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해도 해도 이건 도를 넘는 행동이었다. 밤새도록 너를 기다린 건 나의 자유의지라고는 하나. 그래 그것도 순전히 내 의사이지만. 사람이 기다리건 말건,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한영원은 과연 그동안 내가 알던 네가 맞는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질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최소한의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집에 가라고 했잖아. 기다리지 말고."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지. 나 못 나갈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가. 그럼 이만 끊을 게.'
지나가면서 쓰레기통에 쓰레기 버리듯 던져버린 그 말이. 수화기 너머로, 내뱉은 그 말로 자신의 본분을 다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무책임한 말들만 쏟아내고, 나와의 대화가 귀찮은 게 여실히 드러났다.
하루아침에 달라져서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도대체 뭐가 너를 이토록 다른 사람으로 만든 걸까.
"내키는 대로 나오라 더니 이유도 없이 가라고 하면 다야?"
"그렇게 됐어. 이유는 묻지 말아줘."
"너 왜 그렇게 제멋대로야."
"그래, 나 제멋대로야. 너도 잘 알잖아."
"정말 왜 그러는데. 최소한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그날이라서, 단지, 정말. 그날이라는 명목하에 내게 그러는 거라면 좋겠다. 되려 백이현은 그동안 한영원에게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신입생 때 처음 만나서, 마음으로 도왔다. 진심으로 우러나와 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너를 향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말은 쌀쌀맞게 해도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여겨왔다.
어느 것 하나 곡해해서 듣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너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걸. 그래서 감싸왔는데, 내 마음 전달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너도 날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라. 당연히 믿었다. 이건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런데도…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내가 간 밤에 밖에 있든 말든 상관없을 정도로."
"……………."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이 눈빛이었다. 흔들림 속에 느껴지는 진심. 숨기려고 하는 너의 진심. 난 눈빛만 봐도 알 것 같은데.
"아냐."
이내, 나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려 했다. 일말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일진 모르지만, 네게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너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단지 표현을 잘 못하는 것이라고….
"나한테 너."
"……………."
"아무것도 아니라구."
단칼에 날아갔다. 희망을 품었던 나 자신이 무색하게. 맹독을 가진 독사같이 차갑게 돌려버리는 진심. 어쩌면 입으로 나오는 말이 진짜 너의 본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던 거라고, 정신 차리라며 일깨워주듯. 착각에 된통 뺨을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얼얼한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분명 감각이 없어야 맞는 건데. 왜 이렇게 쓰리고 아픈지….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으로 어젯밤 내가 보낸 문자를 읽었는지 확인했다. 아침에라도 확인했을 줄 알았는데….
"… 그래서, 그런 거구나."
"……………."
"아직 메시지 확인 안 했던데."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핸드폰을 넣었을 만한 곳을 눈으로 뒤졌다. 원피스를 입고 있던 터라 주머니엔 없을 게 뻔했고, 남은 곳은 가방 속이었다.
뭐 하느냐고, 소리치는 네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가방 속을 뒤졌다. 소매 끝을 당겨서 찾지 못하게 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내 손에 들어온 휴대폰을 뺏길 내가 아니었다. 차갑게 꺼져있는 전화기.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켜지는 대로 익숙하게 패턴을 풀어 대기화면으로 진입했다. 부재중 통화에 쌓인 메시지의 숫자는 엄청났다.
내가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이제야 가늠케했다. 시간을 보니 중간에 꺼버리고 확인도 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사실 나. 너 좋아한다.]
확인하지 않은 내 마음을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마음이 구겨져 펴질 줄을 몰랐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직접 보낸 메시지를 직접 삭제를 하는 내 모습이 이렇게 초라할 수 있을까 싶어서.
과연 어디까지 초라해질 수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나의 사랑이. 외사랑이었다는 사실을 확정 받는 잔인함이 가슴을 후벼팠다.
설레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냈던 메시지가, 흉측한 흉기가 되어 마음을 갈기갈기 흩뿌리고 있었다.
"네 뜻 잘 알았어. 더는 괴롭히지 않을 게."
"……………."
"미안했다. 혼란스럽게 해서."
"……………."
"가라. 늦겠다."
돌려주는 휴대폰처럼. 너에게 주었던 내 마음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르지 못 한숨을 불안한 호흡으로 잠재우며, 돌아섰다. 떨어지는 발길마다. 연민이 묻을까 봐. 휘젓는 팔을 돌려 다시 너에게 돌아갈까 봐. 꾹 이를 악물고, 멀어졌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른 채 그렇게…
"우리 인연인가 봐요."
"……………."
이 연타로, 가슴에 피멍이 새겨지는 장면이었다. 겨우 잠재워 놓은 마음이 다시 요동치며 분노로 흔들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심정은 땅으로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소위 억장이 무너지는 현재. 한 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이 무색해져버렸다. 부끄럽고, 한심해서. 당장이라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어졌다.
고작 몇 시간 전 영원이와 헤어지고, 곧장 멀리 아주 멀리 어디로든 떠나야 했다. 미련 많은 나 같은 놈에겐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뜨고 싶은 생각에 캐리어 안으로 무조건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그냥 무작정 충동적이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에도, 욕실에 들어가 세면도구를 챙길 때에도,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순간까지도 이성은 온대 간 대 없고 감정만 앞서있었다.
'너 왜 그렇게 제멋대로야.'
'그래, 나 제멋대로야. 너도 잘 알잖아.'
'정말 왜 그러는데. 최소한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이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대화가 자꾸 내 발목을 잡았다.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눈을 감아도 머리를 떠날 줄 모르던 말이 자꾸 아프게 했다. 백이현 너 어디까지 참을 거냐. 하며 비웃는 듯 캐리어가 툭하고 열렸고, 쏟아지는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짙은 한숨이 배어 나왔다.
