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여주가 제일 먼저 본건 잠든 영한이었다. 고른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는 보기 싫게 피딱지가 앉았다. 손을 뻗어 만지려는데 벌컥 열리는 문에 눈을 뜬 그와 보기 좋게 눈이 마주친 그녀였다.
"일어났네."
눈을 마주한 그의 등 뒤로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눈을 끔뻑이며 상황 파악을 하려는데 순식간에 다가온 희욱이 여주를 껴안았다.
"너도 죽는 줄 알았잖아, 개인 활동하지 말랬지."
"..죄송해요."
"너 이틀 동안 잠만 잔 거 아냐?"
"아,"
"어휴, 여주야. 이제 우리 집에 가서 살자. 가족이 되는 거야, 우리."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따듯함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여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희욱이 말했다. 환하게 웃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내가 앞으로 여주 아빠 할게. 여주야, 예쁘게 자라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떨어지지 말고 계속 함께하자."
*
*
잠에서 깬 여주가 1층으로 내려가자 말끔하게 외출복을 입은 바다가 심기가 불편한 듯 소파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입을 댓 발 내놓고 있었다. 뭐, 이유야 분명 자신이 늦은 것 때문이겠거니 예상한 여주는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떼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바닥만 보고 있던 바다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퉁명스레 묻는다.
"뭐야, 너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미안해, 늦잠을 자서."
툴툴거리는 바다의 목소리에 여주가 대답했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던 영한은 그런 여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힐끔 바라보곤 바다에게 핀잔을 준다.
"얼른 씻고 나와, 안 그래도 늦었는데 왜 애를 붙잡고 난리야."
"아, 진짜 죄송해요."
"됐어, 딸. 얼른 준비해."
희욱이의 목소리에 허겁지겁 욕실로 향해 씻고 미리 싸놓은 짐을 챙겨 내려왔다. 운전은 영한이 하는지 운전석에 앉았고 살짝 망설이던 그녀는 냉큼 조수석에 올랐다. 여주까지 탑승 완료하자 망설임 없이 동네를 벗어나는 우리의 차, 곧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풍경으로 바뀐다.
"우리 고속도로 너무 자주 타는 거 아니야?"
"주이랑 오빠 보러 형님 차 타고 많이 나왔었으니까요."
"잠은 잘 잤고?"
"너무 자서 문제죠."
헤실헤실- 웃으며 잘도 이야기하는 그 둘의 사이가 못내 못마땅한 건지 뒷좌석에 앉아 뾰로통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희욱이 소리쳤다.
"야, 죽을래? 너 왜 내 딸한테 작업 거냐? 잘 잤는지가 왜 궁금해?"
"시비를 걸 거면 잠이나 자시죠?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이 자식이,"
"에이, 아빠 왜 그러세요."
영한을 감싸는 투의 말투에 질투를 느끼는 건지 희욱은 입을 삐죽이다 눈을 감아버린다. 살짝 신경적인 그의 행동에 여주는 눈치가 보이는지 눈을 끔뻑이며 룸미러를 통해 희욱을 살폈고 그런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엔 아예 몸까지 돌려 누워버린다.
"형님, 화나셨나 봐요."
"아냐, 저래놓곤 금방 잠이나 자겠지."
걱정하는 여주에게 대충 말하고 후론 둘 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을 달리다가 영한은 옆에 앉아 자지도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쳐 보이는 여주를 신경 쓰며 휴게소에 정차한다. 정차하는 느낌에 졸던 여주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세웠고 곧 뒤돌며 소리치는 영한 덕에 잠이 다 달아난 건지 안전벨트를 푸르곤 먼저 문을 열고 나선다. 화장실로 향하던 여주는 어느새 발길을 햄버거 가게 쪽으로 돌렸고 곧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서서 고민 아닌 고민을 하던 여주는 곧 손가락을 폈고 중얼중얼하며 손가락을 접었다.
"11명,"
"어, 형님."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지갑을 꺼내 들며 주문을 마쳐버리는 영한이다. 옆에 멍청하게 서 있는 여주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던 영한은 괜스레 민망한지 콧잔등을 문지르며 두리번거린다.
"무식하게 혼자 들려고 했냐?"
"아,"
"멍청하긴."
바보 같을 정도로 멍하니 서 있는 여주와 영한의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곧 코가 빨개진 여주는 곧 콧물이 나오는지 코를 훌쩍였고 영한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어둔 장갑을 꺼내 끼워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여주는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영한을 바라봤고 그는 무슨 생각인지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큰 손을 올려놨다. 그 큰손에 그녀는 놀란 건지 살짝 움찔해버리고 말았다. 놀라는 여주에 영한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뒀다.
"내가 무섭냐?"
"...글쌔요."
"야, 나 별로 안 무서운데."
