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캐런의 인생 분실

　밤 11 시 40분, 연갈색의 숱이 많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의 캐런 애나 애벗은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장밋빛 볼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일이야, 드디어…….’

　내일 사랑하는 남자의 신부가 된다. 그 때 느릿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캐런, 나예요. 자나요?”

　“들어와요, 어서.”

　올케 수잔나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캐런은 소리 높여 대답하며 가스등 나사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불씨를 키웠다.

　새하얀 잠옷 차림, 가느다란 금발의 수잔나는 마르고 연약한 여자 특유의 몸가짐으로 문턱을 넘었다. 수잔나의 배가 둥글게 부른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임신 중이다. 캐런은 잽싸게 수잔나를 부축했다.

　“왜 자지 않고요. 홑몸도 아닌 사람이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몸에 좋지 않아요. 윌리엄 오빠는 몸도 무거운 올케를 재우지 않고 뭐 하나요?”

　수잔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매우 작고, 얇은 입술도 혈색이 없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서요. 오빠 탓하지 마세요, 내가 캐런이 보고 싶어서 2층에 올라온 거니까요.

　캐런이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라요. 하지만 내일부터 캐런이 이 피핑턴 하우스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쓸쓸해서요. 내일이 되기 전에 둘이서만 작별 인사하고 싶었어요.”

　캐런은 마음이 찡해서 수잔나를 부축해 침대에 앉힌 뒤 포옹했다. 둥글게 부른 배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격렬하게.

　“그래도 밤에 이렇게 다니면 위험하잖아요. 혹시 계단에서 발이라도 잘못 딛으면 어떡해요. 데이지를 데리고 다녀야죠.”

　“그 애도 밤에는 자야죠, 매일 제 시중을 드느라 애쓰는걸요.”

　“참, 수잔나는 왜 이렇게 착하기만 해요. 그러니까 윌리엄 오빠 같은 냉혈한한테 시집왔죠.”

　“윌은 냉혈한 아니에요.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표현이 조금 서투를 뿐인걸요. 캐런 생각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수잔나의 볼에 희미한 연지 빛이 돌았다. 캐런은 수잔나가 오빠 윌리엄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윌리엄이 수잔나를 매우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건 사실이었다. 수잔나가 속삭였다.

　“캐런, 내 귀여운 아가씨, 내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로 행복해질 거죠? 콜드웰 씨가 우리 아기의 대부가 되어 주고, 캐런이 대모가 되어 줄 거죠?”

　수잔나의 연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히 고였다. 캐런은 수잔나의 손을 꼭 잡았다. 캐런의 오른손 중지에서 금빛 별가루가 총총 박힌 새파란 청금석 타원형 반지가 빛났다.

　“물론이에요, 수잔나가 싫다고 해도 나는 아기의 대모가 돼서 평생 아기를 보호해 줄 거예요. 그 애가 마력자건 비마력자건, 내 온 힘을 다해서 말이에요.”

　수잔나는 놀란 듯 눈을 빛내더니 캐런의 반지 낀 손을 다감히 어루만졌다.

　“역시 돌아가신 어머님과 캐런을 닮으면 마력자일지도 몰라요. 윌은 비마력자지만요.”

　“수잔나는 어느 쪽이면 좋겠어요?”

　아기가 마력자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마법사로 살며 평생 국가의 관리를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갖고 출세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력자들은 일반 고등학교에 준하는 마법 학교에 진학한 뒤, 졸업과 동시에 마법부에 임용되어 국가에 봉사한다. 즉 모든 정당한 마법사는 공무원이다.

　마력자들이 오른손 중지에 반드시 끼는 ‘위치 추적 및 마력 제어 및 신분 표시’ 의 타원형 반지가 지금 캐런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다. 윌리엄은 행정부의 관료이고, 캐런은 마법부의 1등급 마법사로서 빠른 출세가도를 달렸다. 성향이 다른 남매는 어려서 자주 싸웠고, 지금도 미묘하게 껄끄러웠다.

　“난…… 그저 아기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캐런이 만일 내가 출산 중에 죽어도 아기를 지켜 주면 좋겠…….”

　“쉿!”

