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갤 돌려보니 차분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웃고 있다.
“혹시... 이석철씨 되세요?”
“예? 예.”
이 여자는 누군데 날 알고 있지?
“아, 전 주은경이라고 합니다.”
“예? 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는데 여자는 벽에 붙어있는 김의정이란 이름을 가리키며 웃었다.
“제 남편이요.”
“아, 예, 반갑습니다.”
이 여자가 그 아내구나. 근데 어떻게 날 아는 거지?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남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예?”
뭐?
“전 거의 매일 밤 만나거든요.”
“아.”
매일 밤 꿈에서 본다는 건가?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진 않죠?”
“아, 뭐. 예.”
아니.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다만, 여기가지 온 나도 이상한 것일 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머리를 굴려 간신히 한 마디를 뱉었다.
“저기, 지금 환자 상태는 어떤 가요?”
“좋아지겠죠.”
“아.”
무척 애매한 대답이다. 분명히 의식불명인 상태이니만큼 좋다곤 할 수 없을 텐데 이 여자의 태도가 전혀 무겁다거나 어둡지는 않은 분위기라 더 그런 것 같다.
“괜찮으시면 잠깐 내려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실래요?”
“저, 먼저 환자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러세요.”
여자가 문을 열어준 덕분에 바닥을 보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맡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확인하고 발치에 섰다. 하지만 선 뜻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내 눈앞에 누워 있는 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엔 꽤 용기가 필요하다.
“후우.”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심호흡을 하고 고갤 들었다.
내 눈앞엔 너무나 편안한 얼굴의 남자가 누워있다. 늘 꿈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들과 감정들이 날 붙잡아 흔든다. 잠시 시공간을 넘어 어디 혼자 떨어진 것처럼 생각도 판단도, 뭣도 할 수 없다.
“저기.”
조심스레 내 어깨를 두드린 여자 덕분에 얼떨결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예?”
“괜찮으세요?”
“예? 아, 예.”
내 머리와 마음 뿐만이 아니라 겉보기에도 정신이 나가 보이긴 했나보다. 여자는 계속 걱정스런 얼굴로 날 살펴보고 있다.
“괜찮습니다. 좀 놀라서요.”
“네.”
내 말이 여자를 안심시킨건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어. 그.”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더듬 거렸다. 여자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일단,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하실까요?”
여자가 옆환자를 살짝 쳐다봤기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 할 수 있었다.
“아, 아, 예.”
난 잠시 서서 병실 안을 보다가 여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날 돌아보며 묻는 여자.
“아, 전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대접할게요. 별 건 아니지만.”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요.”
여자는 웃으며 자신의 카드로 결제를 했다.
구석자리였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가득 차버린 관계로 카페의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울려대는 진동벨을 들고 일어났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웃으며 날 본다. 난 웃음으로 대답하고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갔다.
“잘 마시겠습니다.”
여자는 대답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오셨네요.”
“예?”
여자는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 예.”
“남편이 조만간 올 거라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안 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 제가요?”
“네. 아무래도 이런 일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어려울 것 같아서.”
“아, 그렇죠. 사실 지금도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얼떨떨합니다.”
“그러실 거에요.”
여자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정말 의식불명의 환자 보호자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차분하고, 편안해 보인다. 억지로 꾸며낸 게 아닌 자연스러운 편안함.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까지 차분해 지는 기분일 정도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말이 안 되죠. 뭐, 영화나 소설이라면 모를까.”
“근데 제 입장에선 믿고 싶기도 해요. 어쨌거나 남편을 볼 수 있는 거니까요. 제가 그냥 남편이 그리워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 진짜 남편이란 거니까.”
“아, 그렇겠네요. 그래요.”
가족이라면 뭐라도 믿고 싶겠지.
“어떻게 된 건가요?”
“남편이요?”
“예.”
여자는 커피 한 모금을 또 마시고, 짧게 한 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2주 전이에요. 아직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일곱 시가 되기 전이었어요. 가게로 나가려고 일어나던 참이었으니까.”
“아. 예.”
“그날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 가게 오픈을 하고, 바로 나가야 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조금 일찍 물건을 떼러 간거고.”
