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도 실재하니까.”
나는 그 혼잣말에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이해의 첫 발걸음이 뭐라고 생각하지?”
그는 오늘따라 유달리 질문이 많았다. 생각보다 술에 많이 취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답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아무 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증?”
“궁금증?”
그는 말 그대로 되묻는다.
“일단 궁금해야 파고들게 되겠지.”
“그래. 그런 것 같아. 너는 역시 내 마음을 읽고 있다. 읽고 있다는 말이지.”
나는 그의 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한다. 나와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나는 궁금해 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나는, 궁금해 했단 말이야. 궁금해 했단 말이다.”
“너 취했어.”
나는 술잔을 힐끔 보았다.
“왜 그녀는 나를 궁금해 하지 않을까.”
거의 주정이었다. 나는 앉아서 가만히 듣기로 작정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말을 꺼내지 않는 동안에 그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참 쓸데없는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중요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있었다.
남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그리고 그 무엇에도 응시당하지 않고 홀로 놓여있는 실체.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에 소속된 남자가 아니라 그저 단지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서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 것만으로도 우리가 맞닿아있는 틀은 꽉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녀 때문에 몹시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픔이 이해되는 것과 동시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했잖아.”
이윽고 던져진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사랑하진, 않는 것 같아.”
“왜?”
나는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상처받는 거야?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직설적인 질문이었지만 그와 나 사이의 관계의 기류는 진흙탕 물이 여전히 가라앉아 모기의 알을 키우는 것처럼 언뜻 잔잔한 것처럼 보이지만 잔잔하다고도 할 수 없는 무파동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게.”
“그렇게 대답하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어.”
“생각해보면, 너를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을 해왔다. 그 말은 내용을 뜯어봤을 때,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닌 듯했지만 그가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별로 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도 그도 서로를 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알아가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때,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다시 고민하게 되고 있었다.
“너는 어떻지?”
“나도 너를 궁금해 하지는 않았어. 이름도 몰랐다는 걸, 네 여자 친구를 만나고 처음 알았으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까 나도, 네 이름은 모르는군.”
그는 턱을 괴고 나를 보았다.
“너는 이상하게 나와 있을 때 편안해보여. 그런 사람은 처음이라서, 이상해. 너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증이 들지 않아. 이대로가 좋으니까.”
그는 모처럼 아주 자세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아까의 서툰 말투와는 다르게 침착하고 차분한 어투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네 여자 친구도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완전히 똑같은 기분일 수는 없으니까. 예컨대, 요점이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무슨 뜻이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거지.”
나는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런 게 비슷하지 않을까 해.”
나는 그와 있으면 마음이 정리가 된다.
그와 있을 때는 그 피상적인 겉모습들로 만족을 했다. 그 겉모습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피상적인 외로움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아.”
“네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너는 내 이름도 몰라. 추궁하려는 건 아니야. 나도 네 이름을 몰랐고 알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너도 내 이름을 모르고 알 생각조차 하지 않지?”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너를 처음 보는 순간, 꽤 마음에 들었어.”
“영광이군.”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고, 그리고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그대로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말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신중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어딘가 말실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어는 가끔씩 힘들었다. 묘하게 말을 하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이상하게,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 든다. 관계가 깨어지기 일보 직전. 여기서 멈추어야할 것 같다는 느낌도 있지만, 나는 그대로 내딛어버리고 만다. 아, 이렇게 하면 안되는구나를 깨치면서 일을 망치는 신입사원처럼.
“너는 내가 궁금하지 않지?”
“계속 묻네.”
“우리는 서로를 궁금해 하지 않지?”
내 물음에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나까지 끌어들이지? 나도 허상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그와 대화를 할 때는, 같은 더듬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돌리고 돌려서 알아듣기 힘들게 말할 적에도 그는 정확하게 그 곳으로 찾아오곤 했다. 모르는 척하지만 우리는 시선이 같았다.
“이상향이었겠지?”
“이상향?”
“네 겉모습 있는 그대로가 이상향이었겠지. 그게 정확하게 자신이 바라던 어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상품이라면 그 모습 자체가 정확히 그녀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을 거야. 반면에 너는 그 여자의 내부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내야하니까, 더 알아 나가고자하는 것 같아.”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그는 피식 웃어버린다. 물론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결례 섞인 말을 하고 있는지. 그러나 여기서 그만둘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지금의 균열은, 깨뜨리지 않고서는 복구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틀렸다면, 네가 지적을 해주면 돼.”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재미있는 말이군. 좋아. 지적할 테니 계속 말해봐.”
그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 여자의 관점에서는 네 겉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 원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알게 되면 모순점이나 원하지 않던 부분 등이 있을까봐 의도적으로 더 아는 것을 차단하는 거지. 물론 흑백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냐. 상대방을 더 알게 되거나, 더 알고 싶지 않아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것과 우리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아. 우리의 관계는, 조금 충격적이지만- 가장 순수한 동시에, 가장 안 순수하다는 거지.”
