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아 유튜브 봐 봐! 새로 지하철 노선 공략 영상 떴대!”
“뭐 뭐 어디어디??”
“야! 저기 광고판에도 나온다 속보로!”
툭
정신없이 영상을 찾느라 내 어깨를 밀친지도 모르는 고등학생들이었다.
고등학생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저절로 귓속에 맴돌았다.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 부장놈에게 시달리고, 만년 꼴찌인 실적 때문에 혼나느라 멍했지만 고개를 들 정신만은 남아 있었다.
방금 전 고등학생 하나가 가리킨 광고판을 보니 화면너머에 금발머리의 잘생긴놈이 눈을 찡긋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은 그 동안 아무도 공략하지 못했던 새로운 노선 “시바”선을 공략할 예정입니다. 시바선은 오랜기간 난공불락의 노선으로 알려진 선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드디어 저희 길드 ‘천상계’에서 탐사대를 통한 정보수집과 정찰을 완료했고 귀하디 귀한 보따리상들까지!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개척을 위한 도약! 지금 보십시오!”
잘생긴놈을 찍고 있던 카메라는 그놈의 손짓을 따라 각도를 180도 돌렸고, 이내 광고판 화면을 꽉 채운 것은 어마어마한 판타지스러운 모습이었다.
휘황찬란한 갑주와 사람 키 만한 대검을 들고 있는 전사들, 불을 뿜는 용가리와 그런 용가리를 탄 채 조종하고 있는 테이머 그리고 각양각색의 장비들로 무장한 수백의 원정대와 그들 머리위에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들.
“······와”
눈이 돌아갈 것만 같은 화려한 광경은 사람들의 입을 떡하니 벌려냈는데, 그러고 있는 게 나만은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머니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렸고, 폰을 꺼내려 고개를 숙이자 꼬질꼬질한 양복과 먼지투성이가 된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망신당한 실적을 올리려고 하루 종일 뛰어다닌 노력의 흔적이었다.
‘하···. 내 신세가 그렇지 뭐...’
누가 보았다면 열심히 움직였다는 증거이니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오늘 하루종일 뛰었는데도 한 건도 못 올렸다는 사실은 결과가 전부인 경쟁사회에서는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었다.
“또 이놈의 광고전화네··· 후우,,, 그래 애네들도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신세 한탄과 함께 발을 돌려 집에 가려는 찰나 아까 그 잘생긴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저희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진입자의 미래를 위해! 저희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하지만···. 저희들은 여전히 힘이 부족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힘이 필요합니다! 불행, 좌절, 괴로움! 역 안이든 역 바깥이든 똑같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고 싶다면 저희에게로 와서 힘이 되어주십시오! 본인의 운명을 자기손으로 바꾸는 겁니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새로운 각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진입자가 되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여러분 여기는 지하철··· 당신들의 운명을 인도할 지하철입니다!
“···..”
가슴에서 무언가 꾸물럭꾸물럭 움직이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망? 동경? 이상? 꿈?
아니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밝고 희망찬 그런 감정이 아니라 저 영상을 볼때마다 가슴속 깊이 올라오는 것은,
부러움, 질시, 열등감, 비관
추한 감정들이었다.
보험 팔이 인생으로 하루에 한 개라도 상품을 팔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다.
그게 내 하루 일과다.
퇴근할 때는 와이셔츠안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땀으로 항상 넥타이를 푸는데
일과중에는 아무리 땀나고 답답해도 절대 넥타이를 풀지 않는다.
넥타이를 풀면 목 카라 안쪽이 너무 닳아져서, 걸레마냥 헤져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와이셔츠를 새로 사야 지, 사야 지 하면서도 돈이 아까워 매일 같은 옷만 빨아 입는다.
그런 내 신세가···
번쩍번쩍한 판금갑옷을 입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자 외치는 멋있는 포즈를 취하는 저 잘생긴 놈의 신세와 너무도 비교된다.
저런 사람들을 보며 그냥 순수하게 감탄하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남을 인정하고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있는 아량을 갖지 못했다.
사회의 더러운 물을 깊이 빨아들이며 사는 나는 남을 우러러보기보다 멸시하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자리로 내려앉길 바란다.