　캐런은 오른손 검지를 세워 수잔나의 입술을 막고, 왼손으로는 부정한 언령을 흩는 빛의 마법을 능숙하게 흩뿌렸다. 수잔나는 황홀하게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캐런은 자세를 반듯이 하고 단언했다.

　“그런 말은 두 번 다시는 입에 담아서는 안 돼요. 수잔나는 반드시 건강한 아기를 낳습니다. 윌리엄 오빠와 행복하게 살면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매일같이 웃고,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집니다.”

　수잔나는 수줍게 웃었다.

　“캐런 아가씨는 언제나 정말 위엄 있고 멋져요, 약하기만 한 나랑은 다르죠. 무심결에 나쁜 말을 해서 미안해요.

　나, 건강해져서 캐런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도 오래도록 보고 싶어요. 캐런의 아기도 보고 싶고, 나도 그 아기의 대모가 되어 주고 싶어요, 만일 캐런이 싫지 않다면요.”

　캐런은 자신과 약혼자 로렌스 콜드웰의 아기를 생각해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벽에는 캐런의 웨딩드레스가 마법사 정복 위에 걸려 있었다. 캐런은 수잔나의 창백한 볼에 키스했다.

　“그래요, 우리 서로의 아기의 대모를 예약했으니, 둘 다 반드시 건강해야 해요.”

　“캐런이 내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이기를!”

　수잔나는 캐런의 장밋빛 뺨에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아무리 힘을 내도 분명 수잔나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거예요.”

　수잔나는 수줍게 웃더니 일어났다. 캐런은 수잔나를 부추개 데려다 주고,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더 이상의 상념은 불필요했다.

　캐런은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캐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피핑턴 하우스의 다소 그을음이 오른 칙칙한 잿빛 꽃무늬가 아니라, 분홍색에 금색의 꽃무늬 벽지였다. 햇살이 창으로 비껴 들어오고 있었다. 캐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졌다.

　반지가 없었다.

　다섯 살 때부터 언제나 끼었던 반지가 없다. 크기도 변하고, 보석도 자수정, 터키석, 블루 토파즈, 청금석으로 변했지만, 변함없이 반지가 있었다. 반지는 마법사로서 캐런의 정체성이었으며 심장이었다. 폭주를 막는 제어력이 걸려 있고, 국가에 순종함을 표현하고, 또한 마력자임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

　그 반지가 없다.

　캐런은 몸을 일으켜 놓인 슬리퍼를 신고 비틀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발걸음이 자유롭지 못했다.

　‘나, 납치당한 건가……?’

　마법사의 납치 사건은 종종 발생했다. 마법사의 힘을 사익이나 범죄에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그럼 반지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반지가 없으면 자신이 폭주해서 납치범들을 응징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 텐데…….

　방은 호화로웠지만 삭막했다. 최고급 마호가니 가구에서도 무정함만 느껴졌다. 화장대의 거울도 죽은 생선처럼 나쁜 기운을 뿜고 있었다. 1등급 마법사로서 캐런은 온갖 기운을 감지하는 전문가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난 오늘 결혼할 거였는데…….’

　수잔나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자신의 마력이라면 곧 탈출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여린 수잔나가 충격 받을 것이 걱정되었다. 오빠 윌리엄이야 “캐런 너는 정말 변치 않고 말썽을 몰고 다니는구나.” 라고 무표정으로 자신을 혼내겠지만.

　그 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낯모르는 시녀 차림의 여자, 그리고 뒤이어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약혼자 로렌스 콜드웰이었다. 캐런은 깜짝 놀랐다.

　‘뭐지? 납치가 아니었어? 그럼 여기는 로렌스의 집이야? 왜 정당한 결혼식을 하지 않고 밤중에 날 여기에 옮긴 거지?’

　더티 블론드에 짙은 갈색 눈동자의 미남인 로렌스는 평소처럼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조금 나이 들어 보였다. 입가나 턱 같은 곳이. 캐런이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몰라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차갑게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허튼 수작인가?”

　“……대체 무슨 말이죠? 여긴 당신 집이에요? 왜 밤새 날 여기 데려다놓은 거죠? 내 반지는 당신이 가져갔나요? 빨리 돌려줘요, 그게 없으면 안 돼요!”

　캐런은 화가 나서 거세게 반문했다. 로렌스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찼다.