“말장난이야?”
“말장난 싫어해.”
“지금 하고 있는 게 말장난이잖아.”
“너는 나를 더 알고 싶어?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교류를 하고 싶니?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꿍꿍이, 어떤 미래와 어떤 가정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
“…….”
“우리는 사실, 충격적이게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어.”
“…….”
“그런데도 매우 만족하고 있어.”
“가장 순수한 관계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잘랐다.
“가장 피상적이지만.”
나는 덧붙였다. 그는 부인했다.
“우리는 꽤 깊이 들어갔어. 허상은 우리가 지닌 조건이지, 우리가 지닌 내면이 아니야. 이건 허상이 아니야. 항상 변한다고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것이 허상이면 모든 것이 허상이니까. 그녀가 나를 보는 게 허상이다. 이 말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런데, 지금 넌 너무 나갔어. 우린 피상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맞아. 내면. 그리고 외면. 허상이 뭘까. 내면이 허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외면은 다 허상인걸까? 난 그 외면의 허상을 보고 네게 다가갔잖아.”
“자꾸 복잡하게 나가지 마. 쓸데없는 것에 머리가 아파지잖아.”
“내가 허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해.”
나는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연계된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질리기만 한다면 바로 내일이라도 마치 내 인생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지낼 수 있어. 웃긴 일이지만, 소속된 곳 아무 곳도 없이 떠도는 나 자신은 가장 분명한 실체라고 하지만 실체가 없는 거야……. 여기서 헤어지고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찾아가면 될까. 방법이 없어.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조건들이, 사실은 실체인지도 모르지.”
“생각을 꽤 번거롭게 하는군.”
그는 생각하기가 귀찮다는 듯, 턱을 괴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입을 축였다.
“여기 있는 내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지.”
“그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매일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식량을 축내고 가장이 되거나 아내가 되거나 아이를 키우거나하는 일이란 말이군.”
“…….”
“농장의 가축처럼?”
그는 비아냥거리는 것 같지 않은 어투로 비아냥거렸다.
“내 말은 사회의 모든 것에 통용되는 말은 아니야. 그런 것을 다 아울러 말할 만큼 똑똑하진 못해.”
“그러면?”
“우리에 관한 이야기였어.”
“우리?”
“난 네가 여기에 나타나지 않기에 너를 잊었어.”
“…….”
“어렵진 않더라.”
“용케도 여기에 앉았군? 잊어버렸는데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가 말하면 비아냥거림도 비아냥거림같이 들리지 않았다. 일종의 슬픔과 가까운 감정을 내뱉어놓은 것 같은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그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보니까 반가웠지.”
나는 웃었다. 그는 그새 술이 깼는지, 평소와 같이 창백하고 멍한 동시에, 냉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네가 다시 사라지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면 돼.”
입을 연 것이 그의 대답으로 막히고 만다.
“사라진다는 건,”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나는 또 말이 막힌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필요한 게 있어?”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따지듯이 물어온다.
“그런 말이 아니야.”
“너도 조건 같은 게 필요하구나.”
“조건?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거야.”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살아있고 너도 여기에 살아있지. 분명한 현실이야. 살아있지. 분명하게. 그리고 살아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자신에 대해서.”
“그래. 맞아. 우리는 살아있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완벽하고 완전한 모습을 띠고 있잖아.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이 조명도 거기에 도움을 줄 것 같아. 완벽한 것, 완전하게 매력적인 것- 그런 것이 존재할까? 그게 존재한다고 매스컴에선 떠들어대지만 말이야……. 예전에, 나는 완전하고 싶어 했었어.”
그에게 다가간 것도, 오지랖이 넓어진 것도 예전의 나에 대한 경멸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 있었다. 예전과 같다면, 나는 다시 만났든, 다시 만나지 않았든 간에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으리라. 고작 2년 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태연스럽게 이것이 실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그래. 그렇게 완전하고 싶어 했었고, 다 알고 싶어 했어. 다 알고 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더라. 완전히 알 수 있는 사람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도 없더라. 나는 이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완전한 건, 아무 것도 이루어놓지 않은 허공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더 알아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어. 그 것도 문제일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했다.
“완전하고 싶은 욕심- 그건 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욕심이라는 걸 알아. 완전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 나는 당신을 완전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거야.