더 나은 위치에 서기 위해 죽을 듯 말 듯 아등바등 힘을 쓰기보다 나와 같은 형편에 나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남을 끌어내리기 위해 비겁한 수를 쓸 깜냥도 갖지 못했다.
그게 바로 나다.
‘후우···.’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추악한 감정들에 풀어놨던 넥타이를 다시 고쳐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정들은 꾹꾹 누르며 단지 티를 내지 않는 것뿐.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없는 나는
단지 힘든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에휴··· 집에 가자.”
다시 길을 걷던 와중 괜히 애꿎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지 터벅터벅 발이 무거웠다.
“응? 왠 깡통이···”
그러던 와중 발견한 펩X 콜라 캔.
길 한복판에 ‘나를 차주세요’ 하고 떡하니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 콜라캔의 모습은 빨간드레스를 걸친 섹시한 미녀처럼 보였고 나를 유혹하는 미녀의 손짓에, 나는 근질거리는 발을 참으며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월남동 베컴실력 좀 볼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움닫기 후 감아차기를 시도했다.
탕!
쭈욱쭈욱 멀리 날아가는 콜라캔.
“키이이야···. 역시 죽지 않았지!”
마지막에 발끝을 돌려 회전을 먹여서인지 캔임에도 불구하고 축구공마냥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렸다.
“월남동 베컴 역전골!”
캔이 땅에 부딪힘과 동시에 골 세레머니를 취하기 위해 포즈를 잡았다.
퍽
“응...?”
포즈를 취하던 도중 귀에 들려오는 낯선 소리.
캔이기 때문에 땅에 떨어지면 당연히 따앙이나 탕 하는 소리가 들려야할텐데 마치 무언가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다.
포즈를 잡느라 올린 고개를 내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꼬마아이.
8살 남짓 됐을까··· 누가봐도 “아이 귀여워!” 하며 소리칠 정도로 눈이 동글동글했다.
휘이이익
바람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조용한 정적.
폭풍이 불기 전 고요한 바다처럼 잠잠하던 상황은 꼬마아이의 눈에 눈물샘이 차오름과 동시에 산산조각났다.
“으아아앙앙!!... 엄마!!”
“꼬마야! 그게··· 아저씨가 실수로! 애···애기야 울지마렴!”
처참하게 울고 있는 아이의 주변에는 반쯤 찌부러진 콜라 캔과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바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츄릅 츄릅
“그··· 꼬마야 아저씨가 일부러 한 거 아니니까 이해해줄 수 있지?”
츄르르릅
“아저씨도 너만한 딸이 하나 있는데 날 닮아서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 하하”
츄류류르릅
어색··· 아니 매우 뻘줌했다.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나머지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들고 있었다.
“아조씨!”
“여기 있다!”
어느새 다 먹어치운것인지 막대바만 딸랑 남은 아이스크림을 내게 주고는 내 손에 들려있던 새 아이스크림을 뺏어가는 꼬마.
마치 먹이를 달라는 양 쪼는 아기새같다.
“참 잘먹는구나!”
‘네 이놈의 꼬맹이를 으으···”
속마음과 다르게 방긋 웃은 나는 아이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소매로 닦아주었고, 아이도 기분이 풀렸는지 헤헤 웃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조씨!”
“응? 여기서 더 먹으면 배 아프지 않을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더 사달라고 부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닌지 아이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ㅐ 사라... 츄릅··· 여?”
‘제발 먹든지 말하든지 하나만 해줄래?’
요즘 아이들은 집에서 밥상머리 교육도 안 받는 지, 먹는것과 말을 동시에 하느라 우물우물 해대는 아이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사라···머라구?”
“아니잉, 왜에 사아냐구요?”
“왜 사냐구??”
정녕 이 말이 8살 남짓한 아이에게서 나온 거란 말인가.
혹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요즘 세대가 점점 빨라진다지만··· 허!’
꼬마아이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려 했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쉬이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나이 서른 둘··· 벌어놓은 돈도 없고, 그렇다고 직장이 좋은 것도 아니고···’
흐으음
오직 하나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 때문일 것이다.
