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게 응접실 소파 증 가장 구석에 놓인 데 앉은 진호는 괜히 고갤 두리번 거리며 자신의 손 끝을 보기도 하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어쨌거나 내가 본 진호의 얼굴 중 가장 좋아보이긴 한다.
“어때?”
“예?”
“여긴 좀 지낼만하니?”
“아, 조금 불편하긴 한데, 있을만은 해요. 점보는 거 듣는 것도 재밌고.”
진호는 여전히 현관앞에서서 분위기 잡고 있는 문상이 똘마니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누가 찾아오거나 연락이 오진 않고?”
“집 나올 때 휴대전화는 꺼놓고 한 번도 안 켰어요.”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어? 뭐라고 안 하셔?”
“매일 자기전에 연락드리고 있어요. 캠프인줄 아시니까, 전화꺼뒀다고 뭐라 하시지도 않고.”
아무튼 간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너네 둘이 혹시 따로 할 이야기 있고 그런건 아니지?”
내 말에 진호와 종혁이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아니, 둘이 너무 애틋한 거 같아서 혹시 따아무도 모르게 할 이야기라도 있나 했지.”
나름 농담이라고 한 건데 둘은 동시에 헛웃음을 짓더니 한심하단 눈빛으로 날 본다. 요즘 애들은 농담이란 걸 안하고 사나.
그나저나 오는 길부터 꼬르륵대던 배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도 이미 식사시간은 지난 것 같다만, 그래도 문상이와 그 똘마니들이 살고 있는 집이니, 먹을게 없진 않겠지.
“저기, 뭐 먹을 것 좀 없어?”
“예?”
“아니, 내가 아직 밥을 못먹어서 말이야. 배가 너무 고픈데, 뭐 먹을 것 있음 좀 줘봐.”
“아. 그럼, 짜장면이라도 시켜드릴까요?”
“혹시, 너넨 안 먹을거냐?”
진호와 종혁이는 미리 짜두기라도 했다는 et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괜히 남의 영업집에 와서 냄새 풍겨가며 배달음식까지 먹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다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먹는 거면 더더욱 민폐가 될 것 같다.
“그럼, 한그릇만 부탁좀 할까?”
생각과는 전혀 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내 입이 위장의 지시를 듣기로 했나보다.
말을 뱉어놓고, 문상이 똘마니가 전화를 꺼내 주섬주섬 주문을 하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짜 민폐끼치는 기분이 들었고, 지금이라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에라이 뭐 어때. 배고프면 먹는거지.
차라리 마음 편하게 짜장면이나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진호와 종혁이는 잠시 어색하게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뭐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야.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둘은 동시에 날 흘끔 보더니 관심없다는 듯 또 속닥거리고 있다.
하여간 사춘기 고딩들의 생각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배달되어 올 짜장면이 도착하면 배나 채우고 적당한 때 내 사무실로 돌아가서 맘 편하게 쉬어야지.
적어도 내 사무실보단 훨씬 따뜻하고 편한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서 짜장면을 기다린다.
잘삶아진 면에다가 윤기가 잘좔 흐르는 ra은 춘장소스의 짜장면. 그위에는 오이를 얇게 채썰어 올리고, 이왕이면 완두콩도 몇 개 뿌려두면 딱 좋겠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오이를 채 썰어 올려주는 중국집이 몇 없는 기분이다.
난 오이를 참 좋아하는데 말이다.
그냥 흐르는 물에 잘 씻어서 생으로 먹어도 맛있는 오이.
오이.
“그래. 오이.”
눈 앞에서 의정이 오이를 흔들며 날 보고 있다.
“뭐야, 이거.”
“응? 왜?”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낯익은 풍경이다. 여긴 내 사무실인데...
“넌 갑자기 왜 나타났어?”
“그야, 댁이 잠들면 늘 찾아오겠다고 했잖아. 근데, 오이는 왜?”
“어?”
“아까부터 오이오이 노래를 불러댔잖아.”
“내가?”
“응. 그게 너무나 잘 들려서 오이가 필요한가 싶어 들고 온건데.”
이거 참 꿈이 어디까지 연결이 되는 건지 경계를 모르겠다.
“줄까?”
의정은 오이를 내 앞으로 쑥 내민다.
“됐어.”
