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냐."
"아니요."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은 여주의 발에 약을 바르다 묻자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녀였다. 안 아프긴, 상처투성이에 유리까지 박힌 발을 보니 어떻게 다시 집에까지 걸어온 건지도 신기할 따름이다.
"너는 애가 멍청한 거냐."
"내가 뭘요."
"주이 아니래, 타깃 너 맞다고."
"그걸 어떻게 믿는데요?"
"아까 너 차로 칠뻔한 거 사림파 새끼 맞아."
그건 예상 못한 건지 눈 밑을 가늘게 떨었다. 밴드까지 치덕치덕 붙인 영한이 채하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여주가 주이를 자꾸 만나면 사림파가 주이를 미끼로 위협할 수도 있고 표적이 여주에게서 주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맨발로 학교까지 뛰어갔는데 끝끝내 만나지 못했는지 시무룩한 여주였다.
"미안하다, 희욱 형님이 오더 내릴 때까지는 대기하고 너를 이렇게 막아두는 방법밖에 없다.“
그의 말을 잘 이해한 건지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주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쪼그리고 누웠다. 텔레비전을 돌리는 그녀에 저녁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향했다. 30분이나 흘렀을까 툭, 하는 묵직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잠이 든 건지 손에 있는 리모컨을 떨어트리곤 미동이 없는 여주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고른 숨을 내쉬는 여주였다. 서럽게 울어 많이 피곤했던 건지 잠에 깊게 들어 영한이 쉴 틈 없이 움직이는데도 잠에 취해있다. 다 끓인 김치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담요로 덮어줬다. 꽤 불편한 자세일 텐데도 미동 없이 잠이 든 그녀는 하늘이 까맣게 덮이고 나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건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 영한이 껐을 텔레비전이었다.
"깼냐."
"어, 통화했어요?"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희욱과 통화했음을 알렸다. 혹시 다른 소식이 있는지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밥 먹자."
"밥하셨어요?"
"너 잘 때, 김치찌개. 앉아."
친절히 의자까지 빼주는 그에 의아함을 느끼며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같은 적막 속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두어 젓가락 남았을 때였을까 깨작거리던 그가 젓가락을 놓곤 여주를 불렀다.
"왜요?"
"한국에 왜 왔다고 했지?"
"평범하고 싶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살고 싶어서."
"이제 어렵다는 거 잘 알지."
"...네, 근데."
"응, 말해."
"제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주이는 괜찮아요?"
"아니, 이미 늦었어. 그리고 이젠 아르벨에서 너 안 놓아줘."
묵묵히 그릇을 비운 여주는 잘 먹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식탁에 남은 영한은 깨작대던 밥을 버리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여주가 주혜인 걸 안 이상 희욱이는 여주를 절대 놔 줄 수 없었다. 4년간을 그녀가 죽은 거로 알던 희욱이와 채하 그들은 알게 모르게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재훈이 죽고 얼마 안 있어 조직은 흩어졌다. 재훈이를 잘 따르던 민우가 그의 죽음을 이유로 내부에서 자꾸만 분란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따라 보스에게 그간 불만을 품던 조직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보스였다. 흩어진 사이 희욱은 채하와 작은 조직을 세워 영한이의 쌍둥이 형 영훈이를 아르벨 식구 중 처음 만났다고 한다. 설거지까지 마친 영한이는 그녀가 들어간 방 문을 두드렸다. 별다른 소리가 없는걸 봐선 잠이 들었다고 판단한 그가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쭈그리고 앉은 여주가 보였다.
"뭐야, 안 자고 있었어?"
"괜히 왔나 봐요."
"뭐?"
"내가 괜히 한국에 와서 주이는 위험해지고 아르벨은 그런 주이 신경 쓰느라 바쁘잖아. 나만 한국에 오지 않았으면, 다 괜찮았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이야.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런거에요?"
"아, 그런 게 아니라.."
고개를 떨군 여주에게 다가가 어설프게나마 품에 안았다. 차라리 잠을 재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 억지로 눞히곤 토닥였다. 한참을 뒤척이던 여주는 잠에 오지 않는지 눈만 멀뚱히 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방 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갑자기 덩그러니 남겨진 여주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를 침대 밑으로 뺐고 그 순간 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머그잔을 든 영한이 나타났다. 따듯한 우유였다. 저 어렸을 때 형이 자주 해주던 방식이었다.