다른 평범한 가장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직장인.
그게 바로 올해 32살이 된 김삼생의 아이덴티티일것이다.
비록 지금은 꼬질꼬질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에 행복했던 날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니 좀··· 많이 아플 것 같은 딸.
그만큼 천방지축이란 의미이지만 그런 딸이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우울증에 걸려 매일 입에 술을 달고 살았으리라.
‘몇 년전 사고만 아니었어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먹먹하다.
교통사고.
그 사고로 인해 아내가 식물인간이 됐다.
5년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아내로 인해 매달 드는 병실비와 약값은 엄청났고, 거기다 승아가 자라면서 돈이 더 들자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갔다.
어떻게든 돈을 더 벌려고 나는 주간에는 보험일, 야간에는 회사 몰래 대리기사를 투잡으로 뛰었고,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하루하루 바쁜 내게 승아를 돌보거나 놀아줄 여유는 없었다.
어린나이에 많이 서운할텐데도 불구하고 티내지 않는 것이 어찌나 마음이 쓰라리던지···
아빠가 올때마다 일부러 장난치는 승아를 볼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내게 삶을 사는 이유를 꼽으라 한다면, 아내와 딸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으리라.
“크흠, 왜 살기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으니까 살지!”
“흐음, 츄르릅”
괜히 먹먹해지는 가슴으로 인해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괜스레 무안한 기분이 들어 화제를 돌렸다.
“꼬마야, 그런데 너 집이 어디니? 이 아저씨도 집에 가야해요.”
“집은··· 저어기 이써요. 근데 혼자 갈 수 이써요!”
어느새 날이 거뭇거뭇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때라 걱정이 들었지만, 자신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 집에 조심히 가야한다. 요즘 워낙 나쁜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무나 먹을 꺼 사준다고 따라가지 말고!”
멀뚱멀뚱
아이가 아무 대답없이 나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 아저씨 말고! 크흠, 나는 나쁜 아저씨가 아니라··· 그래 친구! 이 아저씨는 아까 콜라 캔 때문에 미안해서 사과의 의미로 사준거야 친구처럼!”
“치이인구?”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빨아먹으며 우물우물 대답하는 아이로 인해 잠깐 이마에 사거리마크가 돋아났지만 억지로 웃었다.
“그래 친구! 하하하”
무릎을 굽히고 아이와 눈을 마주친 채 손을 잡고 흔들었다.
“치이인구!! 히히”
다행히 내 노력이 통했는지 마주 웃으며 아이가 손을 흔들자 순간 마음이 환해졌다.
‘이게··· 동심인가?’
누가 멀리서 봤다면 왠 후줄근한 아저씨와 꼬마아이가 서로 헤헤거리며 악수하는 괴상한 장면이보였겠지만 이때의 내 순수한 동심은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하하, 이제 아내와 딸보러 가볼까?’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자 아이가 내심 아쉬웠는지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응?”
“이거어!”
“이게 뭐니···?”
“구우슬, 내가 아끼는 구우슬! 우리는 치이인구니까 주울게!”
아이가 준 구슬은 숫자 8이 새겨진 구슬이었는데 먼지가 뭍어서 그런가 숫자가 옆에서 잡아당긴 것 마냥 늘어져 있었다.
“고마워 꼬마친구!”
정말 누군가에게 오랜만에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남에게 무언가 주기만 해봤지, 받았던 기억은 없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오늘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부장에게 깨지고 했지만··· 나름 나쁜 하루는 아닌가’
씨익하고 웃으며 고마운 마음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어느새 골목 너머로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꼬마친구 이름도 모르네”
이것도 인연이라고 다시가서 이름을 물어볼까 했지만 주저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게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승아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늦게 가면 삐진 딸을 달래주느라 한 두시간은 소비해야 하는데, 오늘같이 피곤한 날에는 그것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부랴부랴 몸을 채근하는 나.
흘깃
어느덧 해가 져, 밤의 어스름이 지평선 너머로 맴돌고 있을 때,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 주머니에서 내 발과 함께 덩달아 굴러갔다.