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씽클린.”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 앞엔 언제나 익숙한 사무실 풍경이 펼쳐져 있고, 언제나 차가운 사무실 공기가 날 감싸고 있다.
여전히 ‘씽씽클린’ 이란 말이 귓가에 맴돈다.
아무래도 잠꼬대를 하고 거기 놀라 깬 것 같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사무실 안을 둥둥 떠다니는 하얀 담배연기에 섞여 ‘씽씽클린’이란 네 글자가 사무실 안을 꽉 채운 기분이다.
아무래도 놈은 단순히 꿈에 나타나는 능력 외에, 잠에서 깨고 나면 여운이 아주 오래가도록 하는 능력도 함께 가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씽씽 클린이란 이름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내가 분명 저 씽씽클린이란 이름을 들어봤었는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낯 익은 이름인데.
담배를 끄고 전화를 집어 들었다. 종혁이와 진호 건 역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보니, 멍하니 앉아서 담배 하나 피우고 나면 빠릿 빠릿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예. 사장님. 아침부터 어쩐일이십니까.”
“아침부터 어쩐일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고 말고 할 만한 일이 있진 않았고, 조금 전에 애들이 진호 데리러 갔습니다.”
“너네 가게는 확실히 안전한거지?”
“그럼요. 우리 신령님이 지켜주시는 곳인데요.”
“도착하면 연락하고.”
“그러죠.”
“생판 모르던 고삐리랑 같이 있으려면 신경쓰일텐데, 그래도 잘 부탁한다.”
“어이구?”
“왜?”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왜, 짜샤.”
“아니, 사장님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분이셨나 싶어서.”
“뒤질래?”
문상이 녀석은 혼자 큭큭대더니 곧 말을 이었다.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진호를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 안전은 물론이고, 영업도 할 수 있으니까요. 걱정하시는 것처럼 고생하진 않으니, 마음놓고 일 보세요.”
딱히 걱정을 한 적은 없지만, 걱정과 격려의 한 마디가 문상이를 더 적극적으로 만들거라 생각하고 했던 말이다.
역시, 단순한 놈.
“아, 참. 너 혹시 씽싱 클린이라고 들어봤어?”
“예? 그게 뭡니까? 새로 나온 세제?”
“됐다.”
전화를 끊고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무작정 사무실을 나서 자동차에 올라 휴대전화를 꺼냈다.
씽씽클린. 분명 낯익은 이름인데 말이다. 내가 최근에 만난 사람은 문상이, 박형사, 윤팀장님, 종혁이...
이 중 누구도 그런 업체랑 관련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그냥 길 가다 본 걸까.
우선, 박 형사를 찾아가 진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씽씽클린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건물 뒤편 주차장에서 차를 뺐다.
천천히 도로가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노란 승합차가 내 앞을 막아섰다.
“아. 씨. 놀래라.”
승합차의 문이 열리더니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애들이 우루루 내리기 시작했다.
“차를 이따위로 대놓고 이씨.”
내려서 한 마디 하려다 내 차를 피해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니 이건 내가 저 아이들 앞을 막아선 꼴인 것 같아 참았다.
피아노 학원이 나간 자리에 태권도장이 들어선 모양이었다. 이사나간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로...
아! 그렇다. 씽씽클린.
피아노 학원이 이사나갈 때 청소하러 왔던 업체. 젊은 사장과 중년의 직원들. 조그만 피아노 학원 이사에 동원될 업체라는 점에서 이 근처를 기반으로 운영중이며,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니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따지고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새 텅 빈 노란 승합차가 앞을 비켜줬기에 천천히 도로가로 차를 움직여 나왔다.
이미 이야기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내 사무실에서 경찰서까진 아주 가깝다. 그래서 얼마지나지 않아 경찰서 주차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차를 세워두고 무작정 강력팀의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박형사에게 밥이나 얻어먹으러 경찰서를 들락거릴때완 다르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지, 다시 예전의 그 기분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참 사건 수사에 열을 올리다, 사무실로 돌아올 때의 그 기분.
건물입구로 들어와 계단을 우다닥 뛰어올랐다. 강력계 사무실로 들어서자, 윤 팀장님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 팀장님, 다들 어디갔어요?”
팀장님은 날 흘끔 보더니 귀찮은 듯 대답했다.
“어디 갔겠냐?”
“무슨 사건 터졌어요?”
“그래. 바쁘니까, 다음에 다시 와.”
“저도 놀러...”
놀러 온 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어쨌든, 한참 바쁠때의 저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직 팀장님과 상의할 정도의 일도 아니니까.
“그럼, 수고하세요.”
팀장님은 대답대신 손을 번쩍들어 흔들곤 휴대전화로 어딘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쓸쓸히 뒤돌아 사무실을 나선다. 괜히 경찰시절로 돌아갔던 마음이 급속도로 되돌아 왔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는 외부인일 뿐이고, 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말자.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짓 아닌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 한쪽에 세워뒀던 자동차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올라 멍하니 앞을 보고 있으니, 누가 밑에서 날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무기력한 기분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감정기복따위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 아닌가.