"이거 마시면 잠 잘 와. 마셔봐."
"거짓말."
"진짜야."
정말 거짓말처럼 따듯한 우유를 마신 여주는 영한이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
아침 일찍부터 잔뜩 뾰로통한 여주가 셀프팔짱을 끼곤 영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맡은 편에 자리한 영한이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로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잠깐 편의점도 못 가게 할 때는 언제고 아르벨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자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들을 만나야 하는지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되는 입장인 영한도 그랬다. 그렇게 나가고 싶다고 투덜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안 나가겠다며 버티는지 알 수 없는 그였다.
"왜 싫은데?"
"내가 왜 아르벨을 만나요?"
"앞으로 계속 볼 사이니까."
"누가 그런데요?"
"아, 너 낯가려서 그러냐?"
"낯을 가리긴 누가 가린다고,"
"됐으니까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한숨을 크게 내쉰 여주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나가기 싫은 기색인 여주를 이끌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가게로 들어서자 적지 않은 인원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바닥만을 바라보는 여주를 앞세워 영한이는 인사를 시켰다. 아르 벨 식구들이라고 했다. 무표정한 여주가 고개를 꾸벅이자 서글서글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하는 남자였다.
"잘 왔어, 나는 이성진이야."
"네,"
그냥 넘겨짚은 건데 정말 낯을 가리는 건지 여주는 자꾸만 영한이의 뒤로 숨었다. 억지로 끌어다 앉힌 영한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톡톡 건드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한참을 어색해하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고 소란스러운 두 녀석과 희욱이 룸으로 들어왔다.
"허, 안재훈이랑 진짜 닮았네."
그 언젠가 채하도 말했던 기억이 있다. 주혜와 주이 그리고 희욱의 오랜 친구 재훈과 아주 닮아있는 얼굴. 천천히 다가온 그는 여주의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내가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내가 널 데리러 가야 했는데."
저까지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에 고개를 돌려 피해버린 여주는 노아와 눈이 마주치고 곧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동안 어떻게 된 거야?"
"선생님께 말했듯이 19살까지 중국에서 지냈어요. 그리고 20살이 된 해에 일본으로 가서 학교도 다녀보려고 했는데."
"응."
"내 마음처럼 잘 안 돼서, 그리고 안재훈도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잘살아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왔어요. 레이권이 주이는 진작에 죽었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고 오빠 죽은 건,"
찌푸려지는 인상이 울음을 참으려는 인위적인 행동이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제 감정을 숨기려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한국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응, 힘들었겠네. 그래도 잘 버텨줬다. 이렇게 보게 돼서 너무 기뻐. 여주야."
"네."
"우리 집에 들어올래? 같이 지내자. 나는 이기적일지 몰라도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어. 그래서 마지막 남은 주이만이라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했는데 네가 살아있는걸 안 이상 그냥 둘 순 없어."
"잠잠해지면,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졸업할 거에요. 평범하게 살래요."
단호한 여주의 목소리에 7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재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비슷하게 자랐구나, 너와 여주는. 이 확고함이 얼마나 별 방법이 없는지 아는 희욱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당분간만이라도 영한과 꼭 붙어있으란 말을 남기곤 식사를 시켰다. 처음 보는 아르벨 식구들은 전에 중국에 있었을 때 지냈던 조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듯한 장난들이 그랬다. 보기 좋았고, 무엇보다 그들이 부러웠다.
*
*
아르벨 식구들을 만난 시간이 흘렀다. 평소같이 일찍 일어난 여주는 방에서 나왔다. 홀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쳐다보던 영한이 여주를 반겼다. 쪼르르 달려가 옆에 앉은 그녀는 그가 보던 화면을 바라봤다.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에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주는 언제부턴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영한을 마주했다.
"왜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대답."
"....네."
"주이가 지금 사림파랑 같이 있는 거로 확인됐어. 개인 활동은 절대 안 돼도 넌 지금부터 나랑 우리 집에 들어가 있을 거야. 나랑 꼭 붙어있어야 해. 알겠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 중국에서 지냈던 건지 여주에게 다가가 마지못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줬다. 한편, 집에서 희욱이의 오더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피가 마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작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얼굴도 모르는 조폭 새끼한테 잡혀갔다.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지만 설마 진짜 주이를 납치할 주는 몰랐다.
