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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장관리에 능한 반반한 얼굴에 백이현. 역시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는 더러 있었다. 전화번호에 저장하지 않은 번호들로 수십 통의 수신 전화들이 빼곡히 쌓이고, 귀찮은 문자들에 메신저에. 내가 떼어내 준 여자애들만 해도 혀를 내 두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백이현 때문에 기분이 꿀꿀해서 마트에 들렀다 맥주가 가득 담긴 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오는데, 어디서 느닷없이 백이현이 나타나. 내 어깨를 꽉 잡아 제 품에 당기며-
'잘 봐둬. 얘가 내 여자 친구야.’
하는 바람에 심장이 순간 소멸되어 버렸다. 덕분에 손에 뭘 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떨어뜨려, 맥주 캔 이 데굴데굴 굴러 그 계집애 발 앞에 채이는데. 어찌나 쪽팔리던지.
정강이를 냅다 차고, 씩씩 거리며 집으로 뛰쳐 들어 왔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그 계집애의 표정을 잊을 수 없어.
‘너 따위가?’
딱 그런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여자였다. 아무리 밤이라서 착각을 할 수 있대도, 여자였다. 게다가 꽤 친밀하게 스킨십을 해댔다. 서로의 얼굴까지 맞대면서 밀착했다.
분명 농도 짙은 스킨십이 오고 간 게 분명했다. 많이 변했네. 백이현. 순둥이가. 카사노바로 진화하셨어. 그것도 이 새벽에, 내 연락에 금세 달려 나올 정도라면. 내내 같이 있었다는 거겠지. 오기 싫었겠지만, 내가 다그치고 나오라고 하니까. 마지 못 해 나온 거고. 여자가 매달렸겠지. 가지 말라고. 오늘은 나랑 같이 있-
미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시작도 없었으니, 끝도 없다. 짝사랑이란 그런 것. 혼자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간단했다. 그저 주인 없는 마음을 접으면 그만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렇게 생각하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슴께를 잡고 가던 손 등 위로 자꾸만… 자꾸만…뜨거운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주책이야 정말. 이게 뭐라고 이깟 눈물을 보여. 쓰윽 닦아내며 마음을 쓸어냈지만, 이상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말이 되지 않는 거였다.
나는 너한테 화낼 타당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본 게 맞는다면 그렇다. 이로써 네가 나한테 했던 행동들은 의미가 없어졌다. 모두 쓸데없는 '착각'이야.
─ [왜, 안 와? 곧 온다며.]
환하게 액정을 가르고 뜨는 메시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나를 이토록 착각에 늪에서 살게 한 장본인.
─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알겠어^^]
─ [오래 걸려~? 나 다리 아포. 졸리고. 잉~]
시간차를 두고 계속 울리는 휴대폰.
─ [시간도 늦었는데, 나.. 너희 집.. 아니다.]
─ [배고파. 배고파.]
이제 보내지 않겠지. 하면 그 생각이 끊기기가 무섭게 알림이 울렸다.
─ [전화 안 받네. 오는 중인가..]
─ [답장 좀 해주라. 아님 전화 받던가.]
─ [.. 설마 무슨 일 생겼어?]
─ [야, 걱정되니까. 전화 받아라.]
─ [한영원. 전화 받아.]
─ [너 어디야.]
─ [어디냐고.]
─ [야!]
─ [너 진짜!]
─ [왜 집에도 없어. 어?]
─ [설마 아니지! 너 잘 못 되고 그런 거?]
─ [내가 잘 못 했어.]
─ [살아만 있어라 살아만.]
─ [지금 와서 이런 말하는 거 웃기지만.]
─ [사실 나…]
이젠 폭탄 메시지도 모자라, 문 밖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쾅쾅 쾅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옆집에서 안 나오는 게 신기 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민원 넣을 수준인데. 그전에 우리 집 현관문이 그대로 부서지는 줄 알았다.
