스파게티도 돌돌 말아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열이 확 올라 목 부근을 잡고 바람을 일으켰다. 나 참 그것도 유머라고… 웃음이 나오냐. 한영원.

 

 

 

 

  "나무처럼, 오래도록… 제 옆에서 웃어주는 사람이요…."

  "네? 나무… 처럼?"

  "좀 우습죠. 엉뚱하고."

  "아뇨, 전혀요. 생각보다 구체적이라…."

  "제가 좋아하는 영화 대사거든요."

  "어떤 영화인데요?"

  "​사랑하는, 나무에게라는 영화에요."

  "그런 영화도 있었군요."

  "나무는 그 자리에서… 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참 동화 같아서 좋아해요."

  "​볼게요. 그 영화 꼭 봐야겠어요. 먼저, 집에 나무부터 심구요."

 

 

 

 

  그길로 먹던 걸 뿜어내는 바람에, 직원이 와서 괜찮으냐고 연신 물어대고 냅킨 가져다주고, 공개된 장소다 보니 더 있다가는 들킬 것 같았다. 이목이 집중되는데 그중에 영원이도 포함될까 봐. 냅킨으로 대충 입만 닦은 채 부리나케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온 걸 알아차렸는 줄 알았다. 숨어있는 걸 알고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무 처럼, 오래도록… 제 옆에서 웃어주는 사람이요….'

 

 

 

 

  어떤 사랑하고 싶으냐는 내 질문엔 말 한마디도 못 했으면서. 어떤 남자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줄줄줄 대답을 해주다니 빈정이 팍 상해버렸다. 넓은 아량으로 덮을 수도 있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일에 열을 올리다가. 결국. 그날 먹은 건 단단히 체해서 며칠을 고생 고생했었다.

 

  공대생이라더니 수준은 완전 옛날 고리짝 작업 멘트를 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잘 되면 안 되는데,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생각보다 흘러가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므로… 그동안 난 뭐 한 거며. 애지중지 아끼다가 뺏기게 생긴 격 될 것이다. 만약 잘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어? 어… 그래. 잘 갔다 와.'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여서. 내가 내 무덤을 판 건지 모르겠다. 잘 갔다 오라니, 그게 좋아하는 여자한테 할 소리냐고. 무슨 생각하고 사냐. 백이현! 머리에 똥 만들었냐. 아 진짜, 소개팅까지 한 마당에 이제 와서 고백하면 상황이 꼬일 것 같고. 돌겠네. 내 머릴 툭툭 쳤다. 나 자신이 너무 답답하기 짝이 없어서.

 

 

 

 

 

 

 

 

 

 

 

 

 

 

 

 

 

 ​

 

  "……백…이현…?…"

 

 

 

  며칠 전 일을 생각하느라 초점 없이 서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돌아 볼 틈도 없이 백초크를 걸어왔다. 으윽 점점 조여오면서 숨이 막혀 숨을 못 쉬겠기에 순간적으로 조건 반사로 목에 걸린 팔을 툭툭 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참을 버둥버둥댄 것 같았다.

 ​

  그렇게 백초크의 후폭풍을 견디고 나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막힌 기도를 뚫기 위해 기침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인마, 여기서 뭐 해."

 

 ​

 

 

  실실 웃으며 재밌게 쳐다보는 강준 선배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우두커니 있는 자세가 영 불편해 보였다. 꼿꼿이 서 있는 통나무 같달까. 그런데 이 밤에 이 동네는 웬일이신 거지. 선배는 반대쪽 동네에 사시는데. 설마, 영원이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선배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직도 아픈 목을 손으로 살살 주무르며 약간 경계의 눈초리와 목소리로 물었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여전히 뻐근한 근육들이 뭉쳐서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꼬여버린 내 머릿속처럼.

 

 

 

 

  "… 어차피, 마주친 거. 모른 체하려다가…. 비겁한 건 싫어서. 백이현, 놀라지 마."

  "네? 뭘요?"

  "… 나와."

 

 

 

 

 

  선배의 말이 끝나자, 선배 뒤에 누군가가 쓰윽 나타났다.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걸쭉한 비명과 함께 불쑥 뒤로 물러났다. 강준 선배 뒤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건 어떤 여자분이었는데 그 어떤 여자는 나도 아주 잘 아는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아, 아니 이 밤에 우리 씨가 어떻게…."

 

 

 

 

 

  그것도 강준 선배랑… 설마, 둘이… 내 추리력에 내가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했다. 그래서 반대편 동네 사는 선배가 여기까지 온 거구나. 야심한 시각에 말이지.

 

  영원이에게서 얼핏 우리 씨도 영원이와 한 동네 산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야 아까 잠시 들었던 작은 의문들이 끼워 맞춰졌다.

 

 

 

  "…두 사람…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그 얘긴 나중에 해 줄게."

  "아직 영원이한테는, 말도 못 했어요."

 

 

 

  아시다시피, 영원이랑 강준 선배 서로 사이 안 좋잖아요. 비밀 얘기 인양 손으로 가리고 살짝 얘기하는 우리 씨.

 

 

 

 

  "다, 들린다."

 

 

 

 

 ​ 그리고, 그렇게 사이 안 좋은 거 아니거든. 오빠 영원이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후배로써 내키지않은거지. 어쨌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맞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다시 내게 부탁하며 말을 하는 우리 씨.

 

 

 

 

  "아무튼, 비밀로 해주세요."

  "정말… 의외의 조합입니다."

  "그건 그렇고 백이현 넌 이 시간에 여긴 왜?"

  "아… 그게…."

 

 

 

 

  알면서 뭘 묻느냐고 우리 씨가 강준 선배 팔을 툭 쳤다. 왜? 왜 기니요. 여기 요 앞에 오피스텔에 영원이 살잖아요. 이로써 내가 지금 영원이랑 만나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났다.