“진짜 갱년기도 아니고, 지랄 말고 꺼져.”
괜히 혼자 소리내어 혼잣말을 한 뒤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곤 검색창에 씽씽클린을 치고 돋보기버튼을 눌렀다.
상단에 바로 청소업체 씽싱클린이란 광고글이 나왔다. 홈페이지로 들어가 슬쩍슬쩍 훑어봤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 가정집 등 이사청소 및 대청소등을 해주는 평범한 업체인 것 같다.
주소를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전화로 이것저것 묻는 것 보다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고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멀긴 했지만, 어쨌든 20분 내외로 도착할 만한 거리.
계속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씽씽클린에 도착해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주택가의 3층짜리 상가건물앞에 도착했다. 건물의 출입구 앞에는 ‘씽씽클린’이라 적힌 하얀색 승합차가 서 있다.
승합차 뒤쪽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건물의 3층. 좁은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니 역시나 낡은 철문이 기다리고 있다.
주먹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안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다.
한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일단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조그만 사무실이 나타났다. 아니, 사무실이라기 보단 창고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청소기를 비롯하여 온갖 청소도구들이 정리가 안 된 듯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사무실 출입구 반대편에 작은 문하나가 보여 조심스레 문을 향해 걸어가며 한번더 사무실을 둘러본다.
아무리봐도 별로 특별한 게 없다.
작은 문 앞에서 다시 노크를 했다.
“예.”
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짧고 굵게 들려왔다.
“후우.”
짧게 호흡을 한 번 뱉고 문 손잡이를 돌렸다.
작은 나무문을 여니 조금 더 사무실 같은 광경이 나타났다.
가운데에는 낮은 테이블과 그 주변을 둘러싼 소파. 그리고 창가쪽에 놓인 책상과 그 앞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
피아노 학원이 이사가던 날, 차에서 내렸던 정장차림의 그 남자가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날 빤히 보고 있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뭘 좀 여쭈려고 왔습니다.”
남자는 꼼짝않고 눈만 깜빡이며 날 보고 있다.
“2주전에 있었던 뺑소니 사고 때문에요.”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위 서류들을 뒤적거리더니 다시 날 보며 되물었다.
“뺑소니 사고?”
“예.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쭙고 싶은게 있어서 왔습니다.”
“경찰이세요?”
경찰일을 그만두고 난 뒤에 받는 가장 난감한 질문 중 하나다. 이대답에 따라 상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현직은 아닙니다만, 뺑소니 사고 관련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요?”
“혹시 간선도로쪽 공장앞 길에서 있었던 뺑소니 삭에 대해 아세요?”
“아니요.”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생각을 하는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사고가 있었던 날의 날짜와 시간, 좀 더 정확한 장소를 말하며 되물었다.
“모릅니다.”
남자는 표정변화없이 그렇게 말한 뒤 다시 고개를 숙여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날 사고현장에서 씽씽클린이라 적힌 하얀색 승합차를 봤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서류를 뒤적거리던 남자는 손을 멈추고 날 다시 쳐다본다.
“그래서요?”
“그래서 혹시 아시는 게 있을까 하고 찾아 왔습니다.”
“모른다고 세 번째 말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시면.”
“아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십니까?”
남자는 내 뒤의 문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업무시간이니, 볼일 다 보셨으면 좀 나가주시죠?”
“일단 저도 제보를 받았기 때문에.”
“아니,”
남자는 내 말을 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도 아니라고 하셨죠?”
“예? 예.”
“그럼 제가 더 협조할 이유도 없는 거겠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없고,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굳이 저와 더 이야기를 하셔야 겠다면 경찰과 함께 영장이나 소환장이라도 가지고 오시던가요. 그래봤자 제 대답은 똑같을 테지만.”
이쯤되면 여기서 더 버티고 있어봐야 뭘 알아낼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곤란한 입장이 될 뿐이다.
“예.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꾸벅인 뒤 돌아섰다. 남자의 사무실을 나서며 뒤쪽을 흘금 살폈다. 남자는 다시 책상위의 서류를 뒤적이며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다시 창고 같은 공간을 거쳐 철문 밖으로 나왔다. 좁은 계단을 내려와 건물 입구 앞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
남자의 태도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지만, 이해못할 범위는 아니다.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은 마음과 업무로 바쁜 상황이라면 경찰도 아닌 내게 주절주절 다 말할 필요도 없다.
사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자의 반응역시 별 다른 건 없었다. 딱히 동요하지도 않았고, 표정이나 작은 손짓조차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의정은 이 하얀 승합차를 봤다고 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 차를 봤다고 확신했을 정도다.
의정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이 차가 그 시간에 거길 지나간 게 사실이라면, 저 남자는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담배를 끄고 차에 오르려는데 멀리서 두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둘은 느긋하게 걸어 건물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옷차림은 꼭 도배공사하다 온 사람같았다.
담배연기를 뱉는 두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
피아노 학원이 이사가던 날, 씽씽클린 승합차에서 저 정장남자에 이어 내렸던 작업자.
이 사람들이 작업자들인 만큼 그 시간에 어딘가 청소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면 더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연기를 뿜어내는 남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저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