그에 더불어,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 소리가 짜증이 확 밀려왔다. 생각도 하기 전에 집어서 발아래로 냅다 던져버렸다. 밟고 마구 차버리다가 배터리를 분리하고, 아무 곳에 널브러뜨렸다. 답하기도 싫었고, 전화 받기도 싫었다. 꼴도 보기 싫어.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백이현 네가 너무 미운데. 너무. 너무. 너무 미운데. 자꾸 생각나.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고 뛰쳐나갈지도 모르겠어. 널 좋아한다고 말해버릴지도… 그리고 그대로 안겨 버릴지 몰라. 그럼 나에게 남는 건 상처뿐이겠지. 그렇다고 밤새 백이현을 세워둘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켜 세우다 말고. 아니야. 지치면 집에 가겠지. 이러다 설마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아니겠지. 이와 중에 별생각을 다 하는 나였다. 아악 진짜 백이현! 죽어도 연락하기 싫은데. 여러모로 가지가지 신경 쓰이게 하는 개새끼. 진짜 개 닮은 게. 개 같은 짓 만 한다.
분리된 휴대폰을 합체시켜, 전원을 눌렀다. 밝아진 휴대폰 자판 위로 능숙하게 번호를 눌렀다. 지랄 맞게 번호까지 외우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그리고 뚜르르 이어지는 신호음, 몇 번 울리기도 전에.
─ 한영원!!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
─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고 내가. 너 정말!! 사람 놀래키고!!
"…………."
─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잖아!!
쉴 새 없이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백이현. 수화기 너머의 침이 여기까지 튀는 것 같았다.
─ 너 무사한 거지? 뭐 이상한 사람들한테 끌려갔다거나. 어? 진짜 그런 건 아니지?
"…………."
─ 너 어딘데. 어? 한영원 대답해! 왜 대답 안 해!
"대답할 틈을 줘야 답하지."
─ 아………. 미안.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지. 나 못 나갈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가. 그럼 끊는다."
─ 어?뭐라고? 야- 그게 무슨 말-"
뚝-
빨간 통화 끊김 버튼을 누르고,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두 동강 났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베개 위로 얼굴을 묻고, 물이 번져나갔다.
목구멍 가득 백이현이 차올랐다. 목이 막혀왔다. 이불 시트를 꽉 쥔 주먹엔 울분이 가득 맺혔다.
백이현, 이 나쁜놈아! 네가 내 걱정을 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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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뜰 때쯤… 강의가 있어. 할 수 없이 집을 나섰다. 괴물같이 눈이 팅팅 부어서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지만, 더 못생겨 보이는 뿔테에- 모자를 쓰고서라도 나와야 했다. 그렇다고 학점까지 F 맞으면 나만 억울하잖아. 어제 백이현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알고 보면 내가 못 나서인데. 그러니까 그 화는 나한테 부려야 하는 건데. 모든 책임을 너에게 돌리고 있었다.
알아주길 바랐다.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솔직히 그동안 이만큼 표현했으면 알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째서 당사자는-
"왜 모르냐고!"
왜. 너만! 나도 모르게 속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전봇대에 기대 있던 인영이 움직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욕지기가 나올 뻔 했다. 젠장. 사람이 있었어. 쪽팔리게 다 들었겠네. 닥치고 가만히 죽은 듯이 지나가야겠다.
그리고, 전공 책으로 얼굴을 반을 가리고 모르는 척 지나가는데.
"이제 나오냐."
내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른 것도 아니었지만. 자동적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내 이름은 그저 약속된 묵음인 양.
"…………."
"…………."
귀에 꽂은 이어폰을 스르륵 빼면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보는 너를 보게 된 그날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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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동작만 반복했다. 꺼진 액정 위로 손톱을 두드리는 일. 공책을 찢어서 갈기갈기 조각내는 일. 볼 펜으로 동그라미만 잔뜩 그릴 뿐.
툭-
떨어뜨린 필통을 줍다가 먼 산만 바라보곤, 교수님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아까 이현이가 잡았던 손목을 보기 위해 필통을 올려두고 난 후,옷소매를 들추었다. 아직도 그의 손자국이 선명했다. 얼마나 세게 잡았길래. 여전히 남아있는 거지. 내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한 이현이 같네. 밀어내고 싶어도 어느새 좌정해 있는 너란 사람.
'폰 줘봐.‘
단호한 한마디와 함께, 뺏어가 몇 번 터치하더니 돌려주던 휴대폰을 켜 보았다. 뭘 만진 거냐고 물어도 답이 없던 백이현.
머릿속에 그 한마디가 울리면서 나는 다시, 2시간 전 전봇대 앞에서 백이현과 마주친 상태로 되돌아 가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해."