　“당신은 지금 그 따위 반지가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오늘 예정되었던 우리 결혼식이 중요한가요? 당신, 날 납치한 거예요?”

　“……결혼식?”

　로렌스의 반듯한 입술에 비웃음이 서렸다.

　“이거, 이번에는 과거로 돌아간 미친 짓인가?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다 못해 어디까지 돌아간 거야? 하여튼 아내랍시고 맞은 여자가 미친년이니 내 팔자라고는…….”

　“난 아직 당신 아내가 아니에요, 결혼 맹세를 하지 않았다고요! 그리고 미친년이라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캐런은 분개해서 소리쳤다. 로렌스는 언제나 자신에게 정중했다. 1등급 마법사인 자신을 존경한다 말했었다. 손등에 정중히 키스하고, 무엇이든 자신을 배려했다. 고작 4등급 관료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주변이 ‘너보다 조건 딸리는 남자 만나는 거 아냐.’ ‘그 남자 돈만 좀 많은 한량 아니니? 낙하산 같은데.’ 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열하게 돌변하다니!

　“그럼 멍청한 너 말고 누구겠어? 결혼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내 쪽이야, 뭐든 다 취소하고 싶은 건 내 쪽이라고!”

　로렌스가 폭발하며 손을 올리고 고성을 질렀다. 캐런은 움츠러들었다. 몸이 알아서 겁먹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캐런은 움찔거리며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방어 마법을 운용해 보려 했으나 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섯 살 이전, 마력을 자각하기 전처럼……. 로렌스가 히죽거리며 비웃었다.

　“오, 오랜만에 또 용을 쓰네? 혹시 그 마법인가 뭔가 그거 시도해 보는 거야? 뇌가 망가져서 또 잊어버린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애석하게도 당신은 이제 마력 같은 거 못 쓰는 병신이거든, 캐런 애나 콜드웰.

　그래서 네 손에 청금석 반지가 없는 거야, 국가에서 회수해 갔지. 그 귀중한 표식을 힘을 잃은 껍데기한테 남겨놓을 리가 없잖아? 물론 직책도 뺏겼어. 넌 이제 아무것도 아냐, 이 멍청아!”

　“거짓말!”

　캐런은 온 몸이 오싹해서 고함쳤으나, 로렌스는 턱을 들고 즐거운 듯 웃어젖혔다.

　“그래, 넌 이제 1등급 마법사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 집에 갇힌 미친년이라고!”

　캐런은 헐떡이면서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전부 잃어버렸다! 그 찰나, 누군가가 냅다 뛰어 들어왔다.

　“……!”

　캐런과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네댓 살쯤 되었을까 싶은, 빨간 머리띠를 하고 앵두 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어찌할 바 모르는 것처럼 주춤했다. 로렌스가 아이에게 두 손을 내밀고, 가장된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자, 애쉴리. 네 엄마가 또 정신을 놨다, 어디 엄마한테 가서 네 얼굴 좀 보여 줘라, 엄마가 정신 좀 차리게.”

　아이는 그의 품에 안기지 않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엄마라고? 내가 저 아이의 엄마라는 거야, 지금?'

　 캐런은 충격에 쓰러질 듯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애쉴리라는 아이는 탐스러운 연갈색 머리채부터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까지 캐런과 꼭 닮긴 했다. 아이는 캐런을 곁눈으로 흘끗거리더니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캐런은 비틀비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을 정시했다.

　얼굴빛이 창백하고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있었다. 결혼식을 기다리던 장밋빛 신부는 사라졌다…… 신부의 드레스도, 마법사의 정복도 잃어버린 여자! 캐런은 화장대에 손을 짚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로렌스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만큼 자신도 더 어른이 되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저 아이를 낳았다고? 내가 엄마라고……?’

　곧 엄마가 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수잔나인데! 로렌스는 애쉴리를 벌컥 안아서 캐런 옆에 데려다 놓더니 유쾌하게 물었다.

　“애쉴리,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지?”

　“마법 원년 1398년 6월 5일.”

　애쉴리는 기계처럼 외웠다. 캐런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아니, 벌써 이상해진 건가?

　자신이 기억하는 어제는 마법 원년 1392년 6월 5일이었다. 6월 6일 로렌스 콜드웰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6년이 통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