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대로 문을 닫고 모른 척 나올까 하고 고민 아닌 고민 끝에,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지해 있다가 꽤나 알만한, 과 여자 선배님의 불호령에 군기가 바짝 들어 하나 남은 그것도 제일 껄끄러운 백이현 앞자리에 착석했다.
하필 남아도 이 자리인지.
정면으로 마주 앉아있는 터라,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기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너무 고개를 틀자니 외면하는게 티 나고. 한 마디로 통틀어 죽겠다 정말. 불과 아침에 있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참된 일 같았다. 고로 편했던 백이현이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냉전이 가시방석이었다.
"한영원, 20분 지각. 벌금 2만 원."
면상을 앞에 두고, 잔인한 벌금을 때렸다. 가난한 학생인데 좀 봐주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선배님의 벌금 딱지는 단호했다. 손까지 내밀며 얼른 내라는 투의 말투였다. 뭐, 한 두 번 내는 것도 아니고 이젠 당연하다는 듯 그랬다.
오늘은 진짜 안 늦을 자신 있었는데. 하필 그 무렵 수업이 끝날게 뭐람. 우리 동아리는 수업 시간이고 뭐고 봐주질 않는다. 무조건 정해 준 시간 안에 도착해야 했고, 시간이 금이라고 했다. 이건 나라의 법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교수님들이 강조하신 철칙이기도 했고.
연극부.
연극 영화과를 전공하는 나에게 연극부는 동아리 그 이상이다. 앞으로 내가 연기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받침대 중에 하나였으니까.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 즐겁게 연극을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아리였지만, 나에겐 그랬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지갑을 꺼내려 가방을 뒤적였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화장품들뿐. 정작 잡혀야 할 지갑은 온대 간 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아침에 지하철을 탈 때까지만 해도 있는 걸 확인했었다. 근데 요망한 지갑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뭐 해, 선배가 하는 말 안 들려?"
"아, 잠시만요. 지갑이……."
없다. 확실히 없었다. 당황스럽게 왜 안 보이는 거지. 온몸을 더듬거리고 뒤적여도 없는 물건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 지갑을 잃어버린 게 분명해. 근데 어디서 흘린 건지 모르겠다. 백이현과 한바탕했던 아침 넋이 반쯤 빠져서는 습관처럼 학교를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할부가 30개월이나 남은 휴대폰 안 잃어버린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계속 쏘아보던 눈초리에 못 이겨 결국은 이실직고를 해야 했다. 없는 지갑이 말한다고 마술처럼 뽕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숨을 크게 들이 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솔직히 털어 놓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제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뭐어? 어쭈. 지금 벌금 안 내려고 잔머리 굴리냐? 뒤져서 나오면 10원당 깐다."
"아니에요. 절대! 정말 아침에 잃어-"
"야- 인마! 다나까! 다 까먹었어?!"
우리 동아리는 엄격했다. 여러 과 애들이 모인 만큼 위계질서가 분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눈물 콧물 쏙쏙 빼는 쪽도 연극 영화과의 직속 후배인 나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떨어지는 불호령에 마음이 울컥했다.
억울한 것도 있지만, 우리 과나 다른 과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다 보는 앞에서 소리 듣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백이현. 그래 네 앞에서 당하는 망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오늘 오전, 부전공 수업 때 당한 망신은 대수롭지 않던 내가 지금은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힐 만큼 서러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제가 대신 낼게요."
애꿎은 바닥만 발끝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번쩍 들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곧 죽어도 신세는 지기 싫은 내 자존심이 반응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백이현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다. 버럭. 네가 왜? 야, 백이현. 네가 왜. 내 벌금을 내는데. 그 와중에도 따곡 따곡 따져 물었다. 백이현은 대답이 없었다. 지갑에서 파란 지폐 두 장을 꺼낼 뿐,
"이게 선배한테, 야. 너.라고 해?"
아뿔싸. 그제야 엄청난 실수를 감지했다. 내 감정에만 치우쳐 둘만 있을 때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과 선배님의 눈이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아까보다 한층 더 엄해졌다.
