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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표범소녀
작가 : 지아몬
작품등록일 : 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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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1
작성일 : 19-11-02     조회 : 265     추천 : 0     분량 : 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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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살기위해 뛰었다. 긴박했고 절박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달빛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나무 뒤에 숨어 험악한 눈초리로 주변을 관찰하더니 바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 비춰진 그의 헝클어진 실버블론드 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옷차림에는 인간의 붉은 피가 아닌 오크들의 초록 피가 덕지덕지 붙어 흉측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을 쫓고 있는 녀석들은 족히 약 열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뭘 주워 먹고 왔는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살기를 가졌으며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치밀하고 영악한 지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혼자였고 이미 저들의 동족들과 수도 없이 싸운 후라 체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다. 믿기지 않지만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해야했다. 그나마 뭉쳐있던 3개의 왕국들 중 자신이 속해있던 루밷왕국은 방금 전 멸망 당했다. 저들의 치밀한 계략에 루밷왕국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고 형제들이 죽었으며 가신들과 귀족들, 수 많은 백성들은 말 할 것 도 없다. 자신처럼 미친 듯이 살기위해 도망쳤거나 잡혀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후...”

 썩은 통나무 밑으로 들어가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었다.

 “저 쪽이다! 포위를 좁혀라! 크륵!”

 “루밷왕국의 마지막 후손이다! 크르르륵. 반드시 죽여야 한다! 크르륵.”

 “젠장.”

 그는 짧게 욕을 뱉고는 다시 뛰었다. 저들은 이 종족이라서 그런지 산속의 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밤눈도 밝았다. 더 이상 뛰어봤자 체력만 낭비할 뿐이었다. 이제 곧 정상의 끝에 있는 절벽을 알리는 꽃밭이 나온다. 자신의 생명 줄은 아마 그곳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저들의 포위를 피해 정신없이 뛰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허벅지까지 오는 푸른 꽃밭을 질근질근 짓밟으며 뛰고 있었다. 이 꽃밭을 넘어가면 절벽이었다. 이제 자신의 생명은 끝이라는 신호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뛰고 있던 다리는 끝이라는 신호와 함께 그대로 멈춰 섰다. 이 이상 뛰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금방 돌아왔고 차분해졌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쫓아 온 오크들이 둥글게 자신을 포위하고는 흉측한 눈동자로 기세 좋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각 손에는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흉물스러운 검은색 도끼와 검이 들려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려있던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작전은 변경되었다.

 “네 놈들 손에 고이 죽느니... 네 놈들을 다 죽이고 내손으로 내 목을 따는게 백성들을 볼 면목이 서겠지?”

 “루밷왕국의 마지막 후손이다. 죽여라. 크륵!”

 오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고요히 외치는 순간 그것이 신호였다는 듯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이 살기를 에워싸고 달려들었고 마지막 발악으로 그들의 흉측한 도끼와 검 날을 맞받아치려는 찰나. 자신의 바로 옆 꽃 밭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마음에 뒤로 물러나 살짝 옆 눈 길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온전히 정면을 향했을때 내목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다가 멈춰버린 오크들의 당황한 눈빛이 보였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날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건 뭐야? 도끼?”

 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 들려선 안 될 목소리였다. ‘지금 이 상황에 어린애까지?’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정말 어린 소녀의 뒷모습이다. 한걸음만 뒷걸음질 치면 소녀의 등과 맞닿을 정도로 자신과 붙어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소녀의 키는 자신의 가슴쯤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아보였고 뒷모습만 봤을때는 무척 가녀린 체구였다. 그런데 그런 소녀가 내 바로 뒤에서 공격해오는 오크의 도끼를 맨손으로 잡아챈 후 놓아주고 있지 않았다. 도끼의 날을 맨손으로 잡혀버린 오크는 무척 당황해했고 재빨리 다시 공격하기 위해 살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했으나 무슨 일인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넌 인간이야?”

 나에게 묻는듯 했다.

 “그, 그래.”

 “얘는 인간이 아니고?”

 “오크라는 종족이다.”

 “오크?”

 소녀는 그때서야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한 갈래로 높게 묶여진 검은 머리가 찰랑거렸고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그윽하면서도 고양이 눈처럼 매서워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오크라는 종족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오크의 도끼는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일단 길게 설명할 시간 없는 것 같은데? 딱 봐도 흉측하게 생긴 것이... 나쁜 녀석들 같잖아? 도와줄까?”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당연하게 물어오는 소녀를 향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믿고 내 목숨 줄을 소녀에게 넘겨주었는지 정확히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그냥 믿고 싶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심정으로.

 소녀는 나의 대답에 장난기어린 미소를 픽 지으며 주변에 있는 오크들을 한 마리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넌 인간이 아니다! 크르륵. 비켜라. 그 인간은 우리의 것이다. 크륵!”

 내 앞에 있던 수장급 오크가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는 오크의 도끼날을 놓아주지 않은 채 뒤를 돌아 자신에게 말을 건 오크를 쳐다보며 정색했다.

 “내가 인간을 돕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소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지와 엄지로만 잡고 있던 오크의 도끼를 다른 한손으로 아주 쉽게 기둥을 잡아 뺏어 들었다. 도끼의 주인이었던 오크는 당황할 새 없이 멍하니 목을 내어주어야만 했고 소녀는 살기도 없이 그냥 베어버렸다. 도끼날에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오크의 초록색 피와 이전에 죽였던 인간들의 검붉은 피가 섞여져 검은색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에게 튄 피는 전혀 없어보였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크의 목은 뭉툭하게 꽃밭 안으로 숨어 들어갔고 소녀는 그 목을 금방 찾아내어 아주 가볍게 발로 툭 걷어차더니 보란 듯이 수장오크 앞에 갖다 주었다.

 “첫 번째는 여기 있는 이 인간은 내가 아는 녀석이랑 아주 비슷하게 생겼어. 그래서 돕고 싶어. 그리고 두 번째는 너희가 무척 못생겼는데 썩은냄새도 난다는 거야.”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온 몸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풍겨져 나올 수 없는 살얼음같이 차가운 살기였다.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도끼를 가볍게 들어 어깨춤에 얹은 그녀의 눈빛은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처럼 번뜩였다.

 "너희들이 안 오면 내가 먼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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