전봇대에 기대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백이현이었다. 뭔가, 체념한 듯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내 앞에 서서 눈이 마주쳤을 때 직감할 수 있었다. 흰자위로 잔뜩 충혈 되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 설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백이현. 너. 여기서 밤새웠어?
"……………."
"여태 여기 있었던 거야?"
"나오라며, 기다리라 더니."
밤새 왜 여기 있었어. 도대체 왜. 까끌까끌해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불러 낸 내 잘 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가라고 한 것도 그렇고.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가지 않은 네가 오히려 미워졌다.
백이현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차가움이 쌩쌩 불었다. 어떻게 보면 화가 잔뜩 나 보이기도 하고. 나오라고 무작정 불러낼 땐 언제고. 다시 가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그래서 오늘도 네 앞에 나는, 마음과는 반대로 무심한 척, 관심없는 목소리로 나를 포장한다. 집에 가라고 했잖아. 기다리지 말고. 어이가 없다는 한숨을 쉬더니, 이현이의 눈 밑으로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어이가 없었다.
네가 간밤에 여자랑 그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으니까.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 누구야.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건 상처뿐일 것 같았다. 옛 말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게 분명했다.
"내키는 대로 나오라 더니 이유도 없이 가라고 하면 다야?"
"그렇게 됐어. 이유는 묻지 말아줘."
"너 왜 그렇게 제멋대로야."
내가 제멋대로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 이유도 모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나 제멋대로야. 너도 잘 알잖아."
"정말 왜 그러는데. 최소한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깊은 속 얘기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그럴싸한 변병으로,
"없어. 그냥 그날이라서 그래."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날이라고 얼버무렸다. 내가 말해 봤자. 상황을 들킨 너만 민망해질 텐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답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갈 수 록 엇나가는 내 행동에 짙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형편없이 마구 헝클었다. 그리고 얼굴을 문지르더니 뒤 목을 쓸며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넌 아니야?"
"뭐가.“
고개를 들자, 더욱 더 어두워진 그의 표정이 선명해졌다. 괜시리 마음이 이상하게 일렁였다.
"넌 아니냐고."
"그러니까 뭐가.“
그럴 수록 나는 더욱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간밤에 밖에 있든 말든 상관없을 정도로."
"……………."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너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혀끝까지 차오른 이 말이 마른침과 함께 꿀떡 삼켜졌다. 너랑 평범하게 손잡고 걸으면서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늘 그런 모습을 학수고대하며 남 몰래 상상해왔었다. 너와 그런 사이가 되기를. 네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기를.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한 나는, 동공이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기 위해 백이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냐."
"……………."
내가 잘 못 본 거겠지만. '아냐'라는 대답에 잠시 기대 같은 게 차 보였다. 순간 그렇게 보였지만.
"나한테 너."
"……………."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내, 시들어 버린 꽃처럼 사그라들었다. 부러 매정하게 했다. 들킬 것 같으면 늘 마음을 숨기고자 매정해졌다. 마음은 항상 전쟁터처럼 난리 통속임에도 불구하고, 얼굴과 입은 침착했다. 매정하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뱉을 만큼. 겉과 속이 매우 달랐다.
이런 내가 소름 끼칠 만큼 무서웠다. 나는 왜. 어째서 널 좋아한다고. 그래서 너도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쉽게 말하지 못 하는 걸까.
내 마음을 받아들여지지 않을 미래에 두려웠던 걸까. 쿨하게 인정하지 못 하니까? 결국엔 돌아올 대답이 NO 일까 봐? 나 혼자 헛물 켰던 지난날들이 무의미해지니까?
그래서 꽁꽁 숨겨서 키워 온 내 마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까 봐서? 그로 인해 나는 남는 게 상처뿐일까 봐. 그래서이다. 수 없이 질문을 던진 후에야, 결론이 났다.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렇게 쉽게. 말한 이유가. 백이현 혼자서 이유를 단정 지었다. 어쩌면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말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지금 백이현에겐 납득할 만한 그 어떤 이유라도 필요했을 테니까.
"아직 메시지 확인 안 했던데."
그래, 어제 쉴 새 없이 울리던 메신저 소리가 짜증나서 방바닥에 던져버렸었지. 액정에 비치는 내용을 봐서, 대충 내용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말려 들어간 입안에 혀가 가시 같았다.