영한의 말에 진지하게 생각하던 여주는 곧 이쁘게 웃어 보였다. 이쁘게 웃는 그녀에 살짝 멍하게 서 있던 영한은 곧 포장이 된 햄버거를 들고는 도망치듯 뒤돌아 가버리다. 그 뒤로는 차가 출발했고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조는 게 아니라 아예 잠이 들어버린 여주를 영한은 계속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다. 아마, 이 모습을 희욱이 봤다면 개수작 부린다고 이미 머리통을 부여잡고 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한은 잠이든 희욱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랫동안 달리던 차는 곧 정차했고 이번에는 아까완 다르게 깊이 잠에 빠진 건지 뒤척임도 없는 여주였다.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강하를 툭툭-, 치자 발갛게 충혈된 눈을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일어나, 애들 깨우고 숙소 들어가서 자던가."
무신경이 내뱉어진 영한의 말에 강하는 옆자리에서 잠이든 이월이를 깨웠고 이월이도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눈을 뜨기 시작하자 차 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조수석에 앉아 잠에 깊이든 여주도 일어났다. 각자의 짐을 들고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유빈이는 냉큼 소파에 몸을 누이고 현우 역시도 좀비처럼 침대로 기어들어가버렸다. 휴가 내기 전에 일을 끝마치느라 집에까지 끌고 들어와 일했던 게 화근인 거 같다.
"야, 일어나봐. 야!! 야!!"
일어나보라며 소리치는 희욱의 목소리에 유빈이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고 감은 눈을 억지로 뜨며 앞에 앉아 있던 강하의 어깨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유빈이의 피곤한 모습에 희욱은 잠시 미안한 건지 망설이다 곧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 숙소 앞에 오션월드 있는 거 알지?"
"형님, 설마 거기 가시려고요?"
"수영복 안 챙겼는데요?"
불만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에 희욱은 인상을 쓰며 한마디 뱉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다. 그런 희욱은 보이지 않는 건지 자기들끼리 구시렁대며 추운데 꼭 가야 하냐며 입을 놀리는 아이들이다. 쾅-, 하는 굉음이 들렸고 그 소리의 근원 희욱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자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다. 모두가 얼음이 된 체로 앉아있을 때 희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이 웃으며 말을 꺼낸다.
"어서 가자, 다녀와서 고기도 굽고!"
이미 가기로 확정을 지은 희욱의 목소리에 영한의 옆에 앉아있던 여주가 재빠르게 일어나 가방을 뒤지며 입을 옷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는 여주의 모습에 유빈이도 그만 일어나 현우가 누워있을 방으로 향한다. 아마 그를 깨운 뒤 같이 짐을 챙겨 나올 모양이다. 이제야 하나둘 움직이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희욱은 채하와 같이 현관을 나선다.
"넌 왜 이렇게 애들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 놀러 온 거잖아. 근데 현우랑 유빈이 저렇게 피곤에 절어 있는 것도 좀 보기 싫고 온 김에 좀 놀다 가자고 그러는 거지. 내가 뭐, 싫었으면 쟤들 데리고 여기 왔겠어? 일이나 시키지. 안 그래?"
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에 자신의 발자국을 세기며 말을 했고 채하는 그런 희욱을 못 말린다는 듯 한번 바라보곤 나란히 걷는다. 금세 준비해서 나온 아이들도 오랜만에 일을 안 하고 노는 게 설레는지 들떠 보였다. 가는 길목에 쌓인 눈을 서로에게 뿌리고 나무를 괜히 걷어차 지나가던 죄 없는 여주가 맞고 그 장면을 목격한 바다와 노아는 웃고 여주는 화를 내며 장난을 쳤다.
"안 춥냐?"
"아, 괜찮아요."
"괜찮기는. 이노아, 이바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영한의 물음에는 곧 죽어도 괜찮다고만 대답하는 여주는 실내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연신 손을 호호-, 부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 신경이 쓰임에 영한은 희욱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후드집업을 벗어 여주에게 덮어줬다. 갑작스러운 촉감에 살짝 놀란 여주는 결국 배시시-, 웃으며 영한이 걸쳐준 후드집업을 여민다.
"감사합니다,"
"옷, 무거워서 주는 거야. 너 추울까 봐 주는 거 아니야."
물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있고 영한이 걸쳐준 옷 때문이고 해서 선뜻 물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풀장 안에서 놀던 바다가 갑자기 다가와 여주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수영장에 온 기분이라도 내려고 다리까지는 물속에 넣어뒀는데 그걸 본 바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실내수영장이라 그런지 여주의 민망스러운 비명이 울렸고 물에 안 들어가고 희욱과 이야기 중인 강하가 놀라 뛰어왔다. 곧 물에서 허우적대는 여주를 건져 올리고 미안한 표정을 하는 바다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빡-,하는 시원한 소리에 희욱도 바다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아, 아파!!"