이 인간을 처음 만난 날 뒤통수에 박혔던 당근이 떠올라 녀석이 들고있는 음식물들은 고낸히 께름칙하다.
“좀 알아봤어?”
의정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내 사무실을 빙 둘러보며 가볍게 물었다.
“뭘?”
“씽싱클린.”
“그래, 너 말 잘꺼냈다. 그거 확실히 본 거 맞아?”
“그렇다니까. 왜?”
“그 날, 그 시간에는 일이 없었다잖아.”
“정말?”
“그래. 원래 잡혀있던 일을 미루고 일찍 퇴근한 날이라 확실하다더라. 이쯤되면 그 작업자들말이 더 신뢰가 가지.”
“아닌데.”
의정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 봐. 그럼 내가 어떻게든 그 뒤를 털어볼테니까.”
“확실한 증거... 아니 진짜 내가 봤다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고.”
“그렇게 말하면 나도 딱히 뭐라 더 할말은 없지만... 아니, 이석철씨는 내말을 믿어야지.”
“그니까, 당신 말을 믿고 알아봤는데 아니라잖아요. 내가 그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가서 사장이랑도 이야기하고, 작업자들하고도 이야기를 했다니까.”
“그런데, 그날은 일이 없었다고 했단 말이야?”
“그래.”
의정은 내가 자신의 말을 못 믿는다는 것에 실망한 건지, 자신이 확신했던 게 사실이 아니란 말에 당황한 건지 한껏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 그 고양이한테 정신팔려서 뭔가 착각한 거야.”
“아니. 그럴리 없어.”
그 잠깐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의정의 목소리엔 또 갑자기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어느새 고갤들고 날 보는 의정의 얼굴역시 확신에 차 있는 표정이다.
“내가 분명히 봤다니까. 다른 사람 꿈속을 다니면서 본거랑 사고가 나기 전, 현실에서 봤던 거랑은 달라. 분명히 다르게 자각하고 있어. 이것까지 벙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분명히 달라. 그리고 그날 본 씽씽클린이 적혀있던 차는 확실히 현실이야.”
“그럼 뭐해. 그 직원들이 그날 일을 안했다잖아. 그럼 뭐 유령이라도 나타나서 그 차를 몰기라도 했다는 건데.”
의정은 내 말엔 다른 대꾸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날 빤히 보고 있다.
“그게 아니면, 뭐. 쌩쌩클린 이라거나, 씽씽그림 같은 글자를 잘못봤거나 그럴지도 모르잖아. 다시 잘 생각해봐.”
“아니. 확실히 씽씽클린이야.”
의정의 눈에선 레이저라도 뿜어져 나올 기세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해도 의정이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 같다. 이쯤되니 의정과 함께 씽씽클린으로 찾아가 직원과 삼자대면이라도 시키고 싶다.
“그래. 그럼, 그렇다치자. 그날 그 사고현장을 씽씽클린 차가 지나갔다 치자고. 직원 중 하나가 몽유병에 걸렸건, 진짜 귀신이 그 차를 몰았건, 뭐 어떻게 됐건간에 그 차가 그 시간에 거길 지나갔다 치자고. 근데 거기 일하는 사람들이 아예 그 날 일찍 퇴근하고 쉬었다는 말을 하는 거잖아. 그치?”
의정은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씽씽클린 차량을 쫓은 이유는 목격자를 찾기 위해서였고. 안 그래?”
이번에도 의정은 별다른 반응없이 내 얼굴만 빤히 보고 있다.
“그러니까, 아예 거길 간 적이 없다는 사람들한테 그 사고에 대해 아냐고 물어본들 뭐 얻을게 있겠어?”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의정은 내 눈을 뚫어져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 야. 그러니까 그런 거짓말을 왜 하겠냐고.”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거짓말이야.”
“사고를 냈다고 의심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고현장을 혹시 지나갔는지 묻는 건데 거짓말을 왜 하겠어? 그거야 말로 더 의심받을 일인데. 안 그래?”
“그러니까.”
의정은 내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했다.
“그 이유까지는 나도 모르지만, 누군가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라니까.”
“아니, 그.”
계속해봤자, 끝없는 도돌이표가 될 대화다.
난 말을 멈추고 대신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 뭐 그 중 누가 거짓말 했나보다.”
“내 말을 못믿는 거야?”
“어?”