"폰 줘봐."
"왜."
아무튼 주라면 줘.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새삼스럽게 잘 뻗어 곱상한 손을 바라보며 문득 잡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한데. 백이현 네 손. 이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편안했다. 세상의 짊을 다 지고 있어도, 마음만은 홀가분하고 개운해졌었다.
"빨리 줘 봐."
왜 그러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방에 구겨 넣다 시피 한 전원이 꺼진 폰을 찾아내서 이미 전원을 켠 상태였다. 뺏으려고 손을 뻗어도 소매를 잡아당겨도, 높이 치켜든 팔에 닿을 리 없었다.
"뭘 만지는 거야!! 내 놔!!"
내 말에도 익숙하게 몇 번 터치를 하더니 패턴도 쉽게 풀어버렸다. 미친. 잠금을 해 둔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용무가 끝났는지 곧 나에게 폰을 내밀었다. 건네 받지 않고 쳐다보니 가방 안으로 쑥 밀어 넣고는 다시 한 번 체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뜻 잘 알았어. 더는 괴롭히지 않을 게."
그동안 괴롭혔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닌데. 전혀.
"미안했다. 혼란스럽게 해서."
"…………."
"가라. 늦겠다."
통보식의 말을 끝내고, 학교 방향이 아닌 정반대로 걸어가는 백이현. 오늘 나랑 같은 수업 있으면서, 땡땡이칠 모양인가보다. 하긴, 나랑 같은 공간 안에서 수업 받는 게 껄끄러울 테지.
대 놓고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냥 친구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야. 상처받은 얼굴을 숨긴 채 그렇게 걸어갔다.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 사이가 늘어나는 걸음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몸을 틀면서 꾹 꾹 삼켜 넣었다.
"자. 여러분도 이 부분을 보면 알 거예요."
창밖에 시선을 거두고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수업 중이셨다.
또 다시 집중이 되질 않아 잡고 있던 볼펜으로 펼쳐진 페이지를 마구 쑤셨다. 옆에 앉은 학생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도대체 내 폰으로 뭘 한 건데.
홀드 키를 누르고 잠금을 푼 뒤 이것저것 어플들을 눌러 보았다. 만질 만 한 게 아무것 ㄷ…
'아직 메시지 확인 안 했던데.'
맞다! 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 바보 등신아. 미련퉁이! 그래! 메신저! 얼른 어플을 눌렀고, 백이현과의 채팅방을 찾았다. 메시지 목록에. 없다. 분명 어제 수십 통이 쌓인 채 배터리를 분리했고, 건드리지도 않았-
… !!!!
백이현이다. 삭제 한 사람. 아까 내 폰을 만진 건 백이현 뿐 이니까. 기가 찼다. 보낸 건 너였어도 폰은 내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신 된 메시지 또한 내 것인데. 어째서, 멋대로 지워버리느냔 말이야. 확인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인데, 왜. 네가 그 자유까지 간섭 하느냔 말이야!
"어째서!!"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쾅 내리쳤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주위에 학생들의 시선이 온 통 나에게로 꽂혔고, 안경 너머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는 교수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내 강의에 불만 있나 본데. 그럼 직접 얘기해 봐요."
네? 아.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연신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꼼지락거리다가 죄송하다고 몇 번 사과를 드리고. 날 파리를 잡다가 그런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얼굴이 터질 정도로 웃음거리가 되고 나서야 내게 쏟아진 시선들이 거둬졌다.
강의실을 나와, 수군대는 말에도 귀를 닫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워 천근만근이었다. 기 빨려.
"날씨 굉장히 좋은데. 여긴 먹구름이네."
나한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앞 만보고 가는데 내 옆으로 쓰윽 발걸음의 보폭을 맞추더니 허락도 없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자 목소리에 추근대는 놈인가 싶어. 대체, 어떤 새끼야. 하는 눈빛으로 흘겨보는데-
"오랜만이에요. 영원씨."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동공이 확장돼서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에? 아…. 그쪽은 그때 그 공대생? 응답하는 미소로 대충 눈인사 마냥 알아보자.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반갑다고 격하게 반응했다.
모든 게 당황스러워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른 채 허공에 여기저기 눈을 돌리는데, 그 남자가 서있는 직선 라인에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는 또 다른 남자.
이젠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미어질 그가 눈 속으로 담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