"아프냐, 새꺄? 물에 못 들어가고 있는 여주는 왜 끌어당겨, 당기기는!!"
"아, 재미없게 놀길래 놀아주려고 그런 거지!!"
억울한 듯 소리치는 바다에 괘씸한지 한 대 더 내려치려던 노아의 팔을 연신 켁켁-, 되던 여주가 잡았다.
"나 이제 괜찮은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괜찮다고 말하자 영한은 앉아있는 여주를 일으키며 그렇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를 희욱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히고 담요를 둘러줬다. 그래도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곧 벌떡 일어나 여주를 탈의실로 밀어버린다.
"왜요?"
"감기 걸려,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머리 다 말리고 나와라."
탈의실로 들어가 차갑고 물먹어 무거운 옷을 하나둘 벗고 있는데 담요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벗어 선반 위에 아무렇게 올려져 물이 뚝뚝-, 흐르는 영한의 후드집업이 눈에 보였다. 아주 많은 양의 물을 먹었던 여주는 코가 찡함이 느껴지자 옷을 마저 갈아입고 선반에 나열된 드라이기로 영한의 말대로 머리를 꼼꼼히 말렸고 곧 영한의 후드집업도 드라이기로 말리기 시작했다. 꽤 오래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다 마르지 않고 아직 축축한 감촉에 살짝 인상을 쓰다 휴대폰을 보곤 놀라 뛰어나갔다. 기다리다 지쳐 화를 낼 것만 같았던 영한은 다마른 여주의 머리를 살짝 만져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먼저 걸어갔고 그 뒤를 여주가 따랐다.
"형님, 이 옷. 최대한 말렸는데 잘 안 마르네요."
"이거 말리다가 늦게 나온 거냐?"
"아, 너무 늦게 나왔죠. 죄송,"
사과하는 여주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영한은 그저 말없이 젖은 자신의 후드집업을 들었고 같이 들려있던 담요를 어깨에 둘러줬다. 또다시 시작된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는 숨조차도 쉬지 않고 긴장한 체로 굳었다.
"숨은 쉬지?"
딱 봐도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이는지 굳어있는 여주의 머리를 살짝 밀자 그제야 숨을 쉬는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여주의 얼굴에 혹시 열이라도 오른 건지 싶어 이마에 손을 올리지만, 곧 자신의 차가운 손에 놀라는 여주 덕에 급히 땐다.
"아, 미안. 원래는 손이 뜨거운 편인데 아까 나와서 너 좀 기다리느라."
"원래 뜨거운 편이었다면 더 죄송하죠."
숙소로 걸어가는 내내 여주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저 이야기만 반복했고 쓸데없는 말을 내뱉은 자신을 자책하는 영한이다.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여주를 따듯한 바닥에 앉힌 뒤 손에는 리모컨을 쥐여줬다. 그러자 TV를 켜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던 여주는 곧 하품하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고 그대로 잠이든 듯 아무 미동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잠든걸 확인한 후 방에서 이불을 꺼내 둘러줬다. 눕힐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나 잠에서 깨어난다면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색한 적막감이 맴돌 거라고 예상한 영한은 이불을 둘러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여주가 잠이 든 모습을 식탁 앞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던 영한은 곧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만지는 척 급히 시선을 돌렸다.
"뭐야, 여주 잠든 거야?"
"어? 네. 그런가 봐요."
"이불은 네가 덮어줬어?"
뭘 하지도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휴대폰을 붙들고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자 채하는 곧 입을 삐죽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채하가 들어가자 하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여전히 소파에 기댄 체 잠이든 여주를 바라보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성진의 발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에요, 왜? 나 도와주게?"
"어? 응. 그래,"
성진을 따라 밥상을 옮기고 그 위에 버너와 프라이팬을 올리고 은박지를 씌우고 쌈장과 기름장, 김치 등등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유빈과 현우가 씻은 고추와 상추, 또 이월과 강하가 깐마늘을 올려놓는다. 이미 자리에 앉은 희욱은 바다를 툭툭-, 치며 채하를 데리고 오고 간 김에 냉동실에 있을 삼겹살도 가져오라는 말에 잡힌 꼬리가 있어 말없이 행동한다. 노아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곤히 잠이든 여주를 깨울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 안아 들어 소파에 눕혔다.
"아까 차에서도 잤는데 피곤한가?"
"그럴 수도, 방학 첫날인데 쉬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부터 나왔잖아."
한번을 뒤척이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잘만 자는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던 채하의 손길을 고기를 가지고 나온 바다의 손길로 인해 거둬졌다.
"자게 둬요."
"밥은 먹여야 될 거 아니냐."
"둬요, 내가 조금 있다가 먹으면 되니까."
여주가 틀어놓고 잠이든 프로그램을 보며 영한이 말하자 아이들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그런 눈빛이 부담인지 배가 안 고파 그런다며 아까 채하가 나왔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