이제와서 더 놀랄 것도 없다 싶지만, 꿈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맞아 들어가니 역시나 믿기 어렵다.
“전화받고 병원으로 바로 왔어요. 그리고 그 때부터 쭉, 저런 상황이죠.”
“아. 그럼 지금 상태는...”
“아직 의식이 없긴 하지만 의사 선생님 말씀이, 뇌사는 피했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도 뇌로 가는 산소의 공급은 늦기 전에 됐다고...”
“그럼, 발견이 늦은 건 아니었나 보군요.”
“네. 다행히도...”
의식이 없다는 것과 뇌사상태란 것이 다른 건가? 음, 이쪽으론 의학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잘 모르겠다. 아무튼 깨어날 가능성은 있다는 의미겠지?
“2주가 지난 지금도, 큰 차도는 없지만...”
“곧 일어나겠죠.”
“네. 그럴 거에요.”
여자는 또 편안한 얼굴로 웃는다.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지만 이렇게 평온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래서 일단 가게 문을 닫았어요. 처음 며칠은 병원에서 꼭 붙어 있었죠.”
여자는 잠깐 멀리 어딘가를 멍하니 보다 말을 이었다.
“근데, 남편이 꿈에 나타났어요. 괜찮으니까, 병원에 하루종일 있지 말라고... 사실 병원비도 그렇고, 또... 아무튼, 돈은 벌어야 하니까요. 지금은 예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고요.”
“예전에 하던 일이라면...”
“아, 학원에서 애들 가르쳐요.”
“아, 예.”
“지금 저렇게 누워만 있는데, 신기하게 마음이 불안하거나, 하진 않아요. 매일밤 꿈에 나와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잡고 편안하게 기다려야 겠단 생각도 들더라고요. 남편이 돌아왔을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예.”
원래 성격이 차분하고 담대하고, 뭐 그런 거겠지. 물론 꿈의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이 상황에서 저렇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건, 강한 사람이란 의미다.
그나저나 그건 그거고, 지금 이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근데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꿈에서 만난 사람을 가지고 현실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여자는 괜히 뿌듯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아내라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믿기는 힘드셨을 텐데요.”
“네. 처음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이런 꿈까지 꾸나 싶었어요. 근데, 단순히 꿈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했어요. 너무 생생하기도 했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남편이 꿈에서 한 이야기거든요. 자리가 나 있을테니 연락해보라고... 속는 셈치고 시키는 대로 하니까 남편 말대로 다 되더라고요.”
“음.”
“그래도 좀 긴가민가 했었는데 그냥 믿기로 했어요. 사람이 어떤 원리로 꿈을 꾸는건지 뭐 그런건 모르겠지만 꿈에 나온 남편이 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가 못 믿으면 누가 믿겠어요.”
“예.”
“실제로 남편이 말한 대로 석철씨도 오늘 이렇게 오셨잖아요.”
“그러네요.”
“남편과는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셨죠?”
“예? 예. 어느 날 뜬금없이 꿈에 나오더군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좀 놀랐죠.”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알아보나봐요. 원체 성격은 활달하고 외향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더군요. 처음 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걸 보면.”
“그런 스타일이에요. 좀 융통성 없긴 하지만.”
여자는 괜히 뿌듯해 하는 것 같다.
“그 식당은 잘 됐었나요?”
“오픈한지 5년 정도 됐는데, 아주 잘 됐다기 보단 적당히 먹고 살만은 했죠. 가게자체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이태리 레스토랑이죠?”
“네. 정확히는 이탈리안 가정식 레스토랑이에요.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엔 소박하지만.”
모르겠다. 괜히 애먼데 말려든 것 같기도 하고,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이 여자를 보고 있으니 진짜 그런가보다 싶기도 하고.
“저, 잠시 담배 하나만...”
“아, 예. 그러세요.”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담배만한게 없다.
카페를 나와 담배 하나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
***
“후우.”
“꼴초네, 꼴초.”
어느새 내 옆에 선 남자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눈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다.