"이 미친 새끼 사진까지 보냈어."
다행히 아직 손을 대진 않았는지 손발이 묶인 채 앉아있는 주이는 무사해 보였다. 주이와 친구로 가깝게 지내던 바다와 노아는 화가 단단히 난 듯 희욱이에게 어서 지시를 내리라며 성화였다. 다른 조직과 다르게 영역싸움도 하지 않고 그 세계에서 획을 그었을 뿐 지금은 소규모만 남아 안정권을 찾으며 가족같이 지내는 그들에겐 오랜만이기도 했고 안정권으로 접어들고 들어온 바다와 노아는 이 상황이 처음이었다.
"기다려라."
"언제까지 기다려요!"
"소리 지르지 마, 희욱이 형님 저래 보여도 아르벨 보스야."
"어, 왔냐. 주혜, 아니 여주 안녕."
대충 고개를 꾸벅인 여주는 모두의 시선이 버거운지 자꾸만 영한의 뒤로 숨었다. 투덕거릴 땐 언제고 제법 가까워진 둘에 내심 흐뭇한 희욱이는 소파에 둘을 나란히 앉혔다. 둘이 앉자마자 다시 시작된 대화였다. 주이의 양아버지 말에 따르면 주이는 늦은 시간에 여주의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여주인척한 건 사림파 새끼였던 걸로 추정되고 주이는 현재 남경후와 같이 있으며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이 싸이코 새끼는 언제든 제 심기가 불편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거다.
"죄송해요, 주이도 내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니야, 내가 제일 오래 붙어있었는데."
"둘 다 시끄러워. 이번 일부터 처리하고 보자. 일단 남경후 심기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더군다나 그 새끼 지금 어디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됐는데 무슨 사단이라도 나면.."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됐다. 모두가 예상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 점점 굳어가는 표정에 채하는 여주를 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막은 건 희욱도 아닌 영한이었다.
"들어, 이건 너한테 일어난 일이야. 그리고 네가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생각해봐."
"..그래, 여주야. 생각해봐. 그리고 독단적인 행동 절대 하면 안 돼. 영한이 곁을 떨어지지 마."
설마 그렇다고 같은 방까지 쓸 주는 몰랐다. 계속 붙어있었으면서도 어쩐지 민망해진 여주는 그가 앉힌 침대에 앉아 발만 굴렀다.
"피곤하면 자."
"아까 자서 안 졸려요."
"커피 마실래?"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련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방안에 혼자남은 여주는 방안을 둘러봤다. 타고나게 살림을 잘하는 꾼인 건지 말끔하게 정리된 방과 한국에 찬주가 마련해준 내 집 말고 갈 수 있는 다른 집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뭘 그렇게 봐?"
"신기해서, 한국에 내 집 말고 다른 사람 집에 올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별것이 다 신기하네. 마셔."
건네준 커피를 받아들곤 방에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 밑으로는 정원이 보였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고개를 돌리자 영한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다.
"왜 강아지는 없어요?"
"어?"
"꽃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왜 강아지는 없어요?"
무슨 상관이냐며 푸스스,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영한이 여주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는 괜찮아진 건지 아까보다는 표정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고 여겼다.
"빨리 자."
"왜? 나 왜 자꾸 재워요?"
"내가 뭘, 앞으론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을 테니까."
싸움이 길어질 거야. 침대에 눕힌 그가 손수 이불을 목까지 덮어줬다. 다정한 손길에 군소리 없이 얌전히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낮잠을 잤음에도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 집에서 제일 먼저 잠이 든 여주는 제일 일찍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불빛을 내는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낯선 번호로 주소만 덜렁 찍혀있었지만, 직감적으로 주이가 있을 장소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인 활동은 일제히 금한다는 사람들의 말에도 여주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죄송해요, 다음에 우리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거실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여주가 주택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타고 낯선 장소로 향했다. 솔직히 7년 동안 한 거라곤 이런 싸움과 죽음의 반복이었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도 불안한지 자신의 선택을 의심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택시에서 내린 여주는 가장 오래 저장되어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찬주."