우리는 두려워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 돼. 그래서 오히려 다른 환상을 그리게 되기도 해. 모든 것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때가 있잖아. 그런 것이 깨지는 게 두려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도 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말하려는 게 뭐지? 내 사회적인 환경, 사실 그런 걸 이야기하자는 거야? 그런 걸 말해주지 않아서 불만이었다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게 틀려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들은 대부분 현실성 있는 대화가 아니었지. 하지만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해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아주 잘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되뇌듯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하건데, 나는 고집이 제법 센 모양이다. 나는 탁자에 놓인 흔들리는 작은 불꽃을 응시하며, 어떤 식으로 더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남들에게 별 것 아닌 것이 자신에게 중요할 때. 꽤 난처한 기분이 들고는 하지만 물러서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이 그런 기분이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또 하지만이야?”
그는 그래도 인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그치고는 있었지만, 크게 화를 내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어색함을 참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술집에 나가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뭐?”
“이 좁은 술집 바깥에서 우리가 만날 일이 있을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어. 물리적으로.”
나는 유리컵을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손으로 닦아내며 유리잔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피하겠지. 없었던 것처럼, 피할 거야. 여기서밖에 만날 수 없는 아주 깊은 인연- 그거, 환상일까? 실제일까?”
“쓸데없는 질문이군. 실재하고 있어. 사이비종교스러운 말이로군.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꿈이라도 된다는 말이야? 탁자라도 부수고, 청구서가 날아오면 그제야 내가 사는 이 세상이 현실이라고 깨달을 정도로 멍청한 나이는 지났잖아.”
“맞아. 난 멍청해.”
나는 수긍하며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술집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젖혔다.
“이차갈래?”
“뭐?”
“이차를 가보자고. 술집이든, 어디든.”
“……취했어?”
“너는 왜 그 여자를 궁금해 하지?”
“……글쎄”
“왜 그 여자는 너를 궁금해 하지 않을까?”
“보기보다 고집이 세. 알았어. 네 말이 맞다 해두지.”
“어느 쪽이 더 좋아한다고 나눌 수는 없는 게 마음이지만, 어느 쪽이 더 좋아하는 거야?”
“…….”
“겉보기로는 여자가 물론 더 좋아하는 거지만 말이야……. 내가 만약 너를 더 알고 싶다고 한다면, 그게 너한테 그렇게 부담이 많이 되는 걸까?”
“…….”
“일어날까?”
“일어나자.”
진성이라고 했던가. 이름보다는 ‘너’나 ‘당신’이라고 계속 호칭했던 말의 상대자.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밖까지 따라 나가며, 나는 그와 있었던 그 수많은 시간 동안 이 술집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집 밖에서 우리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현실인 것은 아마도 분명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사실 이 곳의 현실성은 아니었다. 나는 실체보다는 관계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런 면은 그와 달랐다.
계산을 하고 영수증이 찍힌다는 것 자체가 실체임은 확실하다. 그 영수증은 아마, 월급날 전까지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었고 우리가 만났던 것을 현실로 남기겠지. 하지만 관계가 현실이 아니라면, 그 것은 과연 현실일까.
드디어 계산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그와 아마 2차로 다른 곳을 가게 될까. 왜인지 모르게 떨리는 마음에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쉬었지만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다음에 보지.”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가게의 출구 앞으로 그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은 내가 잡기 이전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주인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나의 손목을 잡아끌며 묻고 있었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밖으로 내며 문을 바라보았다. 영수증조차 그가 가지고 가버렸다. 우리의 2차는, 없었다.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됐대?”
주인은 나에게 속삭여 묻는다.
“나는 그 여자랑은 상관없어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대답한다. 그 모습이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비쳤는지 주인은 더욱 흥미로운 웃음을 지어낸다. 나는 그 표정이 지겨워서 겨우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정말이에요. 나랑 저 사람은 그런 관계 아니에요. 저 사람과 나는 그냥, 친구라기엔 가까운…… 그런 거죠.”
“친구라기엔 가까운?”
그의 말에 섞인 장난기는 약간은 징그러웠다.
“개인적으로, 괴짜한테 관심이 많아요. 괴짜가 아니더라도 그냥 좀 독특하거나 다르거나 외롭거나, 그런 사람들.”
“그거 이상한 취미인데? 취미를 듣고 보니 너도 괴짜야.”
“그러게요. 예전에 아주 좋아했던 사람이 괴짜였거든. 아주 옛날에.”
“그 얘긴 처음 듣는데?”
주인은 자못 놀란 표정을 지어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약간 신기하고. 말을 전혀 안 해줬잖아?”
“말할 틈이 없었잖아요. 또 말하면 사람들이 안 좋아하고 그렇기도 했고.”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어?”
주인의 장난기는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죽었어요.”
나는 가벼움을 가장해서 웃으며 가만히 있다가, 문득 내 주머니 안의 진동을 느끼고 흘낏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왜인지, 이곳의 평온한 흐름이 평온한 정적이 어색할 정도였다. 나에게는 별 일이 아닌 게 아닌데, 왜인지 별 일이 아니게 스쳐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래. 지금 이 현실에서 그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지. 지금 닥쳐온 사실은 진성,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환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