한강을 보며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맡고 있으니, 굉장히 기분이 좋다. 시원한 날씨를 즐기려는 듯 삼삼오오 나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즐겁게 모여있는 사람들 무리도 많이 보이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인가.
“믿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아이스크림 하나가 쑥 나온다.
“이건 뭐야?”
“좋잖아. 아이스크림.”
“오늘은 채소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냐?”
녀석은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오늘은 타이밍이 좋아서.”
녀석에게서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아 한입 물었다.
“가 보니 어때?”
“어떻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내 존재를 직접 봤잖아.”
“몰라.”
지금 내 머릿속을 표현할 말은 ‘몰라’ 라는 두 글자가 가장 적당하다.
“아무튼 당신이 보고 온 게 지금의 내 상황이야.”
건네받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물었다. 부드럽고 달콤한게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다.
“어때?”
“맛있네,”
“아니, 그거 말고. 나 도와줄 거지?”
남자의 웃는 얼굴을 보니 버럭 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한 거겠지. 내가 병원에가서 그를 직접보고, 그의 아내까지 만나고 나면 거절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서... 교활한 놈.
“그런데 내가 그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고?”
“일 처리 하는 걸 봐도 그렇고, 당신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봤을 때 당신은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니까. 짬밥이 있잖아.”
“그럼 내가 중간에서 장난 질이라도 친다면?”
“말했듯이 당신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람은 쉽게 믿으면 안 돼.”
“사람을 못 믿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지금의 내 경우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계속 모르겠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다.
“그 뺑소니... 뭐, 그래.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긴 하지. 근데 왜?”
“어?”
“왜 잡으려는 거야? 범인을 잡는다고 건강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범인을 잡는다고 뭐가 달라질 상황은 아니잖아.”
“그게.”
의정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먼산을 본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보험금을 받고 있어. 일단은 그걸로 병원비도 쓰고 있고. 근데, 합의금이건 뭐건 돈이 필요한게 사실이야.”
“잡는다고 돈을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냐.”
“알아. 첫 번째 이유는 그렇고, 두 번째 이유는, 뭔가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그래.”
“신경쓰이는 거?”
“어. 아무래도 ‘사고’ 같지 않은 기분이 들어서.”
“왜?”
“그게 일단 정황상, 그 조용한 길에서 날 일부러 칠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고가 날 수가 없잖아. 내 차가 바로 옆에 라이트까지 켜고 서 있었고, 막 2차선 도로에 미친 듯이 달릴 만한 도로도 아니니까.”
“그건 알 수 없지. 세상에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지 돌 때까지 술 걸치고 몰았을 수도 있는 거고.”
“뭐...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지. 그리고 조금...”
“뭐?”
“조금 찝찝한 게 있어. 날 일부러 쳤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 어디서 원한 산 거 있어?”
“원한... 까진 아니지만, 그 비슷한...”
“흠.”
“모르겠어. 내가 생각말곤 할 게 없어서 내 생각에 빠져서 그런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솔직히 이 상황이 화도 나고...”
“뭐, 그래. 범인을 잡고나면 알게 되겠지.”
“아. 그럼 도와주는 거야?”
“몰라.”
녀석은 친한 친구마냥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근데 서른 다섯이더라?”
“아, 어떻게 알았어?”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너 나보다 한참 어린 놈이 꼬박꼬박 반말이나 하고. 어?”
“뭐 어때? 꿈인데.”
녀석은 눈썹을 들썩거리며 해맑게 웃고 있다. 그래. 이 마당에 나이가 무슨 대수냐.
“그나저나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을땐 어떻게 불러내야 되는 거지? 전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못 올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매일 밤 내가 올게.”
“급한 일이라도 있어서 그 쪽을 꼭 봐야 한다면?”
“어차피 당신은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잠들지 않는 한, 날 못 만나잖아.”
“어?”
그렇다. 어디까지나 이 친구는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뿐, 움직이는 건 낵 해야한다는 거다,
“뭐 혹시 기억나는 거나 도움이 될만한 거 없어? 당시 자세한 주변 상황이라던가...”
의정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날 슬쩍 보며 이야길 시작한다.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