"응,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뜬금없구나."
"꼭 다시 보고 싶네요."
"무슨 일,"
찬주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소리에 전화를 끊었다. 뒤를 돌자 남자 너덧 명이 여주 앞에 서 있었다. 품에 있는 칼을 한번 만지곤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김여주, 맞지?"
"안주이 내놔."
"맞네. 따라와."
그들을 따라가자 손목이 밧줄에 묶인 채 앉아있는 주이가 보였다. 큰일이라면 이게 큰일이겠지만 구타한 흔적은 없이 말끔해 보여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언니."
"주이 이제 돌려보내."
"왜? 어차피 안주이나 너나 죽어. 오늘 이 자리에서."
"주이는 잘못 없잖아!"
"너는 잘못이 있나 보지? 너희 둘 다 잘못은 없어. 안재훈 동생이어서 죽는 거야."
뭐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실실 웃으며 말하는데 화가 나서 손이 떨려왔다. 태연스럽게 누구 먼저 죽이면 되냐 묻는 남자에 한 걸음을 떼자 소름이 끼치게 웃으며 열었다.
"왜, 품속에 있는 그 칼로 나 찌르게? 안주이 손목에 있는 밧줄이 어디에 연결되어있는지 못 봤지?"
시선을 재빠르게 돌리자 바이크에 연결되어있는 밧줄이 눈에 보였다. 미쳤냐고 소리쳤고 다가가려 할 때는 이미 바닥에 앉아있던 주이가 망할 바이크에 묶여 끌려가고 나서였다.
"이렇게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죽어, 안주이는."
잔인하게도 그 모든 장면을 보여주려는 건지 멀리 가지도 않고 여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바이크로 뛰어 들려는 여주를 다른 남자들이 붙잡았고 고통에 소리치는 주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주는 그저 그만하라며 소리칠 뿐이었다. 여주는 중국에 있을 때처럼 강할 수 없었다. 그때는 자신의 목숨조차도 소중하지 않았고 그러니 누구의 목숨도 중요하고 지킬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소중한 주이의 죽음이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은 여주에게는 크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겁하게 아르벨 식구를 데려왔다면 주이나 너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비겁하게, 그 말에 더욱 분노했고 자신의 안이함에 화가 났다. 남자들을 순식간에 뿌리친 여주는 품속에 있는 칼을 꺼내 달려드는 그들을 찌르고 바이크로 달렸다. 어차피 주이가 이렇게 죽어버릴 거라면 자신도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누군가의 손길 때문이었다. 놓으라며 칼을 휘둘렀다. 누구든 죽일 생각이었다. 얼굴에 칼날이 스친 영한이 피를 흘리며 여주의 손에 있는 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주이, 우리 주이 좀 살려주세요."
"..늦었어, 너라도 살아야 해."
"살려주세요."
바짓가랑이를 붙든 여주를 함께 온 강하에게 넘긴 영한이 총을 꺼내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바이크가 넘어지며 떨어진 남자를 칼로 찔렀고 노아와 바다가 주이를 수습했다. 숨이 간신히 붙어 헐떡거리는 게 그렇게 잔인하기만 했다. 바다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주이를 안아 들었다.
"바다,..야.."
"조용히 해."
"언,..니한테.."
"입 다물라고!"
소리를 빽 지른 바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강하에게 붙들린 여주에게 다가갔다. 진작 울고 있던 그녀는 주이의 모습에 더욱 목놓아 울었다. 노아는 이미 고개를 돌려버렸다. 죽어가는 주이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주가 안타까웠다.
"7년 만에,..언니봐서 너무..좋았어."
죽지 말라며 애원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는 주이가 힘겹게 몸을 이끌고 안겼다. 비릿한 피비린내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여주는 주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한국 오지 말걸 그랬나 봐. 주이야."
지금은 저 멀리 흔적도 없이 달아 난 남자가 그랬다. 그녀가 한국에 오고 나서야 왜 여주와 주이가 죽어야만 하는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내 욕심에 내가 한국으로 오지만 않았다면 주이는 죽지 않았어도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싫었다. 툭, 떨어지는 주이의 손에 여주도 그만 정신을 잃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아득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