"백이현. 넌 후배가 기어오르게 내버려 뒀어? 선배를 뭘로 알겠냐고. 어? 1년 차는 후배도 아냐?"
엄연히 학번이 다른데!
그랬다. 백이현과 나는 학년으로만 1년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나이까지 1년 차이는 아니었다. 그저 백이현이 2월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일찍 입학한 것 밖엔 없었다. 고작 몇 달 차이로 학년이 1년씩이나 차이 난다니. 나로서는 기가 차고 막힐 노릇이었다.
'하여튼 빠른 것들은 다 없어져야 해. 아주 족보 꼬이게 하는데 뭐 있다니까. 최고 싫어. 개 짜증 나.'
언젠가 백이현 앞에서 뭣도 모르고 이렇게 말 한 적 있었다. 피식 웃더니 찔렸는지 '그럼 말 놓던가.' 하던 백이현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고 신기한 물건 쳐다보듯 날 바라보던 시선. 우리가 남들 보기에 선후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트게 된 계기였다.
"제가 말 놓으라고 했습니다. 영원이는 잘 못 없어요."
"어쭈, 선배 앞에서 싸고돌아? 잘~ 들하는 짓이다."
"……………."
세상엔 해야 될 말고 해선 안 될 말이 존재한다. 그런데 오늘 나와 백이현은 후자의 경우였다. 나도 모자라 백이현까지 대들었으니. 같이 소리만 안 쳤다 뿐이지 대든거나 마찬가지였다. 더더욱 선배가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과 망신은 니들이 다 시키는구나."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러고도 니들이 연영과야?! 어?!!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 이새끼야! 니들은 남아."
그래도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선배를 향한 무조건적인 백이현의 사과. 까칠하고 깐깐한 여자와 선배의 다그침. 점점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 길로 동아리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내가 숨을 좀 쉴 것 같았다.
둘 다 남으라는 말 뒤로 너 거기 안서! 저. 저 버릇없는 기집애 같으니!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솔직히 남아 있을 타당한 이유도 찾지 못 해서이기도 했다.
사실 자존심 따위 굽히고, 죄송하다고 하면서 숙이고 들어가면 끝날 일인데, 형용할 수 없이 기분이 나쁘고 불쾌해지는 건 왜 그런 거지. 또다시 나 자신에게 끝도 없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뭔 놈의 자존심이 이렇게 센지. 한 영원, 너 왜 이러고 사냐. 그러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디 가."
"……………."
"어디 가는데!"
"……………."
"내 말 안 들려!"
앞만 보고 냅다 달리다, 변이현 목소리에 그제야 우뚝 멈췄다. 급하게 쫓아오던 발걸음도 급히 멈추었는지 신발 끌리는 소리가 났다.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와서, 언덕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따라오지 마. 오지 말라고. 건물 앞에서 나와 민혁 씨를 지난 것처럼 그렇게 지나치란 말이야.
속으로 끝없이 외쳤다.
"집엔 어떻게 가려고."
지갑 없잖아.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목소리. 뒤돌아서면 닿을 거리에 있는지 등줄기가 쭈뼛 설 만큼 그의 기운이 강하게 서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백이현을 내 뒤에 세워둔 채. 주먹을 가득 쥔 손 틈 사이로 땀이 나기 시작해 미끈 미끈해졌고, 무의식 적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너……"
"그동안 무례를 범했습니다."
"영원아."
"마지막 무례로, 먼저 가볼게요."
"……………."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한영원.
그대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그대로 심장이 멎어. 탁한 숨이 기도를 막아버렸다. 신선한 새 공기를 폐부로 들이 마시지 못 했다. 차마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목소리. 그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 속엔 많은 의미들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정확한 뜻은 알지 못 했지만.
"춥게 입고 다니지 말랬잖아."
아침저녁으론, 아직 쌀쌀해.
