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주, 혹시 제가 말씀드린 건 확인되셨나요?"
"찾았다. 내가 주소 보낼 테니까 다녀와."
"감사, 합니다."
"별걸, 학교생활은 어때?"
"재미있습니다."
"친구는?"
"사귀었죠. 다들 잘해줍니다."
"피곤하겠네, 어서 자. 내일도 통화하자."
"네, 찬주."
통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테라스에 서 있었다. 호프집에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섞여 나오는 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도 한국에서 컸으면 교복이 아닌 저런 차림으로 놀았겠구나 싶었다. 곧 단조로운 알람 소리가 들리고 문자가 확인됐다. ‘서울특별시 염햇빛구 햇빛동 1151-21번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여주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온기 하나 없는 게 초가을인데도 겨울만큼이나 서늘했다. 어깨에 걸쳐진 가디건을 여몄다. 침대에 눕자 보이는 좁은 탁자 위의 액자를 덮었다. 찬주와 고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사진이었다. 결국 졸업은 못 했지만. 토요일인 오늘 잔뜩 인상을 쓴 여주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장에서 제일 무난한 옷을 골라 입곤 전신거울 앞에 섰다. 원래도 표정이 별로 없는데 오늘따라 더 굳어져 있다. 문자로 날아온 주소로 향했다. 7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날 그렇게 버리더니 최고 죽어버린 거냐. 주이도 이 세상에 없는데 누가 찾아와 정리하는 건지 깨끗했다. 멍하니 바라보자니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빠."
7년 동안 원망을 많이 했다. 열여섯, 중국 그 낯선 땅덩이로 보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낯선 땅의 언어를 혼자서 습득했다. 호의적이지 못한 오히려 적대감을 느끼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날 버렸으면 잘 살았어야지. 이렇게 죽어버릴 거면 주이는 나한테 맡기지. 왜 죄 없는 그 9살 난 어린 주이까지. 왜 그랬어, 안재훈. 진짜 너 왜 그랬어."
복도로 나가자 재훈이의 자리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멍청하게 웃는 모습에 예전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한국 넘어올 때는 당연히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얼굴 보면 속 시원히 7년간 속으로만 삭인 욕지거리를 뱉을 거라고 다짐 또 다짐을 했는데 이렇게 막상 영정사진 속 작은 네모 칸 안 함에 담긴 재훈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20살 생일 찬주가 선물이라며 한국 주민등록증을 김여주가 아닌 안주혜로 만들어준 가짜 주민등록증을 들고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다가갔다. 그리곤 유리문을 열어 그의 사진 밑에 가지런히 놓았다.
"용서가 안 되지만. 그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오빠."
*
*
"노아랑 바다는 조회 끝나고 나 따라와."
뒤를 돌자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녀석들이 보였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주이도 학교에 없어서 혼자, 밥 먹어야 해."
"주이도 학교에 없어? 너희도?"
"응, 오늘만 없는 거니까 너무 왕따같이 있진 말고."
"..잘 다녀와."
채하와 같이 교실을 나선 아이들은 곧장 교무실로 가서 조퇴증을 끊었다. 채하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차 키를 들었다.
"아, 채하선생도 일찍 가는 거죠?"
"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 탔다. 안전벨트까지 맨 걸 확인 후 출발시켰다. 매년 있는 일인데도 채하는 가슴이 갑갑했다. 목 언저리까지 채워진 단추를 풀며 룸미러를 보자 노아와 바다는 옷을 갈아입고 있다.
"주이는 괜찮으려나."
"괜찮을 리가 없잖아. 오늘 같은 날은 주이한테 붙어있어야 해. 아직도 주혜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새끼들이 들러붙으니까. 주혜도 죽은 지 벌써 4년 됐는데."
"그러고 보면 주이 진짜 불쌍하다. 오빠도 죽고 언니도 죽고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주혜 시체 찾지도 못한 게 제일 불쌍해.“
"그래도 아저씨, 아줌마가 친딸처럼 키워줬잖아요."
숙연해진 차는 익숙한 건물주차장에 세워졌다. 차에서 내리자 심각한 표정의 남자가 다가왔다. 저번 카페에서 주이가 가게에 왔음을 희욱이에게 알렸던 남자였다.
"어, 영한아. 무슨 일 있어?"
"그 주혜가 살아 있는 거 같다고,"
"뭐?"
방금 막 차에서 내린 바다와 노아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영한을 바라봤다. 채하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영한을 독촉했지만, 말없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네 명을 반겼다.
