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23살, 중학교 3학년까지는 한국에서 살았다고?"
"네."
주혜도 한국에 살아있었다면 여주처럼 23살이 되었을 것이고 대학교를 다녔을 거란 생각에 전학서류를 만지작거리는 채하의 손이 멈칫거렸다. 이상하게 느낀 여주는 채하의 안색을 살폈다. 23살인 저가 이제 와서 중학교를 졸업하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을 거란 생각에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아이들에겐 열여섯 친구인 게 더 낫겠지?"
"당연하죠."
긴장감에 양어깨에 걸쳐진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던 여주는 곧 채하가 열어젖히는 반으로 따라 들어섰다. 교실에 정갈하게 자리를 잡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딱히 나쁜 아이들은 없는 것 같아 안심한 그녀는 조심스레 제 이야기를 꺼냈다. 박수까지 받으며 환영받은 여주의 시선은 교실 맨 뒷자리에서 턱을 괸 남자아이들에게로 꽂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어느덧 그 아이들 앞에서 멈췄다.
"나는 이바다야. 잘 부탁한다."
"..이노아, 어디에서 전학 왔다고?"
"일본."
"일본어 할 줄 알아?"
"もちろん、日本語聞き取りはいますか?(물론, 일본어 알아듣기는 하니?)"
놀란 표정으로 굳은 둘을 보며 피식, 웃곤 다시 칠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 교시를 준비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간 채하와 동시에 반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여주를 에워쌌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심기가 불편한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곧 복도에서 마주한 주이에게 등을 떠밀려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우와, 일본에서 왔다고?"
점심시간, 주이는 여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찰싹 달라붙어 점심까지 함께 먹었다. 어린아이 같은 주이 옆에 있는 여주는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꼭 애어른 같단 말이다. 생긴 건 순하니 아이같이 생겨서.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주스를 빨대를 꽂고 쪽쪽 빨던 노아는 그 생각을 하며 혼자 어깨를 들썩였다.
"나랑 친구 할래?"
"...그래."
"좋아! 그 대신 이바다, 이노아랑 놀지 마. 수준 떨어져."
사이좋게 식당을 나오는데 그렇게 말한 주이가 여주의 팔짱을 끼곤 앞장서 걸었다. 황당한 표정의 노아는 바다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래도 수준 떨어지는 건 자신이 아닌 바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야, 반응 뭐냐? 죽을래?"
소리치며 세 명의 뒤를 쫓는 바다가 동료 선생님들과 복도를 거닐던 채하에게 걸렸다.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끌려갔다.
*
*
오랜만에 하는 한국 생활은 재미있었다. 같은 반인 바다와 노아도 투덜거리긴 해도 잘 챙겨줬고 반 아이들도 여주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옆에 딱 붙어 지내는 주이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나랑 노는 거 잊지 않았지?"
쉬는 시간에 찾아온 주이의 말에 여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붙어서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뒷자리에 앉은 바다가 등을 찌르며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 들었다.
"둘이 어디 가냐?"
"비밀."
"아, 김여주. 어디 가는데. 응?"
"나도 모르는데? 주이 따라가는 거야."
정말 모른다는 말에 바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상에 엎드렸다. 채하에게 들렸다가 뒤늦게 들어온 노아는 시무룩해 엎드려있는 바다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넌 왜 이러고 있냐."
"쟤들이 날 안 끼워줘."
"어휴, 애새끼도 아니고. 그냥 몰래 따라가."
"오오, 천잰데?"
"네가 병신인 거지."
뒤에서 저희들을 두고 계략을 꾸미는 줄 모르는 여주와 주이는 신이 나게 하교를 했다. 어디를 가는 건지 버스까지 올라탄 그녀들은 하루 온종일 붙어있으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도대체 나는 왜 끌고 온 건데?"
"'바다' 하면 ‘노아’ 아니냐. 당연히 따라와야지."
"가게 도와야지."
"네가 먼저 쟤들 따라가자며."
"야, 내가 언..!"
우연인지 슬쩍 뒤를 돌아보는 여주에 깜짝 놀란 바다가 노아의 입을 손바닥으로 세게 막아버렸다.