막무가내인 나에게 밀려드는 서운함을 폭발시키지 않고, 평정심을 찾은 백이현이 다시 차분한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내 어깨 위로 그의 향이 가득 퍼졌다. 백이현의 가디건이 덮여서 그런지 아까보다 따스해진 어깨 축. 하지만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몸 생각하라고."
너 그날이면 일어나지도 못 하고 누워서 끙끙 앓잖아.
아침에 시답지 않은 변명으로 둘러댄 말에 지나지 않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거였는데. 세심하게 나의 감정선을 슬슬 건드리고 있었다 백이현은.
"아침에 너 보내고, 편하지 만은 않았어."
"……………."
"내가 멍청한 건지. 어젯밤 상황이 이해가 안 돼…."
"……………."
"왜 그랬던 건데. 이유가 뭐야."
알고 싶어 했다. 내가 갑자기 차가워진 이유. 그리고 돌아가라고 했던 이유를. 정말 본인은 모르는 걸까. 조금의 짐작도 못 하나? 최소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미안해하는 건지.
그래 그건 좀 오버스럽다. 아 몰라 머리 복잡해. 내가 백이현을 좋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일이 꼬이고 꼬였다. 단순히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든데.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 전처럼, 말 편하게 할 수 없어?"
"전 이게 편해요."
"난 불편해."
불편하다고 말하는 백이현. 전과는 확실히 오가는 대화가 달랐다. 존칭을 붙임으로써 우리 사이에 엄청난 벽이 가로막은 기분이었다. 비존대와 존대의 차이는 예상보다 컸다. 어쩌면 백이현의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선배랑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뒤를 돌아 백이현을 향해 확고히 얘기했다. 어깨에 둘러진 가디건을 벗어 손에 잠시 쥐고 있다가 백이현에게 내밀었다. 뻗은 손끝에 겨우 매달린 가디건이 왠지 그의 상태 같았다. 위태롭게 쳐다보는 시선. 또다시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 난 해야겠어."
"혼자 있고 싶어요."
"내가 데려다 줄게."
"아뇨. 싫어요."
너 정말!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답답해서 억울하다는 표정. 처음이었다. 아까 억누르던 감정을 삼키던 얼굴이 아니었다.
고집불통, 한영원. 이 바보야.
눈빛이 변했다. 호소하다 먹히지 않자. 상처받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가득 맺혔지만 터지지 않은 입을 달싹이며 우리 두 사람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더 독한 말로 아프게 했다. 그가 아파 할 줄 알면서도.
"… 왜요. 화라는 게 나세요?"
"……………."
"그래요. 우린 처음부터 아니었나 봐요."
"……………."
"버거웠다고요. 나한테 선배."
"……………."
"차고 넘쳐요. 잡히지 않아."
"……………."
"이젠 같이 다니는 것도 부담 돼요."
그 정도로만 알아두세요. 그게 이유에요.
몸을 틀어, 냉정하게 돌아섰다. 사실이었다. 우린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생각. 하지만 더 정확한 사실은 내가 백이현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이유라고. 처음부터 그 이유였다고. 가슴속에서 울리는 말을 삼켰다. 끝끝내 할 수 없는 진심을.
"난 아니야. 아니라고."
"……………."
"내가!"
"……………."
"너를!"
등 뒤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 크게 결심에 찬 목소리였다. 힘주어 말하는 강세가 내 발목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한영원, 너를…… 좋-"
"한참 기다렸어요."
흰색. 잘 빠진 차 한 대가 내 앞으로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 운전석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예상치 못 한 인물이 내렸다.
"민, 민혁 씨?"
"문자 못 봤나 봐요. 기다린다고 했는데."
"여긴… 어떻게……."
말 끝을 흐리며 민혁 씨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나를 향해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 예뻤다. 웃을 때 환한 미소가 돋보이는 민혁 씨. 차 문을 닫고 다가와 내 손을 잡고 단단하게 깎지를 끼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나랑 같이 있자고 했잖아요."
"……………."
지금 이 순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간에서는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뒤에 있는 사람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