머릴 짚고 하늘을 쳐다보며, 뜻대로 되지 않는 분노를 터뜨렸다. 어째서 이깟 캐리어까지 나를 농락하는지. 빌어먹을.
평상시 성미에 맞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차버린 캐리어를 다시 내 손으로 주섬주섬 정리해서 다시 집으로 와야 했다.
'애인 선물하시나 봐요.'
'네?'
'여성 고객한테 인기 많은 상품이라 항상 조기 품절이거든요.'
'… 이게 그렇게 인기가 많아요?'
'그래서, 남자친구분들이 대신 줄 서서 사가시는 경우도 있어요.'
'…………….'
'딱 하나 남았는데…. 자. 포장 다 됐습니다. 손님. 애인분이 굉장히 좋아하실 거예요.'
항상 여기를 지날 때면 입 버릇처럼 말하던, 영원이었다. 그렇게 유명하다고 한번 먹어보면 절대 잊을 수 없어서 중독된다고 자신도 꼭 먹어 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초콜릿 하나 가격을 듣고 기함한 나는 설탕 덩어리 따위가 뭐가 그렇게 비싸냐고 핀잔을 주고는 대신 초콜릿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한동안 그것 때문에 삐쳐선 나랑 말도 안 했었는데. 그때 생각하길 남자들은 그런 거 안 먹어도 사는데 지장 없는데. 여자들은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고개를 갸우뚱댔었다.
그런데 지금. 핀잔을 늘어놓고 절대 이해 못 하던 짓을 내가 하고 있었다. 직접 그곳을 발로 걸어들어가 포장을 해달라고 하고, 직접 계산을 한 뒤. 손수 받아서 걸어 나오고 있다니. 한영원. 너란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사실, 아까부터 그날이라고 했던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짐을 싸고 끌고 나와. 캐리어가 형편없이 열리던 순간에도. 온통 생각이 거기에 고정되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이면 아파서 하루 종일 집에 박혀 데굴데굴 구르던 너인데. 어젯밤에도 그랬을 네 모습을 생각하니… 아침에 괜한 짓을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만 너를 더 생각하고 기다리고 행동할 걸. 너무 경솔하게 밀고 나간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한영원에게 화가 났던 분노는 어느샌가 눈 녹듯 사라져버린 것처럼. 또다시 한영원 걱정투성이 백이현으로 돌아와있었다.
난 이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도대체 뒤끝이란 게 없어. 화가 나서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다가도 화가 누그러지면, 차분해져버린다. 언제 화가 났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 누그러진다는 게.
상대방은 전혀 누그러질 기미가 없는데 나 혼자만 누그러진다는 게 문제였다.
"ㅇ. 우리 어제 본 공연 말이에요. 너무 재밌었어요."
"그전에 우리 밥부터 먹으러 가요. 괜찮은 맛 집 알아요."
그것도 잠시. 학교로 발길을 옮겨, 과 건물로 들어가기도 전에. 떨어진 심장을 주울 길은 없었다. 너무 다정한 두 사람이 내 눈앞에 보였을 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대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원이 어깨에 손을 돌렸고, 영원이는 안겨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캠퍼스 커플이라고 생각할 만큼 다정함이 흘렀다. 어느새 저렇게 가까워진 거지.
역시 나는 헛물을 켜고 있었나. 주먹을 힘 있게 오그려 쥐며, 곧장 신경 쓰지 않는 척 영원이를 지나쳐 대학 건물로 들어섰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다리에 근육들이 경직되고, 머리가 하얘지는 와중에도 우선 당장 손에 들려있는 이것부터 없애려고 휴지통을 찾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고, 다름 아닌 우리 과 후배였다. 나를 좋아하는 티를 내도 너무 내서 후배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윤서가 싫어하는 녀석이기도 하고. 연서 말로는 여우짓 하는 게 콱 쥐어박고 싶다 표현했었다. 과연 연서가 좋아하는 후배는 몇이나 될까 생각이 든다.
"이현 선배. 오늘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 어, 좀 늦었어."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아님 내일이라두요."
"무슨 일인데."
붙어도 너무 붙어서 부담스러웠지만, 한영원이 보는 앞이라 그런지 오기가 생겼나 보다. 괜한 오기가. 그렇다고마다 할 이유도 없었고. 단지 과제 도와달라는 건데. 적재적소에 나타난 후배가 딱히 싫지만도 않았다. 연서가 싫어하는 거지 내가 감정 있는 게 아니니. 이유는 단순했다.
그리고 버리기 아까웠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서 없어지나. 후배 뱃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지나 매한가지니까.
"너, 단거 좋아해?"
"단 거요? 네! 없어서 못 먹죠!"
"그럼 이거 너 먹어."
"이게 뭔ㄷ… 우아! 이거 되게 되게 비싼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란. 먹는 것. 특히 초콜릿에 약한가 보다. 그 직원 말대로 여성분들에게 단연 인기가 독보적인 존재였다. 후배의 반응을 보니 딱 알겠네. 어차피 영원이는 소개팅한 공대생이 챙겨 줄 것이고. 내가 사온 초콜릿 따위는 아무런 값어치를 못 할게 뻔했다.
그만큼 내 마음도 값어치가 떨어지게 된 것 같아 다시 또 마음이 휑해졌다. 생채기로 가득해진 마음을 주인 잃어 쓸모 없어진 초콜릿에게까지 비유하게 되다니.
'좋아하는 사람하고 여태 소꿉놀이나 하고, 남녀 사이는 늦으면 늦어질 수 록 어긋날 뿐이야.'
선배 말대로 우리에게 앞으로 남은 건. 점점 어긋날 일 뿐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