 

  비웃는 듯 크게 웃더니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선배였다. 별 말하지 않았는데 모든 걸 들켰구나 싶었다.

 

  순간 알몸뚱이로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직 영원이한테도 좋아한다고 말 못 했는데. 이 사람들이 그 사실을 먼저 알게 된 거냐고, 조금은 억울해졌다.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더니. 어휴, 이 호구 새끼.

 

 

 

  "좋아하는 사람하고 여태 소꿉놀이나 하고, 남녀 사이는 늦으면 늦어질 수 록 어긋날 뿐이야."

 

 

 

 

  선배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영원인 결국 소개팅까지 했다. 백이현 인생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쳐낸 남자들만 해도 몇 명인데. 영원이가 몰라서 그렇지 내선에서 제거한 남자들이 꽤 손꼽혔다.

 

  반대로 나 좋다고 하는 애들은 영원이가 떨어내 준 거나 다름없으니, 그렇다고 난 아예 안 만난 건 아니었지만, 그냥 동료처럼 만나는 여자 선후배는 있었다.

 

  그건 대학생활에서 필요한 수준이니까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영원이 처럼 소개팅 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영원이를 알게 된 후론.

 

  그렇게 잔잔한 파도가 치고 지나간 기분으로 두 커플을 보내고 기다리는데도 영원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온다는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늦나 해서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시간차를 두고 계속 보내는 메시지에도 답이 없는 통에 불안감만 높아졌다.

 

  나쁜 사람들한테 잡혀갔다거나, 치한을 만났다거나, 불미스러운 일은 없어야 하는데. 주변을 돌다가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찾아간 집. 여전히 불은 꺼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조심스럽게 두들겨 보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왜 집에도 없어. 어?]

  [설마 아니지! 너 잘 못 되고 그런 거?]

  [내가 잘 못 했어.]​

  [살아만 있어라 살아만.]

 ​

 ​

 

 

 

  메시지를 보내고 죄책감이 들었다. 위험하게 혼자 오게 해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가 무서워졌다. 다 내가 잘못하고 죄인 같았다. 모든 순간이 후회되는 것처럼 그냥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할 것을.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

 ​ '좋아하는 사람하고 여태 소꿉놀이나 하고, 남녀 사이는 늦으면 늦어질 수 록 어긋날 뿐이야.'

 

 

 

 

  선배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긋날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계속 어긋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자꾸 가장자리만 빙빙 도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잠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서 못 보는 걸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보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지금 와서 이런 말하는 거 웃기지만.]

 ​

  [사실 나, 너 좋아한다.]

 

 

 

 

  메시지를 보내고도 답이 없어 입이 바싹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손톱을 물어뜯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 했다. 그 후로 전화도 수십 통을 넣었고 문을 두드렸다.

 

  내 안에 장기들이 모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분명 나랑 만나기 위해 나온다고 문자 했는데.

 

  심지어 나한테 확인 전화까지 했던 영원이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밖을 나가서 동네도 몇 바퀴를 돌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마지막으로 신고해야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누르는데.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의 전화번호가 액정 위로 떴다.

 

 

 

  "한영원!!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 ………….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고 내가. 너 정말!! 사람 놀라게 하고!!"

  ─ ………….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잖아!!"

 

 

 ​

 

  벽을 보고 미친 듯이 혼잣말하는 사람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한마디라도 괜찮았다. 미안하다 라든가, 왜 나오지 못 했는지 정도의 말만 해줬으면 했다.

 

  최소한 내가 이해가 될 정도의 아무 말이라도. 그 일말의 기대는 정말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에 영원이는 제멋대로이고, 다소 센 성격을 지녔지만 이렇게 예의 범절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일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건가.

 

  내가 놓치고 가는 부분이지 않을까 해서 애써 서운함을 누그러뜨렸다.

 

 

 

 ​

  "너 무사한 거지? 뭐 이상한 사람들한테 끌려갔다거나. 어? 진짜 그런 건 아니지?"

  ─ ………….

  "너 어딘데. 어? 한영원 대답해! 왜 대답 안 해!"

  ─ 대답할 틈을 줘야 답하지.

  "아………. 미안."

  ─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지. 나 못 나갈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가. 그럼 이만 끊을 게.

  "어? 뭐라고? 야- 그게 무슨 말-"

 

 

 뚝-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이유를 듣기는커녕 내 말도 듣지 않은 채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혹시 다시 걸까 봐 아예 전원을 꺼져버린 전화기로 인해, 머릿속에 전기회로마저 끊겨버린 듯했다.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지. 나 못 나갈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가. 그럼 이만 끊을 게.'

 

 ​

 

 

  목소리 들었으니 됐지. 란다. 못 나가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지금껏 기다리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영원이는 내가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지는 순간에 연락 한번 없이 집에 있었다. 심지어 문을 두드리는데도 말이다. 몇 시간을 밖에 서서 되뇌며 차분히 생각들을 정리했다.

 

  혹시 내가 잘못 한 게 있었나부터 시작해 의문의 꼬리를 물고 끝이 없어졌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꼭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과연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그저 호출하면 나오는 호구였던 건지. 한영원에게 백이현은 쉬운 남자밖엔 되지 않았던 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속상함과 함께 가슴을 조여왔다.

 

 

 

 

  "이제 나오냐."

 

 ​

 

  고요한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은 아침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을 메고 전공 책을 들고 오피스텔을 나오는 모습을 널 보니, 머리를 둔기로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데, 먹먹함이 온몸으로 퍼져 멍해지고 심장은 저며진 듯 아프다. 지금의 나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이제 현실과 마주해야 할 시간이 왔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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