"퉤- 손 좀 닦아. 더럽게 짜네."
"어, 내려야 해!"
티격태격하느라 하마터면 못 내릴뻔한 노아와 바다였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참 어느샌가 이렇게까지 흐른 건지 동복을 입었던 게 언젠데 벌써 여름을 나고 다시 춘추복을 입고 나란히 걷는 아이들을 보자니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같이 지낸 지 벌써 6개월이나 됐네?"
"뭐래, 너랑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었거든?"
"김여주 말이야."
"아아, 그러게. 일본에서 왔다길래 신기했었는데."
익숙한 룸카페에 앉아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그녀들을 보며 이럴 거면 왜 몰래 둘이 따로 나온 건지 이해가 안될 지경이었다. 둘이서 에이드 한잔에 별 이야기도 없이 바로 옆 룸에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너희 농땡이 피우냐."
"에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룸 하나 잡고 둘이서 에이드 하나 시키고 진상피우면서 농땡이 피우는 거 아니야? 아니면 반항하는 건가?"
"아니요! 일합니다!"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에 앉았다. 서빙을 돌던 남자가 하품하는 바다에 쟁반을 넘기며 손짓했다.
"왜요?"
"주이랑 같이 온 애 누구야?"
"아, 학기 초에 전학 온 앤데. 특이점 없어서 말씀 안 드렸어요."
"희욱이 형님한테도?"
"뭐, 그렇죠."
바다한테 넘겼던 쟁반을 다시 빼앗았든 그는 탈의실 옆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7년 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희욱이 사무업무를 보는 듯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크도 안 하냐."
"주이 말이에요."
"주이? 주이가 가게 왔어?"
"네, 주이 지금 4번 룸에 있는데 처음 보는 애랑 왔는데,"
"바다랑 노아는."
"바다가 그러는데 학기 초 전입생이라는데 특이점 없어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말도 채 끝나기 전에 남자 손에 들린 쟁반을 빼앗아 나갔다. 홀로 나온 희욱이에 직원들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성진아, 조각 케이크 2개만 줘봐."
"주문 들어온 거 없는데요?
"알아, 주이가 처음 보는 애랑 같이 왔데. 가봐야지."
익숙한 일이 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성진이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조각 케이크를 그릇에 올려 건넸다. 그릇을 받아든 그는 곧장 주이가 있을 4번 룸으로 향했다. 똑똑, 소리에 주이가 고개를 들었다. 또 주문한 적도 없는 케이크를 든 희욱이 활짝 웃어 보였다.
"어, 아저씨 계셨네요?"
"응, 주이 왔다고 해서 보러왔지. 자, 이거 먹어."
"주문 안 한 건 주지 말라니까."
주이를 보러왔다던 그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여주를 빠르게 스캔했다. 이상하게 익숙한듯한 얼굴에 잠깐 표정을 굳힌 그는 꾸벅 인사하는 그녀에 애써 표정을 풀었다.
"안녕하세요."
"아, 주이 친구?"
"네! 이번에 바다랑 노아네 반으로 전학 왔어요. 일본에서 왔데요."
짧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에 희욱은 재미있게 놀다 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룸을 빠져나갔다. 주이에게 가기 전 홀에서 했던 말 때문에 모두가 궁금해 모여있었다.
"뭘 봐."
말도 해주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려는 희욱을 모두가 빤히 바라보자 삐딱하게 말을 내뱉는 그였다. 직원들 사이에는 거의 고문당하다시피 있는 노아와 바다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여주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괘씸죄랄까.
"뭐, 나빠 보이진 않더라."
"거봐요!"
"맞죠? 내 말이 맞다니까!"
한편, 주이는 희욱이 나가자마자 그릇을 여주 쪽으로 밀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여주는 케이크보단 방금 들렸다 나간 희욱이가 더 궁금한 모양이다.
"아, 아저씨? 잘생겼지? 저래 보여도 34살이다?"
"아? 아, 그래?"
"응, 우리 아부지랑 친한 동생이래. 이 룸카페 사장님이야!"
어딘가 애매한 표정의 여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