의정이 처음으로 내게 공격적인 말투로 물었다.
“아니. 믿어. 믿을게.”
내 눈을 빤히 보던 의정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 좀 더 자세히 알아봐. 분명 거짓말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려다 의정의 눈을 보곤 말을 멈췄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해도 의정은 물러설 것 같지 않다.
“그래. 그래.”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기려는 생각으로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안 믿는 구나?”
“어?”
“내 말 안 믿는 거지?”
“아니. 믿어. 믿는다니까?”
의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자릴 피하려했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믿으라니까. 내 말을 믿어.”
의정은 코앞까지 다가와 소파에 앉아있는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믿어야 해.”
이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의정이 자꾸만 흔들어 대는 통에 머리까지 울린ㄴ 기분이다.
“응? 절대로 믿어야 해.”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사장님.”
눈을 뜨니 내 앞엔 문상이 똘마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보고 있다.
“어?”
“짜장면 왔다니까요. 무슨 낮잠을 그렇게 깊게 주무십니까.”
정신을 차리려 고갤 흔든 뒤 주변을 살폈다. 진호와 종혁이 눈을 깜빡이며 날 보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짜장면 한 그릇과 조그만 단무지 그릇이 놓여있다.
“면 불기 전에 빨리 드세요.”
“아, 그래.”
짜장면을 기다리다 잠들었었나 보다. 대낮에 이렇게 잠든겡 오랜만인데다 이렇게 잠든 후 꿈에서 의정을 만났다 깼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번 꿈속에서 의정은 이전과는 다르기 까지 했다. 낮잠이여서 그랬던걸까. 진짜 의정이 아니고 그냥 꿈이었을까.
아직도 몽롱한게 기분이 이상하다.
“안 드세요?”
“아, 먹어야지.”
요상한 꿈때문인지 공복가도 사라진 듯 했지만 일단 테이블 위에 놓인 짜장면을 뜯어 적당히 비빈 뒤에 입에 우겨 넣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끼니를 거른 것은 사실이니 굳이 안 먹을 이유도 없으니까.
기계적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면을 입으로 집어넣길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그릇은 비었다.
담배 하나를 피우고 적당히 소파에 늘어져 속닥거리는 진호와 종혁이를 쳐다봤다.
그러는 중에도 몇몇 사람들이 현관으로 들어와 문상이 방으로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했고, 내 머릿속에는 의정이 들락날락 거렸다.
짧은 겨울의 해가 지기 시작했고 바깥이 어둑해 졌기에 이젠키득거리기까지 하고 있는 종혁이를 보며 말했다.
“넌 안가냐?”
“가려고요?”
“그럼 여기 하루종일 있게?”
그제야 종혁이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상이가 있는 방을 흘끔봤지만 아무래도 지금 인사를 할 필요는 없겠지.
“문상이 나오면 나 갔다고 전하고 혹시 무슨 일 있음 연락해.”
“예.”
문상이 똘마니에게 말을 전한 뒤 진호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점집을 나섰다. 아직도 대문부터 현관까지 줄이 이어져 있는 걸 보니 문상이 놈이 돈을 많이 벌긴 하겠다 싶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골목어귀에 세워뒀던 차까지 걸어와 운전석에 올랐다. 종혁이가 조수석에 올라 벨트를 메는 것 까지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집까지 데려다 줘야 되냐?”
“아뇨. 그냥 아저씨 사무실에 내려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홀가분해보이는 얼굴의 종혁이는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나대로 머리가 복잡했던 탓에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더니 종혁이다 곧 따라 내린다.
”그럼 잘 가라.“
”또 와도 되죠?“
”오지 말라면 안 올거야?“
녀석은 피식 웃기만 하고 내게 고개를 꾸벅이더니 큰 길가로 총총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게 되니 기분이 더 찝찝하다.
차라리 종혁이를 사무실에 데려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보낼걸 그랬나.
이제와서 해봤자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마음 같아선 편하게 잠이나 푹 자고 싶은데, 잠들면 또 의정이 나타나 편히 잘 수도 없겠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2층 계단참을 돌아 3층으로 오르려는데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져 있다.
고갤 드니 내 사무실 앞에서 한 남자가 날 가만히 내려보고 있다.
”안녕하시죠.“
어두워서 얼굴이 안보였지만 이 목소리만으로 난 이게 누군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