"김희욱,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안주혜 이름으로 된 주민등록증. 현우 녀석한테 시켜서 알아보니까 정식발급된 건 아니고 만들어진 거 같더라. 그리고 사진, 김여주야."
"야, 너 무슨."
"김여주가 안주혜야."
"주이는?"
"학교, 주혜 만나겠다고 학교로 갔어."
"아무도 안 따라갔어?"
"난 너희 만난 줄 알았지. 너희는 학교로 돌아가."
얼굴 한가득 인상을 찌푸린 채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가는 내내 궁금한 게 많았지만, 바다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채하도 사실은 주혜를 본적이 없다. 우리들 중 주혜를 본건 희욱이 뿐이었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아주 어렸을 때이니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몰랐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현우에게 뒷조사라도 시킬 걸 하고 후회도 됐다. 주혜는 과연 주이가 자신의 동생이란 걸 아는 걸까. 바다와 노아가 교실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엉엉 울며 여주에게 안겨있는 주이가 보였다. 모든 사실을 다 아는 거라고 하기에는 표정이 너무 없는 그녀였기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주야, 네가 내 언니야? 네가 안주혜야?"
직설적인 물음에 등을 토닥이던 여주의 손이 멈췄다. 당황한 듯 손을 올렸다 내리던 여주의 손이 끝끝내 떨어져 버렸다.
"네가 안주혜를 어떻게 알아?"
그래도 채하는 학교로 오는 내내 만나기만 하면 그만일 거란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딘가 절망적인 표정을 한 그녀가 주이를 한번 바라보곤 채하를 한 번 보고 이마를 짚었다.
"제가 전학 갈게요."
"뭐?"
"아까 오빠 27살에 죽었다고 했죠. 그럼 주이는 9살 때 헤어진 거 아니야. 너무 어렸을 때라 주이는 죽음에 가치가 없어서 살아있는 거예요. 나랑 붙어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난 오빠에 대해서 다 기억하잖아."
"나도 오라방에 대해서 다 기억해!“
간신히 멈춰진 눈물이 다시 흘렀다. 아직 아이는 아이였던 건지 어린아이처럼 우는 모습에 옛날 생각이나 입술을 물어뜯었다.
"입술 물지 말고."
"아, 선생님도 안주혜를 아는지는 몰랐네요."
"..너희들 오빠 친구였어."
"하, 오빠가 선생님이랑 친구였다니까 진짜 웃긴다. 그 꼴통 친구가 선생님이 됐네. 그리고 주이가 살아있는 줄은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레이권이, 죽었다고 했는데."
레이권이라는 이름에 동요하는 듯 채하의 손가락이 티가 나게 움찔거렸다. 당연한 게 중국에서 안주혜 19살에 레이권 그에게 죽임을 당한 걸로 소문이 났으니까 말이다.
"레이권도, 안주혜 죽던 날 같이 죽었는데 알고 있었나요?"
"레이권이 죽었어?"
"...네, 죽었죠."
"그래서 일본으로 넘어가서 산 거야?"
"뭐, 그런 게 되겠네요."
턱을 긁적이며 눈을 돌리자 눈치 보다시피 앉아있는 바다와 노아가 보였다. 꼭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바라본다. 아, 맞구나. 나 죽었었지.
"그래서, 지금 23살?"
"응, 23살인데?"
"와, 이 학교에서 진짜 친구를 만날 줄이야."
"응?"
"나랑 노아도 23살. 지금은 주이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거고."
"너네 도대체 주이의 어디까지 깊이 파고들고 있는 거냐. 안주이 너는 알았어?"
"ㅇ, 아니!?"
정말 몰랐는지 손사래까지 치는 그녀에 여주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채아와 바다, 노아를 훑었다. 상황설명을 하자면 아르벨, 그니까 희욱이의 조직에서 주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23살인 바다와 노아를 학교로 보내 같이 생활을 했다는 말이었다.
"23살이 중학교 다니는 게 말이되?"
"너도 다니잖아."
"아,"
"그래서 언니 나 두고 전학 갈 거야? 여기 노아랑 바다도 다 두고?"
"주이는 걱정하지 마. 아르벨이 있는 한 함부로 못 건드려."
"그럼 맡기고 전학,"
"언니, 나 버리지마."
"야, 넌 내가 언제 또 버렸다고. 내가 안주혜인 거 아르벨 말고 또 누가 알아요?"
"아직 아르벨 밖에 몰라."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